김혜수는 해마다 시상식에서
화려한 자태를 선보이는 건 물론,
영화/드라마를 종횡무진하며 부지런히
저마다 색다른 캐릭터를 쏟아냈다.

백사장 같은 헤어스타일과 비현실적인 의상,
망설임 없이 적들을 베고 쏘고 찌르는 액션 등
<미옥> 역시 생전 처음 보는
김혜수의 면모로 꽉꽉 채워진 영화다.

김혜수가 <미옥>의 현정을 만나기까지,
2000년대 들어 그녀가 선보인
변화무쌍한 캐릭터들을 갈무리해보았다.

신라의 달밤

까랑까랑한 목소리로부터 발산하는 건강한 기운. 김혜수를 대표하는 매력 중 하나다. 주란은 그 결정체다. 하나밖에 없는 가족인 동생 일이라면 껌뻑 죽는 정감 넘치는 누나지만, 아닌 일이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눈을 부라린다.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선생 같은 건달 영준(이성재)과 건달 같은 교사 기동(차승원)이 동시에 그녀를 좋아할 수밖에.

YMCA 야구단

20세기 초를 배경으로 한 <YMCA 야구단>에서도 두 남자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다. 야구단 감독 정임은 선비 출신 타자 호창(송강호)과 일본 유학파 출신 투수 대현(故김주혁)에게 묘한 경쟁심을 유발시키며 팀을 이끈다. 밝고 건강한 이미지를 강하게 어필했던 것과 달리, 2000년대 초부터는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며 신여성 정임의 부드러운 모습을 만들었다.

장희빈

신분을 향한 지독한 의지의 표상인 장희빈은, 시기와 처세에 따라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당대의 여성 배우들이 커리어의 정점을 보여주기 위해 택하는 캐릭터다. 김혜수 역시 2003년 장희빈을 연기했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얼굴없는 미녀

<얼굴없는 미녀>는 유미적인 영화다. 희뿌연 이야기를 어떻게 해서라도 설득시키겠다는 의지보다 과시적인 비주얼을 자랑할 야심이 역력하다. 김혜수가 그 중심에 있다. 아무리 화려한 메이크업과 의상으로 덧칠해도 완벽히 소화하는 그녀의 존재가 영화의 맹목적인 탐미를 지탱한다. glamorous 그 자체. 대종상, 백상예술대상, 춘사영화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분홍신

화려한 구두를 작품처럼 전시하는 선재. 어느 날 밤 지하철에서 발견한 분홍신에 홀리고, 이에 얽힌 원한을 발견한다. 붉은 구두에 집착하는 여자를 연기한 김혜수의 얼굴은 유독 하얗고 겁에 질린 눈은 더 동그랗게 보인다. 선재가 '엄마'였음에도 불구하고, 모성애 같은 구태의연한 심정보다 소유욕이 돋보였기 때문에 보다 인상적이었다.

타짜

섹시함의 대명사라는 인상에도 불구하고, 김혜수의 필모그래피에서 팜므파탈 캐릭터가 차지하는 비중은 의외로 낮다. <타짜>의 정마담은 그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케이스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고, 그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져도 눈 하나 깜빡 않는 사람. 하필 사랑이 그녀를 삐끗대게 한다는 점이 아쉬울 뿐.

바람 피기 좋은 날

<바람 피기 좋은 날> 속 이슬을 보면 어린 남자와 뒤엉켜 하하하하 화통하게 웃어재끼는 모습이 곧장 떠오른다. 그리고 폭발하는 육감적인 에너지는 그 다음이다. 이슬과 작은새(윤진서)는 외도가 발각되는 위기에 고군분투하면서도 반성하지 않는다. 반성의 여지따윈 남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슬의 외도가 온전히 유쾌함으로 남는다.

좋지 아니한가

김혜수가 조연이라니. 콩가루 집안(?)을 그린 영화에서 이모 미경은 상대적으로 변방에 놓여 있다. 하지만 영화는 무협작가를 꿈꾸며 집안을 전전하는 후줄근한 행색의 미경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 문제 많은 집안의 골이 극심해지는 그 순간, 밥통이 터지고 그걸 미경이 뒤집어쓴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열한 번째 엄마

망나니 같은 아빠 밑에서 자라는 소년 재수와 그를 따라온 '열한 번째 엄마'의 우정을 보여주는 영화. 되는 대로 막 사는 모습이 주가 되는 초반, 재수와 함께 서로 외로움을 채워가는 중후반 사이의 변화가 웃음과 눈물을 오가는 김혜수의 톤에 따라 당위를 얻는다. 

스타일

패션지 업계를 배경으로 한단 점에서 <악마는 프라마다를 입는다>가 떠오른다. 편집장 역의 배우가 작품을 완전히 장악한다는 특징 역시 마찬가지. 패션 바닥의 '엣지'와 로맨스의 '감정'의 밸런스를 꽉 붙든 김혜수가 없었다면 <스타일>의 소소한 인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모던 보이

난실은 "인생을 걸"고 싶은 여자다. 친일파의 자식으로 일제강점기를 '즐길 수 있는' 해명(박해일)은 클럽에서 난실에게 매혹되고, 그녀가 준 도시락폭탄으로 인해 망한다. 하지만 순애보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1930년대 복식과 춤/노래까지 완전히 소화하는 김혜수는 매혹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이층의 악당

"자기가 맹한 줄도 모를 만큼 맹한 여자". 김혜수는 연주를 그렇게 소개한다. 남편을 잃고 우울증을 앓는 사춘기 같은 연주는, 집을 호시탐탐 노리는 창인(한석규)으로부터 딸을 지키기는커녕 자기가 늙었다는 한탄이나 늘어놓는다. 손재곤 감독의 독특한 정서가 갈팡질팡 정신 못 차리는 연주로 분한 김혜수를 만나 기묘하고 지독한 유머를 발산한다. 에디터가 생각하는 최고의 김혜수.

도둑들

그간 영화의 흥행과는 연이 멀었던 김혜수의 첫 천만영화. 최동훈의 영화답게 멀티캐스팅이 돋보인다. 다만 그들 가운데 김혜수/팹시는 좀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금고털이의 역할이 배우가 빛내기엔 역부족이고, 배신으로 얽히는 인물간의 관계는 복잡하게 꼬아놓은 타래만 남긴다.

직장의 신

<즐거운 나의 집> 이후 3년 만에 복귀한 드라마. 여러모로 타 방송사 작품과의 대결구도에서 밀리는 양상이었지만, 계약직의 설움을 온몸으로 감당해내는 씩씩한 '미스 김' 김혜수의 호연을 등에 업고 역전의 힘을 보여줬다. 톱스타의 면모를 덜어낸 생활 연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관상

<관상>의 난리통은 기생 연홍에게서 시작된다. 눈치밥 먹던 힘으로 한양 최고 기생 자리에 오른 연홍의 비중은 사실 미미한 편이다. 그러나 어두운 한복 위에서도 화사하게 빛나는 외모와 살아남겠다는 지독한 의지를 휘감은 김혜수는 송강호, 이정재, 백윤식 등 쟁쟁한 배우들 사이에서도  단연 찬란했다.

차이나타운

김혜수와 김고은이라는 여성 배우가 기존의 남성중심 누아르를 비튼다는 점에서 <차이나타운>은 상당한 기대를 이끌었다. '대모'의 풍모가 완연한 김혜수의 변신 역시 그걸 부추겼다. 결과는 아쉬웠다. 희끗희끗한 산발과 기미 잔뜩 낀 얼굴 등 만화적인 요소로는 '엄마'의 딜레마, 일영과의 관계가 속시원히 설득되지 않았다.

시그널

"배우로서 최선이 뭔지,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이 뭔지 생각하게 해주는 작품이다." 백상예술대상 최우수연기상을 받은 김혜수의 소감. <시그널>의 차수현은 '형사'다. 여성 리더를 강조하기 위해 명예남성의 행동을 뒤집어쓰거나, 이재한(조진웅)의 로맨스를 퍼트리고자 느닷없이 여성성을 강조하는 법이 없다. 그저 사건을 해결하며 공직자로서 성장해가는 모습에만 집중한다. 이 담백한 접근이 한 사람의 성장담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하는 강력한 동력이었다.

굿바이 싱글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해사한 김혜수를 만날 수 있었던 작품. 한물간 스타 고주연이 인기를 되찾기 위해 가짜 임신 작전을 펼치며 벌어지는 소동을 그렸다. 제멋대로 살아가는 철딱서니 없는 스타가 미혼모 중학생과 우정을 쌓는 착한 이야기와 김혜수의 건강한 에너지가 만나 좋은 반응을 얻었다.

미옥

단정한 듯 복잡한 금발, 온몸을 화려하게 뒤덮은 모노톤의 의상. <미옥>의 현정은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현정은 지극히 보편적인 감정으로 작동하는 캐릭터다. 이 상반된 지점들이 상충되는 과정에 대한 인상이 <미옥>을 향한 호불호를 판가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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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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