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빠르망>의 재개봉(3월 9일) 소식을 접했습니다. 1997년 3월 개봉한 지 꼭 20년이 지났네요. 오래전 기억에 떠올랐습니다. <라빠르망>을 재밌게 봤던 기억입니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대략 2000년대 초반인 것 같습니다.
대학생 시절, 친구들이 제 자취방에 모였습니다. ‘영화나 한 편 볼까’ 했습니다. 그때는 영화를 다운로드 받던 시절이 아니었죠. 20인치 브라운 TV와 연결된 비디오테크에 <라빠르망> 테이프를 넣었습니다. 당시 동네마다 있던 비디오가게에서 빌렸던지 혹은 동생이 폐업한 비디오가게에서 헐값에 샀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같이 영화를 보던 친구 가운데 프랑스 유학을 계획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때 프랑스어학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영화의 제목 ‘라빠르망’이 무슨 뜻인지 아냐고 물었습니다. 알고 있더군요. ‘라빠르망’(L'Appartement)은 영어로 아파트먼트(The Apartment), 즉 아파트입니다. 뭔가 로맨틱한 단어인 줄 알았는데 실망했습니다.
영화는 실망스럽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어떻게 봤는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만 저는 재밌게 봤습니다. 17여년이 지난 지금은? 재밌게 봤다는 기억만 남아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어서 결국 다시 봤습니다. 다시 본 <라빠르망>은 여러 가지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첫 번째 충격은 <라빠르망>에 출연한 배우 뱅상 카셀과 모니카 벨루치의 젊은 모습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리즈 시절이죠. 모니카 벨루치는 이 영화로 전 세계적인 스타가 됐습니다. 뱅상 카셀은 마티유 카소비츠 감독의 <증오>(1995)라는 영화로 이미 스타덤에 올랐던 기억이 납니다. 어쨌든 다시 본 <라빠르망>에서 두 사람은 젊고 아름다웠습니다. 뱅상 카셀과 모니카 벨루치는 <라빠르망>을 촬영하면서 연인으로 발전한 걸로 유명하죠. 두 사람은 1999년 결혼하고 두 딸을 낳았습니다. 2013년 이혼했지만요.
두 번째 충격은 <라빠르망>의 진짜 주인공이 누군지 확실히 알게 됐다는 점입니다.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모니카 벨루치도 뱅상 카셀도 아니었습니다. 로만느 보링거라는 배우가 주인공입니다. 오리지널 포스터에도 그녀의 이름은 맨 위에 있습니다. 재개봉 포스터만 보면 <라빠르망>이 모니카 벨루치와 뱅상 카셀의 애잔한 사랑 이야기 같지만 거기에 속으면 안됩니다. 영화의 오프닝에서도 제일 처음 로만느 보링거의 이름이 뜹니다. 로만느 보링거가 이 영화의 중심입니다. 그녀가 연기하는 알리스의 거짓말이 <라빠르망>의 비극적이고 애잔하며 어쩌면 잔혹한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녀의 연기도 압권입니다. 마지막의 그 눈빛은 엄청났습니다.
세 번째 충격은 <라빠르망>이 기억과는 달리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닌 막장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영화에 푹 빠져 점심시간이 30분이나 지난지도 모르고 봤습니다. (네, 씨네플레이 에디터들은 업무시간에 영화를 보기도 합니다. 그게 일이니까요.) 같이 점심을 먹기 위해 저를 한참 기다린 후배 에디터가 영화에 대해 물었습니다. “재밌어요? 무슨 삼각관계에 대한 이야기 아니에요?” 저는 대답했습니다. “음… 삼각관계인가? 아니야. 사각, 오각관계야!” 그렇습니다. 이 영화는 꼬일 대로 꼬이고 얽힐대로 얽힌 이상한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이제서야 대략의 줄거리를 설명하게 되네요. 막스(뱅상 카셀)는 상사의 동생 뮤리엘(상드린 카베를랭)과 약혼한 사업가입니다. 도쿄 출장을 앞두고 한 카페에서 일본 기업의 관계자와 비지니스 미팅을 갖습니다. 막스는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전화를 쓰려고 카페 지하의 전화부스에 갔다가 먼저 통화를 하고 있는 여자를 발견합니다. 목소리가 익숙합니다. 리자(모니카 벨루치)! 그녀는 막스가 과거에 사랑했던 리자였습니다. 급하게 카페를 나가는 그녀를 막스는 놓치고 맙니다. 대신 전화부스에서 호텔 열쇠를 발견합니다. 막스는 이때부터 정신줄을 놓고 맙니다. 약혼녀의 배웅까지 받고 공항에 갔지만 도쿄에 가지 않고 다시 택시를 타고 파리로 돌아옵니다. 리자를 찾아야 하니까요.
<라빠르망>은 막스의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특히 초반부는 마치 미스터리물 같습니다. 리자로 ‘짐작되는’ 여자는 실루엣이나 뒷모습만 보입니다. 막스는 리자를 찾기 위해 호텔에 몰래 들어가고, 누군가를 미행해서 결국 리자의 아파트를 알아냅니다. 이 와중에 플래시백이 교차됩니다. 과거와 현재의 화면 전환이 꽤 자연스럽습니다. 대략 이런 식입니다. 과거(플래시백)에서 막스는 리자와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두 사람은 침대에서 아침을 맞습니다. 이때 노크 소리가 들립니다. 똑! 똑! 똑! 화면이 전환되면 현재입니다. 전화부스에서 찾은 열쇠로 몰래 들어간 호텔 방에서 혼자 자고 있는 막스가 보입니다. 호텔 직원들이 방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오가는 복잡한 구조의 <라빠르망>은 인물관계도 복잡합니다. 등장인물의 면면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리자와 막스가 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었는데 어떤 이유로 원치 않게 헤어집니다. 리자에게는 알리스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녀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했죠. 막스에게는 루시앙(장 필립 에코피)이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는 알리스를 사랑합니다. 막스처럼 리자를 쫓는 또 다른 남자 다니엘(올리비에 그랑니어)도 있습니다. 이렇게 다섯 명이 서로 얽히고 얽힌 사랑의 관계에 있습니다. 앗, 한 명을 빼먹었습니다. 막스에겐 약혼자 뮤리엘도 있네요. ‘오각관계’가 아니라 ‘육각관계’였군요.
이 여섯 명은 우연히 마주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우연히 마주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죠. 영화에서 “익스큐즈 무아” 하면서 누군가와 부딛치는 장면이 등장할 때는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겁니다. 영화를 보고 나니 이 여섯 명의 정확한 관계도를 그려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관계도를 그려서 공개하면 스포일러가 되겠죠?
<라빠르망>의 복잡한 사랑의 묘미는 할리우드에도 전파가 됐습니다. 조쉬 하트넷, 다이앤 크루거, 로즈 번 등이 출연한 리메이크 영화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2004)가 제작된 거죠. 이 영화는 <라빠르망>과 거의 유사한 이야기로 진행되지만 다른 결말을 보여줍니다. 할리우드 영화답게 <라빠르망>의 씁쓸하고 누군가에게는 불쾌할지도 모를 결말 대신 아름다고 애절한 느낌의 결말을 준비했습니다. <라빠르망>을 먼저 본 사람은 그 결말에 실망할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반대로 전형적인 할리우드 스타일의 사랑 이야기가 좋다면 <라빠르망>이 재미없을 수도 있겠네요.
개인적으로는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는 그저그랬습니다. <라빠르망>의 리자에 해당하는 리사(다이앤 크루거)에 감정이입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엑스맨> 시리즈의 모이라 역으로 유명한 로즈 번이 연기한 알렉스에게 반하고 말았거든요. 알렉스는 <라빠르망>의 알리스 역할입니다. 알렉스/알리스는 이 모든 사달(?)의 중심점이라 미워해야 할 캐릭터입니다. 미워해야 할 캐릭터에게 반했다는 건 로즈 번의 연기가 부족했다는 얘기일까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뭔가 캐릭터의 힘이 빠져 버린 겁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는 할리우드 스타일로 매끄럽게 다듬어지면서 원작만큼 살아 있는 캐릭터의 힘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라빠르망>의 달콤쌉싸름한 매력은 알리스라는 캐릭터가 지닌 여러 모습에서 기인합니다. 미움 받는 캐릭터일 수도 연민을 자아내는 캐릭터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로만느 보링거의 연기가 캐릭터의 힘을 제대로 보여줬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마지막의 눈빛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예전에 <라빠르망>을 봤을 때는 ‘알리스, 저 나쁜!’ 이랬습니다.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알리스, 저 불쌍한ㅠㅠ’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녀의 거짓말도 나빴지만 진짜 나쁜 사람은 따로 있었습니다. 이랬다 저랬다 여자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막스입니다.
왜 막스가 나쁜 남자인지는 사실 영화의 제일 첫 장면에서 은근히 암시합니다. 막스는 보석상에서 세 가지 반지에 대한 설명을 듣습니다. 아마도 약혼자 뮤리엘에게 줄 반지겠죠. 보석상 주인은 세 반지의 매력을 설명합니다. 경박하지 않아서 아름다운 반지, 화려하고 날카롭기에 잘못 만지면 다칠 수 있는 반지. 수수해 보이지만 숨은 매력이 있는 반지까지. 설명을 들은 막스는 어떤 반지를 골랐을까요.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세 반지 모두 마음에 드네요. 나중에 연락 드릴게요.” 세 개의 반지가 리자, 알리스, 뮤리엘을 상징한다면 이 나쁜 남자는 계속 세 명의 여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할 거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복잡미묘한 사랑의 감정을 ‘육각관계’ 속의 미스터리 구조로 보여주는 <라빠르망>에서 막스는 어떤 선택을 할까요. 지금까지 에디터에게 대학생 시절의 추억을 떠오르게 만든 1990년대 감성의 매력적인 로맨스 영화 <라빠르망>을 다시 본 후기였습니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신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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