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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서울의 봄〉김성수 감독, “악당들은 악당들일 뿐. 세상은 그대로야!”

씨네플레이
김성수 감독 (제공=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김성수 감독 (제공=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1초 만의 압승이다. <서울의 봄>의 도입부, 운집한 장교들 사이로 이태신(정우성)이 들어오는 순간, 김성수 감독에게 곧바로 두 손 들었다. 지금부터 내가 ‘목도 할’ 이 영화는 절대 한 순간도 만만히 대적할 상대가 아니구나! 도입부부터 <서울의 봄>은 이 장르가 고민해야 할 기술적, 표현적인 숙제를 모두 풀고 관객을 압도하면서 시작한다. 마치 1979년 12월 12일 서울의 밤, 긴박했던 그 순간의 표정을 처음 공개하는 듯한 인상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크리스토퍼 놀란 같은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본 것 같은 팽팽한 텐션은 이후 영화가 진행되는 141분 동안 끊임없이 관객을 앉은 자세에서 기립하게 만드는 이 영화의 일관된 톤이다.

<서울의 봄>은 실제 12.12 사태를 모티브로 그날의 밤을 재구성한 역사극이다. MBC 드라마 <제5공화국>(2005)을 비롯한 TV 드라마로 극화된 적 있지만, 스크린에 그날의 9시간만을 떼어 내 본격적으로 영화로 다룬 건 처음이다. 1979년 10월 26일, 독재자의 심장을 쏘아 올린 총성 이후, 대한민국의 ‘빼앗긴 민주화의 봄’은 많은 현실을 기반으로 영화를 만드는 대한민국 감독들이 무수히 써 내려가고 번복하고 상상하고 되새김질 했던 과업이었다.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 사람들>(2005)과 장준환 감독의 <1987>(2017), 장훈 감독의 <택시 운전사>(2017) 등 매 작품 장르를 변주하며 써 내려간 역사의 변곡점들, 그리고 작년 이정재 감독의 이 모든 역사를 모자이크한 상상더하기 <헌트>(2022)에 이르기까지, 굴곡진 현대사를 바탕으로 감독들은 연출자이기 이전, 그 시기의 목격자이거나 시민이었던 자신의 시점과 현재의 관객을 이어주려 노력해 왔다. <서울의 봄>은 숨겨뒀던 퍼즐의 한 조각이 되어, 앞선 작품들과 연결해 한국 현대사를 흥미롭게 읽어 줄 인과를 생성해 낸다.

‘프라하의 봄’의 제목이 연상되지만, 전두광의 야욕을 저지하려 그 밤 고군분투하는 <서울의 봄>의 수도사령경비관 이태신에게 그 밤은 역사와 이데올로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뇌할 여유를 1초도 허락하지 않는다. 오로지 직진, 한 방향으로 전두광 저지로 돌격하는 강인한 신념의 장교 이태신은 군부독재, 쿠데타로 오염된 ‘군인정신’ ‘지휘자’의 모습을 비추며, 우리에게 역사적인 그날 밤 진짜 필요했던 것이 무엇인지 강렬하게 각인 시켜 준다.

<아수라>(2016) 이후 7년 만의 신작. 김성수 감독의 영화적 역량이 총 망라된 이 작품은 사건을 익히 알고 있는 이들조차, 러닝타임 내내 다른 결론을 초조하게 염원하게 만드는 장르영화의 기막힌 텐션으로 141분의 러닝타임 막바지에 와서야 관객들이 아! 하고 숨을 한번 내뱉게 만들어 낸다. 강력한 악당의 승리도 대적할 영웅의 승리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된 그 순간, 김성수 감독이 장르영화의 문법을 어떻게 해체, 조합해 자신이 바라던 목적지에 도달했는지 알게 해준다. 촬영, 편집, 음악, 미술, 그리고 배우들의 각 파트가 각자의 역할을 훌륭히 완수하지만, 어디까지나 영화의 중추가 된 ‘연출’이 완벽하게 씬을 장악한 상태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하모니다.

영화의 완성도가, 현실의 관객에게 공분을 자아내는 메시지까지 도달하는 이 거부할 수 없는 영화의 성취 뒤에는 김성수 본인의 이 사회를 향한 놓칠 수 없는 질문이 있었다. 1979년 12월 12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사는 고3 학생으로 독재와 야만을 추동했던 그 총성을 들은 십대의 소년기를 지나 이제 중년이 된 감독 김성수가 지금의 관객들과 이 영화를 통해 만나야 했던 이유를 들어 보았다.

 


 

〈서울의 봄〉
〈서울의 봄〉

얼마 전 정우성의 연출작 <보호자> 개봉 때, 감독님께서 영화를 지지하셨어요. 제가 출연하는 유튜브 채널 ‘무비건조’에서도 출연해 주셨고요. <비트>(1997) 이후 정우성 배우와 다섯 번째 협업인데, 이번에도 결실을 봤구나 싶었어요. 마침 그때가 <서울의 봄> 후반 작업 막바지였는데, 불과 얼마 전인데도 <서울의 봄>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분위기였는데요. 기자로서는 신작을 앞둔 감독님에게 영화에 대해 미리 파 보고 싶다 하는 궁금증에 아쉽기도 한 만남이었어요. (웃음) 실화, 실재 인물을 소재로 한 만큼 제작과정에서 민감한 부분들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었어요. 제작의 의도와 다르게, 실제 잡음이 있었던 경우도 여럿 있었고요.

그땐 고마웠어요. (웃음) 사실 만들면서 제가 ‘민감한’ 걸 건드리고 있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이 영화의 캐릭터 이름이 실재 인물들과 다르잖아요. 제가 비겁하게 이름을 바꿨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이 영화를 만들 때 생각한 건 인물들이 펼치는 상황극이었어요. 역사 속에 있는 사료와 상황을 가지고 오긴 했지만, 그들이 꼭 그 인물들 자체일 필요는 없었어요.

명백히 ‘전두환’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의 이름에 ‘광’! 광인이라는 의미를 덧붙여 이름을 바꾼 걸 보고 오히려 연출자의 의도가 들어간 더 ‘센’ 이름을 부여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는데요.

투표로 정한 이름이었어요. (웃음) 그 인물이 연상되지만 다른 이름을 만들자 했을 때 여러 후보군이 나왔는데, 그중 전두광이 표를 제일 많이 받았어요. 좀 희화화된 느낌이라 전 좀 자연스러운 이름이길 바랐는데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 하니까 받아들였죠. 지금 스태프들이 저랑 10년을 넘게 같이 일해온 팀이잖아요. 그들의 의견을 분명 존중하게 되는 거죠. 사실 그 인물은 원래의 모델이 된 인물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캐릭터예요. 역사적 사건도 그 인물 때문에 벌어졌고, 영화 속에서도 ‘전두광’이라는 캐릭터로 인해 모든 사달이 벌어지는 거니까요. 그 이름이 만약 그런 인물의 지시어로서 맞는 이름이라고 하면 그걸로 가도 좋겠다 싶었어요.

이 캐릭터가 세상에 나온 이상, 이제 ‘전두광’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의 쾌감, 단죄의 의미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게 된 것 같아요.

이름을 바꾼 건 비겁하다는 말도 들었는데, 저로서는 이름을 바꾸니까 좀 자유로워졌어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으니까 한층 편해지더라고요. 제가 <아수라> 이래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직성이 풀리는 못된 버릇이 생겨서요. (웃음) 이름을 바꾸고 나니 마음껏 제 상상력을 개입시킬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창작자인 제게 운신의 폭이 생겼다고 해야 할까요.

 

〈서울의 봄〉
〈서울의 봄〉

전작 <아수라>(2016)에서 대중 장르의 영역 안에서도 통제되지 않은 김성수 감독의 연출 색깔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는 데 동의하는데요. 아마 그 시도가 있었기 때문에 <서울의 봄>에서 좀 더 과감한 시도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적어도 이 감독은 눈치 보고 영화를 만들지는 않겠구나, 영화의 편에 온전히 서 있다는 믿음을 주는 연출자인데요.

눈치를 안 본 게 아니라, <아수라> 때는 이 작품을 끝으로 영화계를 떠나겠구나, 그러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끝내자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저는 제 인생을 영화에 바쳤으니까, 그렇다고 변변한 영화를 관객에게 보여드리지 못했지만, 막판이니까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해보자 그리고 끝내려고 그랬죠.

영화적 완성도와 결기에 있어서 물러남이 없는 작품이라 저도 지지를 했어요. 이 작품으로 <아수라> 팬클럽인 ‘아수리언’들은 감독님에게 ‘영화의 신’이라는 수식어를 붙였고, 새로운 세대의 관객과도 호응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작품이었어요.

아니죠. 그건 후의 일이었고, 첫 반응은 냉담했죠. 물론 하고 싶은 것을 원 없이 마음껏 쏟아내긴 했어요. 배우와 스태프들에게도 “이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니까 그냥 무조건 좀 하자” 했어요. 그러면 다들 알겠다고, 팀이 저를 따라와 준 거죠. 그 사람들은 감독이 원하는 대로 하면 좋은 영화가 나올 거라고 기대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막상 완성하고 나니 너무 이상한 영화가 나온 거죠. (웃음) 그때 제가 배운 건,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마음대로 하면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 있구나. 그러니 내가 내 생각만 하고 영화를 찍기보다는 이걸 받아들이는 사람도 생각해야 된다는 걸 세게 느꼈어요.

<서울의 봄>은 감독님 나름대로 그렇게 영화에 대한 결심이 생길 즈음 만난 시나리오였는데요. 동시대에 내가 밟고 있는 땅에서 벌어진 일, 역사적 사건을 영화화하는 것은, 시대와 호응해 관객을 만나는 연출자가 어느 시기에는 꼭 한 번 풀고 갈 숙제처럼 다가온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런 면에서 말씀하신 흥분이 영화의 톤앤매너에 감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여지도 분명 배제할 수 없는데요.

그 부분이 컸던 것 같아요. 처음 시나리오 받았을 때 그 시나리오가 훌륭했거든요. 정말 손색없이 잘 쓴 시나리오였어요. 다만 그 시나리오는 역사적 정황, 상황을 굉장히 압축적으로 잘 된 굉장히 훌륭한 압축 정리였다고 생각했어요. 팩트로 꽉 채워져 있으므로 제가 들어갈 자리가 없더라고요. 그걸 보고, 제가 그 사건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그렇게 깊은 관심이 없다는 걸 스스로 처음 알았어요. 제 머릿속에 있던 건 사건 당시 19살의 제가 그런 느닷없는 일을 겪게 되었고 그게 너무 강력한 인상으로 남았다는 거였어요. 당시 한남동에 살았는데 육군참모총장 공관 건너편에 있던 친구 집 옥상에서 들었던 총성이 잊히지를 않아요. 제가 호기심이 많고 까부는 아이였는데 그 앞까지 가서 굳이 그걸 구경하려다 총성을 들었는데, 거기를 못 떠나겠더라고요. 호기심에 그 소리를 계속 듣고 있었는데 그때 소리가 제 기억으로는 너무 무섭고 컸던 것 같아요. 그렇게 20여 분 넘게 덜덜 떨었던 그 밤의 기억이 굉장히 강력하게 저한테 각인되어서 정말 잊히지를 않아요. 그건 영화와 상관없이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그렇게 그 기억이 저를 붙잡고 있다가, 제가 감독 데뷔할 무렵에 그 사건이 다 드러났을 때 크게 충격을 받았던 것 같아요.

〈서울의 봄〉
〈서울의 봄〉

두려움에 떨던 십대의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이 영화는 철저하게 배제한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하는데요. 지극히 가능한 선에서의 건조함을 유지하려는 시선이 이 영화의 몰입도를 배가시켜주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이 톤앤매너로 가기까지 연출자로서 어떤 고심이 있었나요.

그 사건의 모든 게 드러났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도대체 이 대단한 아저씨들이 모여서 이 짧은 시간 동안에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지. 이들 내부에 무슨 일 있고, 이 사람들은 어떻게 했길래 마치 도미노가 무너지듯이 모든 것이 이렇게 쉽게 와르르 무너진 거야. 이게 저한테는 의문이자 속상한 마음이었고, 그 마음이 저를 계속 따라다녔던 것 같아요. 제안받고 처음에는 물러섰지만, 한편으로는 그 시나리오가 저를 꽉 붙들고 안 놓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어떤 시나리오 초안을 갖고서 고민할 때보다 이번에 더 크게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나는 왜 이걸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지, 왜 자꾸 들여다보고 있지, 왜 그 생각에 빠져들어 있지 스스로 반문해 봤죠. 그러다 보니 찾아낸 마음이, 제가 그때 그런 일이 벌어진 사람들에 대해서 좀 화가 나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이걸 하면 그들의 승리의 기록이 되지 않을까’ ‘형이 악당들도 멋지게 그릴 거 아니야’ 하는 걱정의 말들을 했어요. 저는 제가 이 사람들을 멋있게 그리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신했어요. 이 영화가 제가 했던 영화 중에서 제일 어려운 영화고, 모든 면에서 되게 골머리를 많이 앓았지만, 촬영장에서 이 시나리오로 이 배우들과 이 스태프들과 이 이야기를 만들 때 오는 재미가 분명 있었어요. 역사를 재현한다기보다는 제가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제 의구심과 제 상상력에서 빚었던 것들을 만들어 나가는 작업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강렬한 빌런이 될 실제 인물에 대한 감독님 방식의 접근이 시작된 건데요.

악당을 주간 1인칭으로 놓고 그리는 훌륭한 영화들 많잖아요. 역사적 정황에서 인물을 놓고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그리는 경우도 있고. 제가 생각한 건 전쟁터에서 종군 기자가 마치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드라마와 다큐멘터리의 중간 어디쯤에서 그 상황극을 지켜보며 같이 그날의 9시간을 달려가는 느낌이죠. 그리고 또 하나의 축은 정서적으로나 정황적으로는 반대편에서 끝까지 이들에 맞선 의로운 군인, 마지막까지 버틴 남자, 그 사람에게 좀 감정적으로 몰입해 그의 시선으로 이 상황을 보게 하면, 이게 절대로 그들의 승리의 기록으로 남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 되겠다! 그래서 이제 제 이야기를 길게 써서 제작사 대표(하이브미디어코프 김원국 대표)에게 보냈어요. 나는 이렇게 가고 싶은데 만약에 이 방향이 괜찮다면 저한테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한번 잘 만들어 볼게요 했죠.

끝까지 사건을 따라가게 만드는 힘은, 다 알려진 사실임에도 영화 속에서 한치 예측 불가능한 지속적인 반전의 장면 배치였는데요. 전두광의 폭주를 저지하는 이태신 캐릭터를 전두광과 상반된 인물로 빌드업 내러티브에 탄력을 만들어 내고요. 이 부분에서 감탄한 부분은 흔히 이런 긴박한 드라마를 써 내려갈 때 볼 법한 남성 간의 케미스트리나, 연대로 관객의 감정을 손쉽게 자극하지 않고 이태신을 비롯해 홀로 각자의 자리에서 싸우는 점묘법처럼 찾아내는 연출자의 시선이었어요. 결국 이태신의 등장, 그의 방어가 극의 구조와 구성을 만들어 내는 역할까지 하는데요.

영화가 두 사람의 공방전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보는 사람들은 이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그런 계속 예측 불가능한 생각이 들어야지 계속 보게 되잖아요. 실제 모델이 된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은 전두광보다 더 강하고 더 호랑이 같고 엄청난 불같은 분이죠. 영화는 역사적 정황을 좀 넘어서야 하는 게 많으니 이태신은 실제와는 캐릭터도 바꾸고 인물도 바꾸고 하자. 전두광의 이름으로 자유를 얻은 것처럼 이태신을 만들고 나니 이야기에 자유가 생기더라고요. 이태신과 반대로 전두광은 이제 그런 탐욕의 화신이자 왕 탐욕의 왕, 마왕 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랐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어쨌든 그 사람도 리더십도 있고 강력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 사람도 그 승리를 쉽게 쟁취한 건 아니잖아요 제 영화 안에서는. 그 과정을 거치면서 승리를 거머쥐는 과정에서 그 사람은 더 더 악인이 돼가는 거죠.

 

〈서울의 봄〉
〈서울의 봄〉

성취의 기쁨을 맛본 악인의 ‘탄생’이 영화의 마지막이 되는 거군요.

어쩌면 나랑 비슷한 사람일 수도 있죠. 그랬더니 스태프들이 저를 자꾸 전두광이라고 하더라고요. (웃음) 저는 제 영화 속에 있는 전두광은 완벽한 악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더러 장점도 있었지만, 자기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 사람. 주변 사람들, 친구도 다 이용해서 그 승리에 도달했을 때 그때 그 사람은 탐욕에 의해서 먹혀버린 거죠. 자기 존재가 다 사라져버리고 그냥 탐욕만 남아버린 사람이 됐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사의 그 유명한 악당의 탄생이 된 거죠. 영화에서 전두광의 승리의 순간 그가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혼자 환호하는 씬을 그래서 넣었어요. 마치 배설물처럼 악당이 탄생해버린 거예요. 우리 영화는 거기서 끝나지만, 그 뒤에 그보다 훨씬 더한 악행을 저지른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라고 하는 것이 저의 영화적인 해석이에요. 이 탐욕을 시작한 한 사조직이 쇠퇴하기는커녕 더 크고 많은 세력으로 커간 이유는 그가 많은 사람의 욕망을 자극하고, 어떤 생존 본능을 자극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전두광이 타인의 욕망을 부추기고 땔감 삼아 세력을 확장한다면, 이태신의 명분은 누구에게도 내줄 것이 없는 희생을 요구하는 것인데요. 결국 세력을 잃어가고 홀로 남죠. 결국 후반부는 전두광 VS 이태신이 맞서는 둘의 대결 구도로 전환되는 흐름을 만들어 내고요. 이태신이 수세에 몰릴수록 그의 신념과 분투가 드러나고 전두광이 매력적인 빌런 캐릭터로 굳혀지는 것을 저지하는 장치 중 하나로 작용하는데요.

명분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잖아요. 군인들은 희생을 당연히 할 거로 생각하지만,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습니까?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는 점점 쓰러져 나가서 결국 그 사람 혼자 남아야 하거든요. 근데 그 사람이 혼자 남았을 때 흥분해서 불같이 날뛰는 그 사람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히려 활화산 같은 전두광에 비해서 이태신은 오히려 부드럽게, 마치 노장 철학에 나오는 그런 물 같은 사람이어야 된다고 그랬어요. 그래야 지금 오늘날의 관객들이 볼 때 강력한 마초들의 리더십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확고한 신념이 있는 합리적인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관객들이 이 상황을 볼 때 훨씬 더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야겠다. 그렇게 덤덤하고 건조하게 이 상황을 대처할 캐릭터로 만들고 나니까 우성 씨가 이 역할을 하시면 너무 좋을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시나리오 주고, “이거 죽이지 않냐, 너 해라” 그랬더니 그때 <헌트>(2022)를 막 끝나고 나서 그런지 “너무 <헌트> 같아요” 그러더라고요. 계속 괴롭혔죠. 스토커처럼 계속하라고 했더니 그제야 하겠다고. (웃음)

9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 서울의 밤이라는 세팅으로 영화의 스릴러적인 장르가 도드라지는데요. 12.12 사건 발생의 계기가 된 박정희 시해를 다룬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 사람들>이 블랙코미디 장르를 적극 활용해 사건을 해석했다면, <서울의 봄>은 장르를 앞세우지 않지만, 역시 선택의 순간 자신의 계급과 지위에 맞는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인물들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인한 피식거리는 웃음 포인트를 지속적으로 제시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것 자체가 실소를 자아내는 상황이잖아요. ‘진짜 웃기고 있네’ 약간 이런 느낌이요. 만약에 누군가에게 12.12 때 어떤 일이 벌어졌나를 이야기해 보라고 하면 그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라고 하면서 얘기를 시작할 것 같아요. 사리 분별에 맞지 않은 행동이 너무 많이 있었다는 거잖아요. 영화적으로는 이 영화가 무겁고 어두우니 캐릭터들이 감초 역할을 했으면 한 것도 물론 있지만, 그들은 영화를 떠나서도 우스운 인간들이죠. 그 하찮은 인간들이 중요한 위치에서 중요한 것처럼 하는 것 때문에 역사가 이 모양 이 꼴로 될 수 있었던 거예요. 진짜 한심한 방식으로 그것들을 대응하고 결정을 내리고 나중에는 그걸 자기들이 굉장히 중요하게 고민해서 내린 결론인 것처럼 이제 미화하겠죠. 그 소동극을 있는 그대로, 마치 그들 옆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보여주고 싶었어요.

 

〈서울의 봄〉
〈서울의 봄〉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영화의 전반에 깔려 있는 것은 결국 1979년 서울의 밤공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어 버린 도시의 밤, 스모그가 낀 것 같은 공기는 지금의 네온이 화려한 서울의 밤거리와 차별화되는데요. 결과적으로 이 탁하고 차가운 온도가, 제가 유년기에 경험했던 80년대 서울의 최루탄 가득한 냄새로 이어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영화가 그 공기를 재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기를 살아온 관객들에게는 확실히 영화 이상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줄 거라 생각해요. 암울했던 시대의 공기를 화면으로 포착해 영화의 전체 톤으로 묘사하기까지 어떤 고민과 실행이 뒤따랐나요.

정말 중요한 요소였어요. 저희가 몇 달 동안 미술 자료를 준비했는데. 마지막에 장근영 미술 감독이 ‘지금 모든 준비가 거의 된 것 같은데 제일 중요한 것이 있다’라고 브리핑을 했어요. 왜 저러나 했죠. (웃음) 장근영이 그때 말한 게 1979년 12월 12일 그 밤의 공기였어요.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에 찍었던 한국영화 속에 있는 도시 장면들, 그 당시 서울이 보이는 뉴스 화면들 이런 영상들을 쭉 모아왔더라고요. 그런데 영상들을 보니 공기가 너무 안 좋은 거예요. 진짜 공기가 안 좋아서 그랬구나. 스모그가 많고 먼지가 많아서 모든 사진이 다 뿌연 거예요. 그땐 연탄이 주 에너지 연료였고 그래서 매캐하고 뿌옇고 탁한 공기였어요. 그게 바로 우리가 구현하려던 12월 12일이더라고요. 화면에 잡히지는 않아도 우리 영화는 이 느낌을 표현해야 된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미술적 요소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 그 시대의 공기를 체험하게 해줘야지, 내가 여기 와 있다고 할거다 라고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 톤이 실질적으로 이 영화를 만드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치더라고요.

짚어봐야 할 성취가 많은데요. 영화의 표현, 기술적인 성취를 언급해야 하는데요. 사실 <서울의 봄>은 시작과 동시 1초 만에, 이 영화가 가진 긴급한 상황에 대한 설명이 완벽하게 끝나는, 게임으로 따지면 관객의 기선을 제압하고 가는 영화예요. 캐릭터 하나가 움직이는 대신, 배경 전체가 인물들로 채워져, 마치 캐릭터들이 배경인 것처럼 그들이 운집되어 움직이는 장면의 연속인데요. 자칫 이 많은 인물을 한 프레임에 담다 보면 장면이 뭉툭해지게 마련이라, 그 문제를 해결하고 장면과 장면 사이의 리듬을 만들어 내는 게 화면이 전진하게 만드는 선결과제였을 텐데요. 촬영, 조명, 액션, 미술 등 각 부분의 역량의 최대치와 연출의 합이 필요한 도전이었는데, 장면 설계에 어떤 노력이 있었나요.

모여서 그들끼리 속고 속이고 세력 다툼하고 힘자랑하고 그다음에 눈싸움 이걸 보여주기 위해서 그 인물들을 최대한 좁은 공간에 밀어 넣었어요. 거기서 인물들 간의 그런 위계와 그런 으르렁거림을 만들기 위한 블로킹 라인을 최대한 만들고 인물들을 계속 움직이고 서로 부딪히고, 째려보게 하는 여러 가지 동작들을 넣었죠. 촬영 전에 모든 신을 연극하듯이 연습했어요. 장면을 멋지게 찍기보다는 인물들의 욕망의 에너지가 움직이는 것을 카메라가 따라가면 뻔한 앵글이 아니라 다른 게 만들어지겠구나. 인물 간의 구도보다 그 인물들 간의 어떤 충돌의 어떤 기운을 보게 된다는 생각으로 한 거죠. 이 방법을 <아수라> 때 이모개 감독과 쓰고 우리는 굉장히 만족스러워서 이번에도 또 그렇게 하자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쉽지가 않더라고요. <아수라> 때는 기껏해야 다 모인 게 마지막 5명이거든요. 그런데 이 영화는 한 화면에 나오는 인물이 10명, 20명, 30명 막 이렇죠. 너무 많고, 너무 세요. 그리고 이 인물들이 다 움직이거든요. 그래서 1시간 정도의 리허설로도 이 동선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연기력이 출중하거나 연극 무대 경험이 많은 배우들을 다 망라했어요. 한 장면에 15명만 되더라도 배우한테 2분씩만 상황을 설명하면 30분이 그냥 지나가잖아요. 그런데 이분들이 워낙 전문가라서, 저는 이렇게 할게요, 여기서 이렇게 하면 안 돼, 이렇게 하자 하고 그걸 만들어 나가신 거죠. 그래서 하나의 군무처럼 장면들이 완성되어 나갔어요.

 

말씀대로 베테랑 배우들이 전면에 배치된 현장이라 거기서 오는 합과 에너지가 느껴졌어요. 분명 우리가 익히 아는 배우들인데, 베테랑 배우들의 노하우를 집약적으로 확인하고 있다는 희열이 매 장면 엿보였는데요.

배우분들께 감사하죠. 다 다른 작업으로 바쁘신데도 기꺼이 참여해 주셨어요. 대사 한마디 없는 장면에서 뒤에서 왔다 갔다 하는 장면을 찍을 때도 지방 세트장까지 오셔서 참여해 주셨어요. 아마 이 이야기가 그분들을 끌어당긴 것 같아요. 뭔가 우리가 좀 중요한 것을 만드는 데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셨던 것 같아요. 제가 1년 내내 편집하면서도 편집기로 촬영 샷들을 보면, 전혀 보이지도 않을 데서 배우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연기를 매 장면마다 제대로 하고 계시더라고요. 감동적이라고 해야 할까. 이 작업을 하면서 그런 감동을 느꼈어요. 우리가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보이지 않게 서로 헌신하고 있구나 이런 느낌이 들었어요.

 

〈서울의 봄〉
〈서울의 봄〉

촬영 과정에서 참여자들의 열기에 비하자면, 앞서 말한 대로 영화의 톤은 건조하게 누른 채, 사건의 전개로 힘 있게 전진하는 방식을 고수하는데요. 감정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그럼에도 이 영화에는 감정이 발목을 잡는 한 시퀀스가 존재해요. 바로 헌병대장 특전사령관(정만식)과 비서실장(정해인)의 교전 중 사망 씬이예요. 이 감정이 비집게 나오도록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분명 전체 영화에서 도드라지리라는 것을 알고도 감독님이 허용한 감정의 과잉이라고 봤는데요.

그 신이 논란이 많았어요. 영화의 하이라이트, 제일 중요한 시점에 주인공들이 8분 정도 안 나타나잖아요. 물론 그분들 정만식, 정해인 씨가 중요하지 않은 역할은 아니지만 어쨌든 빈도수가 작잖아요. 그런데 마치 픽사 영화에서 시작할 때 단편 애니메이션이 나오듯이 하나의 단편 영화가 하이라이트 시점에 들어가는 게 맞냐. 특히 이 영화는 어느 한 장소에서 머물지 않고 그 당시에 있었던 서울의 여러 곳을 무대로, 그런 긴박한 상황들의 각 장소에서 9시간 동안 시간이 동시에 흘러가는 영화라는 느낌을 줘야 했거든요. 그렇게 한꺼번에 시공간이 흘러가면서 다 분절된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근데 이 씬은 갑자기, 병행 편집조차 없이 들어가다 보니 영화의 균형감이 안 맞는다는 지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이 씬이 영화의 통일성이나 균형감이나 형식미를 해칠지라도 넣어야 하는 장면이었어요.

그 고집의 핵심은 무엇이었나요?

저는 그 두 명의 특전사령관과 그의 비서가 그날 당일의 최대피해자였다고 생각해요. 그들은 결코 그런 일을 당하거나 감당할 필요가 없었는데, 그런 공격을 받을 상황도 아니었는데, 자신들의 부하이자 동료가 그 방에 두 사람을 가둬두고 난사를 했거든요.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한 부분이 있지만, 그 모든 상황이 자료를 찾아보면 거의 똑같아요. 저처럼 감정이 메마른 사람조차 그 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막 울었어요. 이분들뿐만 아니라 김성균 씨가 연기한 육본 헌병감 같은 분들도 있었죠. 다들 도망갔는데 그 자리를 지킨 것 때문에 그 사람들 인생은 너무 큰 비극과 불행을 겪었어요. 그들이 자기를 위해서 그런 행동을 한 게 아니잖아요. 군인이기 때문에, 국가를 위해 한 일이죠. 저는 그 사람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앞으로 필요한 사람이 그런 사람이잖아요. 그 사람들이 있으므로 인해서 이들이 잘못됐다는 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 그들이 역사 속에 있는 진짜 군인, 우리가 생각하는 멋진 군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 장면이 좀 튀어나오는 모서리같이 느껴지더라도 넣자. 두 분에 대한 저의 어떤 마음과 또 이 영화의 마음을 그 씬에 다 넣고 싶었어요. 제가 이모개 감독에게 말했죠. 이건 드라마틱하게 찍는 게 맞는 것 같다고. 이 부분이야말로 100% 사실이니, 나는 그렇게 가고 싶다, 그래도 되냐고 했더니 동의를 해주더라고요.

 

영화적 재미를 놓치지 않고 가는, 장르적인 재미를 충족시켜주는 작품이라는 충분조건이야말로, 감독님이 하려고 하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이 영화의 장치인데요. 결국, 이 작품이 가진 영화 본령의 재미가 결국, 동 세대를 넘어선 다음 세대한테 주고 싶은 메시지로 확장될 거라 생각됩니다. 감독님께서 1979년의 이야기를 2003년에 제시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이 사건이 그리고 저희 세대 또 제가 살던 세상에 굉장히 큰 사건이었잖아요. 그런데 그걸 지금 왜 들춰내서 이야기해야 하나 하는 것에 대한 답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좀 상투적인 말이지만 현재가 과거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이유는 미래 때문이잖아요. 지금의 젊은 세대분들한테 이 이야기를 제가 꺼내는 건 이 이야기가 제가 어린 시절에 이 이야기를 경험하고 상상하고 화내고 또 생각하면서 제 삶에 어떤 태도를, 관점을 준 것 같아요. 지금의 어린 관객들도 이 영화를 보고, ‘영화 재미있다. 그런데 이게 진짜 역사적인 상황이었다며. 비슷하게 그렸다며’라는 걸 시작으로 그렇다면 진짜 역사는 어떤 거였나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역사를 들여다보시면서 상상하실 수 있다면, 저처럼 이 사건을 통해서 스스로 뭔가를 건져 올리시지 않을까. 12. 12라고 검색하며, 뜨는 한 장의 그 사진으로 돌아와서 관객들도 이제 흥미가 있다면 그 사진을 통해서 그 역사로 들어가서 보시면,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 있었고, 그런데 이런 일은 그때만 있는 게 아니라 또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말해 주고 싶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어떻게 보면 빈곤한 상상력을 가진 김성수라는 감독의 해석이 들어간 이야기지만, 제가 평생 품었던 수수께끼, 의구심이 지금의 젊은 관객들의 호기심으로 이어져 서로 접점이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이 이 영화를 연출한 감독으로서 저의 포부죠.

 

김성수 감독 (제공=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김성수 감독 (제공=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이화정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