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년 만에 <매드맥스> 시리즈가 돌아온다. 오는 5월 22일 개봉하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전작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프리퀄로 퓨리오사의 어린 시절부터 시타델의 근위대장이 되기까지의 시기를 다룬다. 때는 문명 붕괴 45년 후, 황폐해진 세상에 무참히 던져진 퓨리오사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인생 전부를 걸고 떠난다. 영화는 15년 이상에 걸친 시간을 파트를 나눈 분절된 구성으로 보여준다. 먼저 살펴본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의 후기를 공유한다.

문명 붕괴 45년 후, 과거 인류의 해악이 닿지 않는 도달불능점이었던 남극의 작은 땅만이 풍요의 땅으로 남아 있다. 바깥 황무지에서는 생존을 위해 서로가 죽고 죽이는 살육이 벌어지지만, 풍요의 땅에 사는 모계 부족 부발리니는 함께 연대하며 평화롭게 공존한다. 어린 퓨리오사는 안전한 지대를 벗어난 곳에서 디멘투스(크리스 헴스워스) 일당에게 붙잡힌다. 디멘투스는 신체 훼손과 고문을 즐기는 잔혹한 악한으로 황무지를 누비는 바이커 군단을 이끈다. 딸의 구조 신호를 들은 퓨리오사의 엄마는 퓨리오사를 구해내려다 죽임을 당한다. 엄마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퓨리오사는 인생 전부를 건 복수를 시작한다.
인류의 손이 닿지 않는 도달 불능점

조지 밀러 감독의 <매드맥스> 시리즈는 SF 작가 할란 엘리슨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 「소년과 개」의 설정을 계승한다. 핵전쟁 이후 황무지로 변한 세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갱단과 같은 무리를 이루고, 생존을 위해서 온갖 잔인한 만행을 일삼는다는 「소년과 개」의 설정은 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매드맥스> 시리즈도 그중 하나다. 할란 엘리슨은 인종과 젠더에 관한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었지만, 그의 작품은 당대를 정조준하고 시대의 어둠에 비판의 칼날을 들이댔다. 「소년과 개」는 베트남 전쟁으로 말미암은 미국 사회의 불안을 투영했고, 그 시대를 목도한 작가가 그린 희망 없는 세계이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이하 <분노의 도로>)도 4세대 페미니즘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당대를 잘 반영한다. 2015년에 돌아온 영화는 여전히 카체이싱 시퀀스를 선보이면서 시리즈의 명맥을 이어받고, 여기에 시대정신마저 구현한다. 풍요의 땅에 당도해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던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는 맥스(톰 하디)와 부발리니와 함께 임모탄 조를 죽이고 착취 받던 여성들을 구해낸다. 인류세 시대에 돌아온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이하 <퓨리오사>)는 인류사의 과오를 훑는 거대 서사로 돌아온다. 영화는 인간의 이기심과 무분별한 전쟁으로 황폐화된 자연의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도달 불능점이 풍요의 땅으로 설정된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인류의 손이 미처 닿지 않은 극지이기 때문이다. 조지 밀러 감독은 도달 불능점을 영화의 첫 파트 제목으로 정하며 중요한 주제임을 부각한다. 다만 그의 황무지는 할란 엘리슨의 희망 없는 땅과는 다르다. 약자가 연대해 희망을 되찾는 장소다.
아드레날린이 희미해진 카체이싱 액션

<퓨리오사>는 인류의 이기심으로 얼룩진 수많은 전쟁을 스크린에 소환하며 거대 서사로 거듭난다. <퓨리오사>에서 처음 등장하는 역사가 캐릭터의 나레이션처럼 ‘전쟁은 언제나 있어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역사가는 이미 역사 속에서 인류가 벌여 온 온갖 극악무도한 행위를 들여다보듯이 디멘투스의 잔혹한 만행을 한발 물러서서 지켜본다. 역사가는 역사 그 자체의 메타포로도, 인류사를 보는 감독의 시선을 은유하는 캐릭터로 존재한다. 전차를 몰고 다니는 디멘투스는 인간을 폭력적인 유희를 즐길 수단으로 전락시킨 로마 시대를 캐릭터화한 듯하다. 그는 어린 퓨리오사로 하여금 엄마의 죽음을 바라보게 하고, 바이크 5대에 인간을 묶어두고 찢어 죽이는 등 인간의 육체적 고통을 전시하고 즐기는 로마의 폭군과 같다.

또 인류의 과오를 훑는다는 측면에서 <퓨리오사>는 오히려 <분노의 도로>보다 오랫동안 차별당하며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난 흑인의 이야기를 그린 <3000년의 기다림>과 더 닮아 있다. 결국 조지 밀러 감독의 거대 서사를 아우르려는 욕망은 기존의 <매드맥스> 시리즈가 우리에게 선사해 온 액션영화로서의 쾌감을 줄어들게 한다. 질주하는 카체이싱씬에서 느낄 수 있었던 순도 높은 아드레날린은 이제 희미해져 버렸다.

액션이 관객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타격감과 폭발력 등 감각에 호소하는 것에 앞서 인물의 행동 동기에 설득되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인물에게 감정 이입을 하게 되면 그 인물이 벌이는 액션에 긴장감이 따라붙으면서 쾌감으로 이어진다. <분노의 도로>는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가 여성들을 구해내는 대의에 대해 충분히 납득시킨다. 퓨리오사가 여성들을 이끌고 시타델에서 탈출하려는 목적은 그녀의 대사로써 드러난다. 임모탄 조의 성 착취 대상으로 있던 여성들을 구해내고, 폭군의 지배 아래에서 사람들을 구해내려는 그녀의 목적은 충분히 설득된다. 하지만 <퓨리오사>는 퓨리오사(안야 테일러 조이)의 복수를 개인적 차원에서만 머무르게 하고, 대의로 연결하지는 못한다. 무엇보다 퓨리오사가 거의 말을 하지 않는 설정은 그녀의 심리를 더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녀의 목적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도 뒷받침되지 않는다. 퓨리오사가 디멘투스를 처단하고, 디멘투스의 몸을 토양과 양분으로 삼아 그의 몸에서 나무를 키우는 결말은 개인적 복수와 에코 페미니즘의 단순한 접합에 불과하다. 풍요의 땅을 보여주는 영화의 첫 시퀀스를 통해 퓨리오사가 부발리니의 정신을 기억하고,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선택, 그리고 그로 인한 결말이라고 짐작할 수는 있지만, 줄곧 디멘투스를 향한 사적 복수에만 치중한 인물의 행동 궤적을 고려하면 다소 의아한 결말이다.
거장 감독의 자기반성적 영화

<퓨리오사>는 최근 노장 감독들이 내놓은 자기반성적인 영화의 연장선상에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지브리의 메타포로 존재하는 돌탑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여전히 갈등과 혐오로 가득한 현재와 별반 다르지 않을 미래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묻는다. 또 마틴 스콜세지 감독도 <플라워 킬링 문>으로 갱스터들의 세계에 탐닉해 미국의 폭력적인 역사를 스크린에 재현했던 과거 자신의 영화들을 스스로 청산하고 반성적인 태도를 보인다. <플라워 킬링 문>은 미국을 대표하는 장르인 서부극을 해체하고 새로이 써냈다. 영화는 야만적인 적으로 주로 그려지던 아메리카 원주민의 문화와 삶을 섬세히 그려내고, 석유에 눈이 멀어 원주민을 하나둘씩 죽이는 백인의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조지 밀러 감독은 <퓨리오사>에서 디멘투스 캐릭터를 통해 자기반성을 드러낸다. 디멘투스도 퓨리오사처럼 야만적인 세상에 의해 가족을 잃은 슬픔을 지니고 있다. 그는 정상적인 애도를 하지 못한 채 죽은 자식의 것이었던 곰인형을 항상 들고 다니고,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끊임없이 타인의 고통을 즐기며 자극을 추구한다. 심지어 타인의 죽음을 보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하지만 디멘투스는 퓨리오사의 탈출을 돕다가 붙잡힌 근위대장 잭(톰 버크)을 고문할 때는 더 이상 자극을 느끼지 못한다. 영화 초반에 바이크족을 이끌며 폭발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디멘투스는 이제는 무수한 반복으로 인해 잔혹한 행위를 하면서도 권태를 느낀다. 권태 속에서 디멘투스는 인간이 지녀야 할 도덕과 죄의식, 양심을 상실한다.
퓨리오사는 끝없이 자극과 잔혹함을 추구하는 중독자 디멘투스를 처벌한다. 디멘투스의 이 같은 모습은 도파민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감독은 디멘투스를 처단하면서 현대인들에게도 도파민을 끊으라고 말하는 듯하다. <퓨리오사>는 전작처럼 아드레날린과 도파민이 분출하는 액션 영화를 기대하고 온 관객에게는 다소 당혹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퓨리오사>는 아드레날린의 결정체였던 <매드맥스> 시리즈를 만들어낸 노장 감독 조지 밀러가 한층 더 성숙한 시선을 담아낸 황무지 서사로 거듭나는 데 성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