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능력과 한계를 아득히 초월하는 절대적인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 그럼에도 인간들이 써 내려간 실제 역사를 토대로 한 이야기. 신화(神話)는 고대 문명이 태동하기 이전부터 전해 내려온, 말 그대로 '신'들에 대한 이야기다.
과학적 사고가 발전하기 이전 고대인들에게 신화적 발상, 즉 절대적인 존재인 신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해 도움을 주었으며 소위 '신의 가호'를 입어 영웅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들은 우리가 지금 받아들이는 관점과는 꽤 차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신화는 현대인에게 판타지인 동시에 가공된 역사서의 일부일 수 있겠으나 고대인에게는 사실 그대로의 역사였을지도 모른다.
이런 신화들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하고, 수많은 창작물에서 다채로운 방식으로 활용되어 왔다.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캐릭터가 신화 속 신들에게서 모티브를 따 온 다양한 사례들이 있고, 그들 중 대표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차용한 것이 바로 히어로 코믹스다. 마블 코믹스와 DC 코믹스는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히어로와 빌런 캐릭터를 구성함에 있어서 그리스 로마 신화와 북유럽 신화, 이집트 신화 등 다양한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과 그 이야기를 따오고 있는데, 제우스나 아레스처럼 잘 알려진 신의 경우 이름 그대로 등장하는 경우도 많다.
아스가르드의 신들, MCU의 '토르' 시리즈
게르만족의 북유럽 신화는 비단 히어로 무비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서브컬처 콘텐츠에 전방위로 영향을 준 신화인데, 가장 대표적인 신은 뭐니 뭐니 해도 '토르'다. 바이킹 문화를 토대로 하고 있기에 토르의 초창기 모습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바이킹의 복장을 모티브로 하고 있기도 하며, 영화 <토르> 시리즈에 등장하는 지역명과 그의 아버지 오딘, 형제 로키 등 거의 모든 요소들이 북유럽 신화의 영향을 받았다.
먼저 오딘의 왕국이 존재하는 아스가르드, 서리 거인들이 살고 있는 요툰하임, 헬라가 추방당했던 헬(헬하임), 지구를 의미하는 명칭인 미스가르드 등 모든 요소들이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명칭들이다.
오딘과 프리가가 부부 사이이고, 토르가 아들인 것까지도 동일하지만 로키와의 관계는 약간 다른 부분이 있다. 로키가 서리 거인 라우페이의 아들이고 토르와는 친구 사이라는 점이다. 신화의 특성상 일정한 설정을 따르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전승이 있기는 하나 대부분 오딘의 아들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또한 MCU에서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한 '헬라'와 그가 타고 다니는 늑대 '펜리르'가 로키의 자녀라는 점도 원전과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토르의 호탕하고 인간적이며 친근한 모습은 신화 속 토르와 흡사하며,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거짓말쟁이이자 장난을 좋아하는 점은 북유럽 신화 속에서도 입체적이고 선악 구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예측 불가능한 로키의 특징과 닮아 있다.
더불어 토르의 아내는 시프였는데, <토르> 시리즈 앞편에서 제인 포스터 이전에 워리어즈 쓰리와 함께 토르를 도우며 미묘한 관계였던 것으로 보이나... 토르가 미드가르드, 즉 지구로 추방당한 후 제인을 만나고 나서는 전혀 연계성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시리즈의 2편 <토르: 다크 월드>에서 오딘이 헛물켜지 말라는 식의 말을 하는 걸 봐서는 시프 쪽에는 꽤 마음이 있었던 듯한데... 원전 반영이 조금은 된 부분일지도.
북유럽 신화는 앞서 말했듯 영향력이 어마어마한 문화원형인 만큼, 히어로 코믹스에서도 재해석되었을 뿐 원전의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따오고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관계나 사건 등은 많이 각색되었지만 유사한 부분이 다른 신화보다 유독 많은 경우다. 물론 원전은 좀 더 강렬하고(...) 가차없을 정도로 원색적인 이야기도 많다는 점은 주의가 필요할 듯.
역사 속에 존재했던 종족 '이터널', 신이라고 불리던 자들
당초 올해 말 개봉 예정이었으나 팬데믹 사태로 인해 개봉 일정을 늦춘 MCU의 4페이즈 무비이자, 한국 배우 마동석이 MCU에 첫 등장을 알린 바로 그 작품 <이터널스>. 이 영화는 조금 독특한 방식으로 신화를 차용하고 있다. 이는 마블 코믹스의 종족 '이터널'이 꽤 특이한 설정을 갖고 있기 때문인데.
이터널은 기본적으로는 세계관 속 현생인류와 같은 뿌리를 갖고 있지만 인간의 능력을 아득히 초월하는 존재들이다. MCU에서 디테일하게 다루어진 바는 없으나 마블 코믹스 세계관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힘 '코스믹 에너지'와 관련이 깊고, 이터널들의 신체에는 세포 곳곳에 코스믹 에너지가 들어가 있다. 이를 통해 수많은 초능력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것.
이터널들은 고대인들에게 선진 문물을 전파했는데, 학문은 물론이고 문명을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농사 기술 등 인간들이 더 나은 삶을 향유할 수 있는 많은 지식들을 알려준 존재였다. 더불어 인간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는 그들을 도와 위험을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을 사용하기도 했기에 고대인들은 자신들보다 강력하고 현명한 이터널들을 신으로 추앙하게 된 것.
이들 중 마동석이 배역을 맡아 화제가 된 '길가메시'는 가장 강력한 신체능력을 가진 이터널로 '포가튼 원'이란 이름으로 수많은 전투에서 인간을 도와 싸웠다. 인간들은 그를 헤라클레스, 베오울프, 삼손 등의 이름으로 불렀으며 신화 속에 그의 행적이 남아 있다는 설정.
리차드 매든이 맡은 '이카리스'는 태양을 향해 날아가다 추락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 신화 속 이카루스의 아버지인 이터널이며, 로런 리들로프가 맡은 '마카리'는 스피드에 강한 이터널로서 헤르메스 혹은 머큐리, 이집트 신화 속에서는 토트로 불리기도 했던 존재다. 이외에도 아테나를 본뜬 '테나', 불과 대장장이의 신인 헤파이스토스를 따온 '파스토스'도 있다.
모티브를 차용한 형태인 여타의 히어로들에 비하면 이터널스의 경우에는 신화가 형성되던 시기부터 고대인들에게 추앙받던 존재로서 신화 속 이야기들의 산증인인 셈이다. 현실과 가공의 이야기가 뒤섞인 신화의 특징을 가장 잘 반영하는 종족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신의 가호로 태어난 히어로, '원더 우먼'
여전사들의 성지 아마존과 그들이 사는 섬 데미스키라의 원전은 그리스 신화다. 아마존을 만든 신이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였고, 원더 우먼의 아치 에너미인 아레스가 헤라클레스를 이용해 아마존을 공격한다는 코믹스 설정 역시 원전에서 모티브를 따오고 있다. 원전에서는 헤라클레스가 델포이의 신탁을 받아 12년간 12가지 과제를 수행하게 되고 그중 하나가 아마조네스의 여왕인 히폴리테의 허리띠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원더우먼, 즉 데미스키라의 다이애나 공주는 아마조네스의 여왕 히폴리타(원전에서는 히폴리테)의 딸로 태어났는데 여성만 존재하는 섬의 특성상 출산을 거쳐 태어난 것이 아닌, 신의 가호를 입어 태어났다. 덕분에 능력은 물론이고 사용하는 장비부터 인간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신급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리런치인 뉴 52 이후에는 제우스와 히폴리타 사이에서 낳은 딸, 즉 '반신'으로 설정이 바뀌었지만, 올림푸스의 수장인 제우스의 딸이기에 여전히 신성한 혈통이다.
그리스 신화 속 유명한 신들인 헤스티아,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아테나 등으로부터 스피드와 두뇌, 아름다움, 성정 등 좋은 요소는 다 물려받았으며 장비 역시 그렇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테나의 방패인 이지스의 방패(통칭 아이기스), 진실의 올가미, 갑옷, 트레이드 마크인 티아라까지 모두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것이며 신들이 사용하기도 했던 물건들이다.
영화 속 원더우먼도 저스티스 리그에서 활약하며, 리런치 이후의 설정인 제우스와 히폴리타의 딸이라는 부분을 그대로 따왔다. 코믹스에서는 로이스 레인을 제치고 슈퍼맨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으나 영화에서는 스티브 트레버와 연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추후 개봉될 <원더 우먼 1984>에서 스티브 트레버의 귀환이 확정됨에 따라 다시 연인 관계인 두 사람을 볼 수 있을 듯하다.
전반적으로 저스티스 리그를 위시한 DC 영화들이 평판이 안 좋은 와중에도 원더 우먼의 캐릭터와 역할은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솔로 영화에서 선보인 순진무구한 여전사의 모습 역시 호평을 받은 캐릭터였다. 누구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설정상 슈퍼맨만큼은 아닌 듯하지만) 인간적인 따뜻함을 지닌 캐릭터라는 점도 매력 포인트였다.
여섯 신의 축복을 받은 10대 소년, '샤잠'
마블의 여성 히어로 쪽에 이름을 빼앗긴(….), 원래는 캡틴 마블이었던 이 히어로 '샤잠' 역시 신화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이름부터가 그리스 신화와 성경에 등장하는 신화적 존재들(솔로몬, 헤라클레스, 아틀라스, 제우스, 아킬레우스, 머큐리)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것이며 이 이름은 변신 주문으로도 사용된다.
다크사이드 이후에는 그리스 신화 속 인물들에서 DC 코믹스의 고유 캐릭터들로부터 힘을 얻은 것으로 설정이 변화하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신화적 요소들을 갖고 있었다. 더불어 아치 에너미 닥터 시바나는 인간의 7대 죄악을 해방시키기도 했으니 신화보다는 성경적인 유래가 더 크다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위탁가정을 전전하면서 힘겹게 살아가는 빌리 뱃슨은 새로 입양된 가정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호의를 거부하기만 했지만, 어느 날 '서클 오브 이터니티'의 생존자인 마법사 샤잠으로부터 선택을 받아 힘을 얻게 된다. 마법사 샤잠은 블랙 아담에게 맞설 순수한 인물을 찾고 있었고 빌리가 그 조건을 만족시킨 셈이었다. 이후 몇 번의 갈등을 거쳐 샤잠의 힘을 새로운 가족들에게 나누어 주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장을 하게 된다.
영화에서는 좀 더 대중적인 기원인 그리스 신화 쪽을 채택하고 있으며, 닥터 시바나와 싸움을 벌이고 가족들에게 힘을 나누어주면서 새로운 가족을 받아들이는 성장 스토리를 그렸다.
히어로 코믹스와 히어로 무비는 현대의 대중들에게 꽤나 흥미로운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아이언맨>이 처음 개봉했을 때부터가 거대한 세계관을 토대로 한 히어로 무비 프랜차이즈의 부흥기라고는 하지만, 이전부터 코믹스 원작의 영화화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고 <다크 나이트> 시리즈를 비롯해 <슈퍼맨> 등이 초유의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어쩌면 초월적 존재, 즉 영웅 혹은 히어로에 대한 선망, 그리고 그들의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이야기들은 팍팍한 삶을 구가하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반복되는 일상과 현실의 괴로움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좋은 오락거리일지도 모른다. 현실성이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강력한 존재가 나타나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물론 그들이 해결해 줄 문제는 좀 더 스케일이 방대하지만-생각을 누구나 한 번쯤은 해 보았을 테니까.
고대인에게 신화가 좀 더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였다면, 현대인에게 신화와 히어로 스토리는 비현실적이고 가공의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판타지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대중을 매료시키는 이유는, 그 속에 여전히, 신화가 고대인에게 그러했듯이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고민과 고뇌의 과정이 녹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PNN 에디터 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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