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니 마라와 케이트 블란쳇 주연, 토드 헤인즈 연출의 로맨스 <캐롤>(2015)을 다시 극장에서 만날 수 있게 됐다. <문라이트>(2016),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과 함께 한국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은 퀴어 로맨스라 개봉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재개봉을 반기는 분위기가 뜨겁다. <캐롤>에 사용된 음악들을 소개한다.
YOU BELONG TO ME
HELEN FOSTER & THE ROVERS
1952년 크리스마스 즈음의 뉴욕, 사진가를 꿈꾸는 백화점 직원 테레즈(루니 마라)는 딸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온 캐롤(케이트 블란쳇)에게 첫눈에 반한다. 캐롤이 두고 간 장갑을 돌려준 걸 계기로 마주 앉아 시간을 보낸 두 사람은 서로에게 큰 호감을 느끼고, 캐롤은 테레즈를 외곽의 자기 집에 초대한다. 앰비언트가 잔뜩 낀 오리지널 스코어 'To Carol's'가 흐르는 가운데, 테레즈는 캐롤이 모는 차를 타고 그의 집으로 향한다. 초반 30분 동안 테레즈의 표정 없는 얼굴만 봐왔는데, 캐롤의 옆에 앉은 테레즈의 얼굴엔 기분 좋은 설렘이 가득해 보인다.
터널에 들어서자 캐롤은 음악을 튼다. 50년대 초반에 활동했지만 정규 앨범 하나 남기지 못했던 블루스 싱어 헬렌 포스터(Helen Foster)와 두왑 밴드 로버스(The Rovers)의 'You Belong to Me'다. 관계가 서서히 무르익는 와중에 트는 '당신은 나의 것'이라는 제목의 노래라니. <캐롤>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진가 사울 라이터(Saul Leiter)의 작품처럼 희뿌옇게 담은 풍경과 그에 걸맞게 원곡의 형체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앰비언트를 가해진 채 차 안에 울린다. 낯선 시공간에 들어온 듯한 이미지와 사운드 구성으로 테레즈와 캐롤의 사랑이 전혀 새로운 세계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연출이다. 'You Belong to Me'는 1952년 작곡돼 조니 제임스(Joni James)의 노래로 처음 발표됏고, <캐롤> 곳곳에 짤막하게 쓰인 노래들의 주인공인 조 스태포드(Jo Stafford), 패티 페이지(Patti Page)도 이를 커버한 바 있다.
EASY LIVING
BILLIE HOLIDAY
캐롤이 기차 세트를 포장하는 사이, 테레즈는 피아노를 연주한다. 캐롤의 물음. "아까 트리 살 때 나 찍은 거예요?" "죄송해요. 물어봤어야 했는데."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친구가 사람에게도 흥미를 가져보라고 해서요." "그래서 잘 되고 있어요?" "아주 잘 되고 있어요." 연주는 이어진다. 꽤나 쾌활하게 들리는 선율. 실수가 많은 어설픈 연주지만 캐롤은 "아름다운 곡이네요" 하며 (손을 스윽 제 옷에 훔치고는) 테레즈의 어깨를 쓰다듬는다. 아주 잠시 연주가 멈추는 순간에 퍼지는 관능적인 무드. 그리고 테레즈가 좋아하는 사진에 대한 대화가 이어진다. 찍은 사진 대부분을 싱크대 아래 쌓아두고 있다는 말에 "한번 초대해요"라고 대답하는 캐롤의 말도 참 달콤하다.
테레즈가 연주한 곡은 불세출의 재즈 보컬리스트 빌리 할리데이(Billie Holiday)의 'Easy Living'. 피아니스트 테디 윌슨(Teddy Wilson)과 그의 밴드의 연주에 20대 초반의 빌리 할리데이가 노래를 보탠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1935년과 1937년 녹음된 음원을 담은 앨범 1941년 처음 발매된 이후, 이후 여러 차례 다양한 이름과 커버로 재발매된 바 있다. 'Easy Living'을 마음에 들어한 걸 기억한 테레즈는 캐롤과 여행을 떠났을 때 그 곡이 담긴 음반을 선물한다. (테레즈가 준 버전은 1949년에 나온 것이다.) 각방을 쓰다가 테레즈의 제안으로 스위트룸 하나에 묵게 된 첫날, 캐롤과 테레즈는 함께 화장품과 향수를 가지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 'Easy Living'를 듣고 또 듣는다. 캐롤이 자기 향을 맡아보라며 목을 열고 테레즈도 바로 가까이 가지만, 오묘한 분위기에 잠깐 어색해지기도 한다. 테레즈는 밤새 건너편 침대에 잠들어 있는 캐롤을 지켜본다.
SMOKE RINGS
LES PAUL & MARY FORD
(다시 시간을 앞으로 돌려) 이번엔 캐롤이 테레즈의 집에 찾아온다. 남편 나지(카일 챈들러)가 단독 양육권을 신청했다는 사실을 알게 돼 실의에 빠진 날이다. 새 카메라 세트를 선물한 캐롤은 집 벽에 붙은 테레즈의 사진들을 본다. 자기가 찍힌 사진을 가만히 보던 캐롤은 "완벽해요"라고 말한다. 테레즈의 어린 시절을 보고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캐롤은 소파에 걸터앉아 눈물을 흘린다. 아마 딸 린디를 떠올렸으리라. 지금까지는 캐롤이 테레즈를 드문드문 터치했지만, 테레즈가 울고 있는 캐롤의 어깨를 쓰다듬는다. 그리고 캐롤이 그 손을 맞잡는다. 방 안에서 자그맣게 틀어놓은 음악은 레스 폴(Les Paul)과 메리 포드(Mary Ford)의 'Smoke Rings'다. 기타리스트 레스 폴과 노래하는 메리 포드로 이뤄진 부부 듀오는 보컬과 기타 연주의 음량 밸런스를 독특하게 설정한 시그니처 사운드로 50년대 초중반 큰 인기를 누렸다.
ONE MINT JULEP
THE CLOVERS
테레즈와 캐롤의 서부 여행은 아주 평화롭게 흘러간다. 통통 튀는 피아노 소리로 시작해 5인조 보컬의 흥겨운 하모니가 이어지는 클로버스(The Clovers)의 'One Mint Julep'이 딱 들어맞는다. 이전에 소개했던 곡들과 마찬가지로 'One Mint Julep' 역시 (<캐롤>의 시간적 배경인) 1952년에 발표된 노래다. 핸들을 잡은 캐롤의 코트를 벗겨주면서 아슬아슬하게 운전하는 것도 좋다. 동부에서 서부로 가는 기나긴 여정이 즐겁기만 하다. 두 사람의 평화로운 한때를 보여주는 신이긴 하지만, 바로 전 신을 떠올려보면 이건 일종의 트릭 같은 구간이다. 테레즈와 캐롤이 한 방에서 'Easy Living'을 틀어놓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 다음 날 아침, 숙소 식당에서 두 사람은 테레즈가 얼음을 풀 때 만났던 얼뜨기 같은 외판원과 마주 앉아 시답잖은 농담을 나눴다. 시간이 지나서 알게 되지만 그 남자는 나지가 고용한 도청 전문가다. 세 사람의 대화 다음에 그나마 덜 신나는 신이 이어졌다면 아마 눈치 빠른 사람은 저 사내가 어쩐지 수상하다는 인상을 부풀렸을지도 모를 텐데, 토드 헤인즈 감독은 바로 차 안에서 여유롭게 달리는 두 여자만을 보여주면서 그 쎄한 느낌을 흩트려놓는다. 여행을 시작한 이래 모텔을 전전했던 테레즈와 캐롤은 처음으로 호텔에 묵는데, 그곳에서의 밤은 생략된다.
AULD LANG SYNE
VINCE GIORDANO & THE NIGHTHAWKS
시간이 흘러 1953년 1월 1일. 두 사람이 자리한 모텔 안 TV에선 새해를 맞이하는 멘트와 'Auld Lang Syne'의 구슬픈 멜로디가 나오고 있다. "Happy new year"를 나누며 술을 마신 뒤, 캐롤은 테레즈의 뒤로 다가가 머릿결을 어루만진다. 매해 첫 날을 홀로 보냈다고 말하던 둘, 테레즈가 "올해는 외롭지 않아요" 하며 캐롤의 손을 잡자 캐롤은 그대로 옷을 풀고 테레즈와 입을 맞춘다. 우리나라에선 졸업식 때 부르는 '석별의 정'으로 알려진 'Auld Lang Syne'은 18세기 후반 쓰여진 이래, 특히 영어권 나라에선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 지난 한해에 안녕을 고하는 노래로 애용돼왔다. <캐롤>에 사용된 'Auld Lang Syne'은 1953년 당시 방송에 나온 음악이 아닌 영화를 위해 새로 작업된 것이다. 관악기 연주자 빈스 지오다노(Vince Giordano)는 2~30년대 미국 TV에 나왔을 법한 음악들을 연주해 과거를 배경으로 한 할리우드 영화에 참여해 독특한 분위기를 더했다. <캐롤> 곳곳에서 자그맣게 들리던 재즈 연주들이 빈스 지오다노와 그의 밴드의 솜씨다.
CROSSING
CARTER BURWELL
<캐롤>의 음악감독은 카터 버웰(Carter Burwell)이다. 코엔 형제의 오랜 음악 파트너를 잘 알려진 그는 70년대 글램록 시대를 다룬 <벨벳 골드마인>(1998)의 음악을 담당해 토드 헤인즈와 연을 맺은 바 있다. 음악을 인용하더라도 화면 전면에 사용하지 않고 인물들이 자리한 공간에 흐르고 있는 정도로만 드러내는 것과 달리, 카터 버웰의 오리지널 스코어는 등장할 때마다 화면과 뒤섞여 캐롤과 테레즈의 관계를 선율로써 나타낸다. 낮게 깔리는 관악기와 그보다 높은 소리로 그 주변을 감싸는 현악기를 변주한 오리지널 스코어는 두 사람 앞을 가로막는 현실과 결국 그에 지지 않고 커져만 가는 사랑을 은유한 것 같다.
카터 버웰의 음악이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역시 라스트 신이다. 두 번의 사랑을 나누고 헤어져야만 했던 두 사람은 시간이 지나 다시 마주하지만, 반갑지도 않은 남자가 아는 척을 하는 바람에 어정쩡하게 헤어진다. 또래들과의 파티에서 겉돌기만 하던 테레즈는 캐롤이 만나자고 했던 장소로 간다. 저 멀리 캐롤이 보이지만 테레즈는 침만 삼키며 멀뚱히 서있기만 하는데 그 순간 카터 버웰의 스코어 'Crossing'이 파도처럼 화면으로 스며들고, 금세 다른 분위기의 현악 선율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면 드디어 테레즈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캐롤을 바라보는 시선과 걸음을 옮기는 테레즈를 보면, 지금까지 캐롤이 테레즈를 찾아왔지만 이제서야 처음 테레즈가 캐롤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머지않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본다. 마지막 두 쇼트에서 테레즈와 캐롤은 아주 엷은 미소를 띤다. 극장의 큰 화면으로 사랑에 빠진 두 여자의 미소를 마주하길.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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