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담시의 광태자(狂太子) 조커가 정상인이 돼 시 의원에 출마하는 것도 모자라 당선까지 된다? 거기에, 배트맨은 범죄자가 되어 다름 아닌 제임스 고든 청장에게 쫓기는 신세로 추락한다?

얼핏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나, 코믹스의 세계에서 불가능은 없다. 2019년 정식 발간된 <배트맨: 화이트 나이트(BATMAN: WHITE KNIGHT)>는 조커와 배트맨의 대외적 관계가 완전히 뒤집힌 이 상황을 그리고 있다. 이 코믹스에서 조커는 범죄자 'JOKER'가 아니라 잭 네이피어라는 이름으로 당당히 활동하며, 할리퀸과 함께 수트를 차려입고 데이트를 즐기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가 완전히 갱생했다거나, 정의로워졌나? 대답은 NO다.


DC 블랙 라벨(기존 발행물보다 폭력적이고 어두운 이야기를 다루는 라인업)의 일환으로 시작된 이 새로운 이야기는 기존의 배트맨 서사, 그리고 조커 서사와는 여러 면에서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으며, 배트맨의 딜레마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배트맨이 지금까지 받아 왔던 무수한 질문이 좀 더 억세지고 직접적인 형태로 변했을 뿐 그의 앞을 막아서는 여러 가지 질문들은 건재하다.

고담시는 배트맨이 필요한가? 배트맨이 있기 때문에 범죄자들이 모여드는 것은 아닌가? 배트맨이 범죄자들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다치거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누가 도울 수 있는가?

코믹스는 나름의 대답을 하고 있으나, 이런 질문들을 처음 대면했을 때 확실하게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고담시의 상황은 늘 좋지 않았으며 범죄자들과 수뇌부가 결탁해 있어 근본부터 썩어 있다는 것이 정설이었기 때문인데. 서사는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이야기 속 배트맨은 난관에 휩싸여 있다. 부모님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늘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의 곁에 있었던 알프레드가 생사의 고비에 놓여 있으며 배트맨은 결국 동료들을 불러 모아 도움을 요청하기까지 한다. 이런 개인적인 문제와 더불어 조커가 '잭 네이피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변호하기 시작하고, 무죄로 풀려나면서 자유롭게 활동하기 시작하자 필연적으로 그동안 고담시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며 싸워 왔던 배트맨은 대외적 난관에까지 부딪히게 된다.

늘 고담시의 파수꾼이었던 배트맨이 급기야는 고든 청장으로부터까지 외면당하기 시작하고, 이에 반해 과거의 조커이자 현재의 '잭 네이피어'는 승승장구한다. 배트맨의 추격 과정에서 다치거나 피해를 본 사람들의 틈을 건드리고, 부패한 고담시경을 고발하면서 사회적 약자였던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시작한다.

'브루스 웨인'으로서도, '배트맨'으로서도 지지기반을 잃은 배트맨은 기존의 배트맨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감정적 혼란은 물론이고 주변 인물들과도 트러블이 생기는데, 늘 그랬듯 이런 갈등을 그리 빠르게 해결하지도 못한다. 전반적으로 결말 직전까지, 배트맨은 조커와 잭 네이피어에 비해 무능해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잭 네이피어는 행복하고 유능해 보인다. 그의 곁은 이전의 '할린퀸'이 아닌, 조커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잭 네이피어라는 그의 본질을 사랑하는 할린 퀸젤이 다시금 나타나 그의 곁을 지킨다. 원래 조커의 곁에 있던 할리퀸은 그녀를 가장한 다른 사람이었고, 내면의 잭이 드러난 순간 (할린 퀸젤의 말에 따르면) 잭 네이피어라는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할리퀸이 돌아온 셈이다.


히어로 코믹스는, 현실 세계에서 오갈 데 없는 약자들의 편에 누구보다도 강력한 히어로가 서 있음에서부터 시작된다고도 할 수 있다. '히어로가 필요하다' 말하는 것은 사회에 문제가 있단 걸 인정하는 셈이니까. 물론 사람이 셋만 모여도 문제가 벌어진다고들 하지만, 범죄의 온상이 되어 버린 것 같은 고담의 슬럼가 백포트는 정도가 심각했다.

그 누구도 아닌 조커가 잭 네이피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편에 선다. 얼핏 이상하게 들리기도 한다. 오랫동안 강력범죄자로 알려져 왔던 그가 화장을 지우고, 수트를 차려입고, 머리를 염색하지 않은 채 사람들 앞에 선다고 그렇게 쉽게 그의 말에 찬동해 줄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하지만 다르게 해석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그들의 처지가 어려웠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실제로 백포트의 리더격인 듀크는 잭 네이피어를 대면했을 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그는 물론이고 배트맨의 편에 서서 고담시경을 이끌었던 제임스 고든조차 잭 네이피어가 제시한 GTO(고담 테러 진압반: Gotham Terror Opperession)이 효율적이라고 말하며 배트맨의 사이드킥들조차 이에 동참한다. 할린 퀸젤 대신 조커의 곁에서 할리퀸 행세를 하고 있던 2대가 '네오 조커'라는 이름으로 조커의 귀환을 종용하는 상황에서, 잭 네이피어는 다시금 자기 안에 존재하는 조커의 자아와 싸우기 시작한다.


<배트맨: 화이트 나이트>가 배트맨과 조커의 오랜 서사에, 그리고 조커 개인의 서사에 새로운 기원을 제시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기원이라기보다는 '혼돈 악'의 결정체였던 조커의 내면에 잭 네이피어라는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본질이 있으며 이 자아는 심지어 정의롭기까지 하다는 어떤 이중적인 해석을 제시한 것에 가깝다.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2019)>가 아서 플렉이라는, 기존의 조커 기원을 좀 더 디테일하고 위험한 방식으로 풀어 가면서 조커의 본질이 무엇인지, 혹은 그가 앓고 있는 정신병이 무엇인지 등등 조커라는 캐릭터 자체에 대한 관심은 다시금 높아졌던 바 있다. 그는 어떻게 조커가 되었는가? 왜 그는 조커여야 하는가? 갱생 가능성이 있나?

하지만 '기원이 없는 것이 조커의 기원'이라고들 한다. 배트맨의 아치 에너미로서, 또는 고담시를 장악한 강력한 슈퍼빌런으로서 조커는 인간 본질의 혼돈에 대해 폭력적인 방식으로 긍정을 요구한다. 이런 조커에게 '얘도 사실 이런 사정이 있었다'가 필요할까.

실제로 <배트맨: 화이트 나이트>는 이런 측면에서 평가가 다소 갈리는 편이다. 조커와 배트맨의 복잡한 관계를 애증으로 해석하고 조커와 잭 네이피어 두 사람을 모두 알고 있는 존재 할린 퀸젤이 이를 역이용하는 서사는 어떤 관계성의 재해석으로서 흥미로운 지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끝에는 조커가 결국 자신이 범죄자라는 사실에 도덕적으로 순응한다는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캐릭터의 정체성을 되찾으며, 배트맨 역시 히어로스러운 방식으로 합의를 이끌어낸다. 하지만 여기에 도달하기까지의 서사가 모두에게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만큼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조커와 배트맨의 오랜 관계성보다는, 할리퀸과 조커의 지독한 애정전선과 그 운명적이기까지 한 관계성에 집중해 서사를 따라갈 수 있다면 꽤 흥미로운 이야기다.

2019년의 <조커>가 그러했듯이, 그리고 수십 년간 이어져 온 히어로 코믹스가 그러했듯이 캐릭터의 다양한 해석과 다채로운 서사는 늘 이 장르가 지향해 온 방향성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릭터의 정체성과 근본은 흔들릴 수 없고 흔들리지 않아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완전히 별개의 서사일 뿐 캐릭터를 구성하는 깊이 있는 해석의 일부로 작용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프리랜서 에디터 희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