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 피셔 1954 - 2016
우리가 미처 몰랐던
캐리 피셔 & 데비 레이놀즈

<스타워즈> 시리즈의 히로인이자 레아 공주로 오랜만에 복귀한 캐리 피셔가 작년 12월 27일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가 들려왔다. 국내에서 <로그원: 스타워즈 스토리>가 첫 상영됐던 즈음이었다. 영화의 말미에 에피소드 4편인 <새로운 희망>과 직접적으로 이어지며 젊은 레아 공주가 등장했던 터라 그 안타까움은 더욱 배가 되었다. 캐리 피셔는 12월 23일, 영국에서 미국 LA로 향하던 비행기에서 고관절 수술의 후유증으로 보이는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병원으로 옮겨져 중환자실에서 치료받던 상황이었다. 경과가 나아졌다는 가족의 발표도 있었지만 그 바람이 무색하게 나흘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녀의 나이 환갑이었다.

에디 피셔(좌)와 데비 레이놀즈(중), 그리고 캐리 피셔(우)

유명 가수 에디 피셔와 전설적인 배우 데비 레이놀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21살에 출연한 <스타워즈> 시리즈와 그 후속 시리즈들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지만, 이후 굴곡진 삶을 살았다. 댄 에이크로드와 약혼한 적도 있고, '사이언 앤 가펑클'의 폴 사이먼과 짦은 결혼 생활을 했으며,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대스타인 어머니의 그늘에 가려 컴플렉스와 우울증을 겪기도 했다. 배우로서 경력도 그리 좋지 못한 편이었다.

그러나 지독한 독서광에 탁월한 글 솜씨로 인해 여러 편의 소설을 써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크레딧에 오르진 않았지만 수많은 영화에서 스크립트 닥터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번에 디즈니에서 제작되는 새로운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공주가 아닌, 장군으로서 포스를 드러내며 경력을 이어갈 것으로 예측되던 터라 충격이 크다.

사이 좋은 모녀의 젊은 시절
캐리 피셔의 최근 모습

더욱 슬픈 소식은 바로 다음날인 28일 들려왔는데, 그녀의 엄마인 데비 레이놀즈까지 뇌졸중으로 쓰러져 유명을 달리했다는 것이다. 데비 레이놀즈는 1950-60년대 할리우드 뮤지컬의 황금기에 은막을 수놓았던 전설적인 여배우였다. 19세에 출연한 <사랑은 비를 타고>를 발판으로 귀엽고 사랑스런 외모와 발랄하며 싱그러운 활력에, 출중한 노래, 춤 실력을 갖춰 수많은 뮤지컬과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에 등장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인기 최절정의 가수 겸 배우 에디 피셔와 결혼했지만 절친이었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빼앗기며 스캔들의 희생자(?)가 되기도 했다. 영화뿐만 아니라 TV로 진출해 여전히 인기를 누렸으며 애니메이션 성우로도 많은 활약을 했다.
 
딸의 죽음 뒤에 데비 레이놀즈는 가족들과 장례 절차를 논의하던 중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딸의 뒤를 이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평소 지병으로 뇌졸중을 앓아온 것으로 알려졌으며, 자식을 잃은 큰 충격으로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뒤따라간 것으로 보여 더욱 영화 팬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캐리 피셔가 우울증을 앓았을 당시 말도 안하고 살았던 적도 있다고 하지만, 세월이 흐른 뒤 바로 옆집에 살 만큼 살뜰히 서로를 챙겼던 모녀지간이었기에 연말에 연이어 들려온 이 비보는 충격적인 뉴스였다.

배우로서 전성기 때나 나이가 들어서도 전설적이고 인상적인 행보를 보였던 엄마 데비와 달리 캐리의 필모는 안정적이지 못하고 만년 조연에 그치고 말았지만, 미국 블록버스터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고 최고의 시리즈로 자리매김한 <스타워즈>란 세계관 안의 공주였다는 영향력 때문에 불멸의 생명력을 얻게 되었다. 그녀 자신은 이를 버거워하고 증오하기도 했지만, 결국 다시 돌아온 스타워즈 안에서 안식과 휴식을 얻게 되었으니 아이러니하면서도 운명적이란 생각을 해본다. 두 모녀가 출연했던 대표적인 영화들의 음악을 다시 꺼내 보며 추억을 되새겨보고자 한다.


그녀들과 영화음악

<스타워즈>
캐리 피셔의 필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은 당연하게도 <스타워즈> 시리즈로, 한곡 한곡이 모두 주옥같지만 그 중에서도 ‘레아 공주의 테마’는 스타워즈 클래식 시리즈를 관통하는 러브 테마이자 무엇보다 그녀 자신을 위한 곡이기도 하다. 현존하는 최고의 영화음악가 존 윌리엄스가 작곡한 이 아름답고 서정적인 테마는 호른이 깊고도 묵직한 독주로 포문을 열고, 오보에와 플롯 등 목관부가 부드럽게 연이어 주제부를 이어가며 별들의 전쟁 사가에 있어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울림을 풍성하게 전달해준다. 이후 시리즈 내내 <제국의 역습>에선 ‘한 솔로와 더 프린세스’로, <제다이의 귀환>에서는 ‘루크와 레아’란 큐들로 변주되며 세 인물들의 관계를 정립하고 더 깊고 서정적인 지점을 부여한다. 그녀에게 영원한 불멸을 부여한 전설적인 테마.


<한나와 그 자매들>
우디 앨런의 세 번째 오스카 수상작이자 뛰어난 가족 드라마였던 이 영화에서 캐리 피셔는 비록 비중은 많지 않지만 둘째인 홀리의 동료로 모습을 비추며 쟁쟁한 배우들 사이에서 좋은 앙상블 연기를 펼쳐 보인다. 여타의 우디 앨런 영화들처럼 전설적인 재즈들과 클래식이 아름답게 수놓으며 이 막장극(?)을 품격 있게 감싸는데, 무엇보다 앨런의 음악적 파트너인 딕 하이먼의 경쾌하면서도 위트 넘치는 랙타임 스타일의 피아노 연주가 자매들과 그 주변에 엉망진창 실타래처럼 꼬인 관계들과 감정들을 위로하고 치유한다. 리처드 로저스와 콜 포터의 노래들과 바흐의 하프시코드 협주곡, 그리고 카운트 베이시의 스윙과 해리 제임스의 빅밴드는 덤. 그녀의 출연만큼 인지하기 어렵지만 빠져서는 섭섭할 사운드트랙.


<유령마을>
과거 호러들과 B급 영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조 단테의 이 숨겨진 수작 코미디에서도 캐리 피셔는 톰 행크스와 브루스 던, 릭 덕코만과 코리 필드만 등과 함께 좋은 연기를 보인다. 이 시기 그녀는 전성기의 나이였지만 이미 조연으로 밀린 듯한 배역들을 맡아 아쉬움을 짙게 남긴다. 조 단테의 단짝이라 할 수 있는 제리 골드스미스의 재기발랄한 사운드를 유감없이 들을 수 있는 영화 중 하나로,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 아래 감춰진 호러적인 분위기와 코믹함 그리고 전쟁물까지 다양한 장르들의 스타일을 패러디하고 컨벤션 등을 맘껏 활용하며 대가의 솜씨를 유감없이 만천하에 드러낸 걸작 사운드트랙이다. 아름답고 오싹하며 위트 넘치는 복합적인 사운드가 귀를 사로잡는 향찬.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주연인 ‘해리’ 빌리 크리스탈과 ‘샐리’ 멕 라이언만큼이나 그들 옆에서 존재감을 선사하던 친구들 브루노 커비와 캐리 피셔 역시 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다. 샐리의 아픔을 이해해주고 같이 고민하며 촌철살인 충고를 던져주던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베프의 정석이었다. 아름답고 유려한 곡들로 가득 채워진 이 사운드트랙 역시 OST의 정석이다. 로브 라이너 감독의 음악적 짝패 마크 샤이먼의 스코어도 따스하고 부드러웠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건 해리 코닉 주니어가 부르는 감미로운 재즈 백넘버들이다. ‘로맨틱’이란 단어에 가장 적합한 그의 달콤한 목소리와 풍성한 빅밴드 사운드, 유쾌한 피아노가 어우러져 남녀 간의 우정과 오해 그리고 사랑을 확인해가는 과정은 영원한 사운드트랙의 고전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사랑은 비를 타고>
딸 캐리에게 <스타워즈> 시리즈가 있다면 엄마 데비에겐 <사랑은 비를 타고>를 빼놓곤 얘기할 수 없다. 진 켈리와 도널드 오코넬과 함께 한 이 영화는 불멸의 뮤지컬이 되었고, 데비 레이놀즈는 주디 갈랜드의 뒤를 잇는 뮤지컬 스타가 되었다. 전설이 된 작품이지만 사실 이 영화의 거의 대부분 노래들은 1929-30년 사이 MGM에서 제작된 많은 뮤지컬 곡들을 재활용한 것이다. 제작자 아서 프리드의 주도 하에 나시오 허브 브라운이 만든 곡들을 바탕으로 시나리오 작가 베티 콤덴과 아돌프 그린이 무성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던 시기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영화 타이틀이기도 한 ‘싱잉 인 더 레인’은 <할리우드 리뷰 오브 1929>에서, ‘굿모닝’은 <베이비 인 암스>에서, ‘그들을 웃겨봐’는 <해적>에 쓰인 곡들이지만 원래 영화들보다 본편으로 더 널리 기억되게 되었다.


<서부개척사>
존 포드와 헨리 헤서웨이, 조지 마샬 세 명의 감독이 매만지고, 제임스 스튜어트와 칼 말든, 그레고리 펙, 헨리 폰다, 조지 페퍼드, 캐롤 베이커, 캐럴린 존스, 스펜서 트레이시, 리차드 위드마크 등 당대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총출동한 이 거대한 서사시에도 데비 레이놀즈가 모습을 비춘다. 특유의 밝고 명랑한 이미지를 살려 첫째 딸과는 대비되는 삶을 꾸려나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 이주민들의 3대에 걸친 개척사의 음악을 풀어가는 건 미국 영화음악의 아버지이자 오스카 음악상 9회 수상에 빛나는 전설 알프레드 뉴먼이 담당하고 있다. 호쾌하고 인상적인 70mm 시네라마 대화면에서 펼쳐지는 미국 서부사에 감동과 깊이, 흥분과 전율을 선사하는 건 순전히 그의 음악 덕분이다. 서부극을 넘어 전설로 자리잡은 걸작 에픽 스코어.


<몰리 브라운>
데비 레이놀즈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게 한 작품으로, 실존 인물이었던 ‘(가라앉지 않는) 마가렛 브라운’에 대한 이야기를 강렬하면서도 활력 넘치게 담아낸 뮤지컬이다. 1960년 메러디스 윌슨의 동명 뮤지컬을 원작으로 삼고 있으며, 데비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했던 작품으로도 알려져 있다. 노동자 신분에서 남편의 금광으로 인해 일약 벼락부자가 되어 타이타닉에 올라탔다가 생존자로 살아남아 인명구조에 힘썼던 드라마틱한 생애를 그리고 있으며, 뮤지컬 여신답게 그녀의 춤과 노래 그리고 환상적인 연기와 매력을 유감없이 맛볼 수 있는 영화다. 뮤지컬에 쓰였던 17곡 중 5곡의 노래가 사용되고 나머지는 새롭게 영화를 위해 작곡됐다. 오스카 6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으나 <마이 페어 레이디>와 <메리 포핀즈>라는 강력한 상대로 인해 수상엔 실패했다.


<스위트 마마>
데비 레이놀즈가 오랜만에 TV를 벗어나 극영화로 복귀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호연으로 32년 만에 영화 부문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비록 수상은 하지 못했으나 여전히 좋은 배우이자 스타라는 포스를 보여준 작품으로 연출과 주연을 맡은 알버트 브룩스와의 호흡이 경쾌하면서도 짠하게 다가왔다. 이들 사이를 감싸안으며 오해를 풀어주고 이해와 동질감을 전달해주는 건 바로 마크 샤이먼의 아름답고도 사랑스러운 스코어 덕분이다. 다양한 코미디들과 뮤지컬에서 뛰어난 재능을 펼쳐왔던 작곡가답게 이 가족영화에서도 화합과 성찰 그리고 성장에 대해 잔잔하면서도 유쾌하게 스케치하고 있다. 재밌게도 마크 샤이먼은 앞서 딸 캐리 피셔가 나온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음악을 담당한 인연도 가지고 있다.


덧) 2017년 1월 7일 HBO에서 캐리 피셔와 데비 레이놀즈 두 모녀의 관계를 그린 다큐멘터리 <브라이트 라이트>가 방영되었다. 그 다음날인 제74회 골든 글로브에서도 모녀의 트리뷰트 영상을 공개하며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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