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작업을 시작한 지 벌써 38년 째에 접어든 배우 기주봉이 참여한 작품은 120편이 넘는다.

더군다나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던 걸 감안한다면 더욱 놀랍게 느껴지는 근면함이다.

근작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공작>, <강변호텔>로 어느 때보다 배우로서 빛나는 시기를 지나고 있는 기주봉이 거쳐온 인상적인 캐릭터들을 정리했다.

F학점의 천재들

1978년 형 기국서가 연출한 <관객모독>으로 연극계에 파란을 일으킨 기주봉은 80년대 들어 간간이 영화에 출연했다. 주인공 칸트 역을 맡은 <F학점의 천재들>을 시작으로, 이장호 감독의 <어둠의 자식들>과 <명자 아끼꼬 쏘냐> 등 10년간 여덟 작품에 조연으로 이름을 올렸다.

나쁜 영화

기주봉이 '영화배우'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건 장선우 감독의 문제작 <나쁜 영화>(1997)부터였다. 영화는 실제 가출 청소년들의 탈선을 주로 담아내면서, 종종 서울역의 행려들에게 시선을 던진다. 그들 중엔 진짜와 가짜가 섞였는데, 기주봉을 비롯한 송강호, 안내상, 김기천 등 7명의 배우가 실제를 방불케하는 행려 연기를 선보였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기주봉 하면 떠오르는 직업. 바로 형사다.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시작으로 무수한 형사 캐릭터를 거쳐왔다. 위 이미지를 보면 어쩐지 다수 전과의 범죄자 같아 보이지만,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우 형사(박중훈)가 속한 강력1반의 반장 역이다. 서 안에서 늘 담배를 물고 있다가 살벌한 포스로 범인들을 겁박한다.

친구

역할 이름은 '콧수염'. 준석(유오성)의 아버지가 이끄는 폭력조직의 2인자 역이다. 몇 신 등장하지 않는 와중에도 서늘함과 푸근함을 동시에 보여줬다. 동수(장동건)의 밀고로 사우나에서 경찰에게 연행 당하는데 말 한 마디 없이 오싹한 눈빛만 남긴다. 속편 <친구 2>에도 출연했다.

소름

주인공 용현(김명민)이 이사온 미금아파트에 사는 무명작가 이씨. 부스스 퀭한 모습의 이 작가는 아파트를 둘러싼 괴담을 용현을 들려줘, 이야기를 파국으로 흐르게 만든다. 괴담을 직접 소설로 쓰지만 결국 출판사에 퇴짜맞고 만다.

복수는 나의 것

첫 두 영화 모두 흥행에 참패한 박찬욱 감독은 중편 <심판>과 큰 성공을 거둔 <공동경비구역 JSA>에 기주봉을 기용했다. 그에 대한 애정은 <복수는 나의 것>까지 이어졌다. 동진(송강호)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해고당한 "6년 동안 결근 한번 없었던 개국공신" 팽 기사를 연기했다. 바짓가랑이 붙들고 빌어도 통하지 않자 옷을 벗고 커터칼로 자기 배를 마구 긋는다. 몸싸움 끝에 동진의 왼손에 상처를 남기곤 잠시 주춤대던 얼굴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클레멘타인

희대의 명작(!) <클레멘타인>에도 출연했다. 불법 이종격투기로 돈을 벌어, 주인공 승현(이동준)을 능구렁이처럼 위험에 빠트리는 황종철 역이다. 유독 튀는 안경-넥타이-행커치프를 걸치고 있는 게, 영락 없이 양아치의 행색이다. 틈날 때마다 성경책을 읽는데, 그게 가장 유용하게 쓰이는 건 부하들을 팰 때다.

알 포인트

이번엔 부대장이다. 1970년대 베트남을 배경으로 한 스릴러 <알 포인트> 초반에 짤막하게 등장한다. 200명의 부대원 중 혼자 살아남은 최태인 중위(감우성)에게 알 포인트 수색작전을 제안한다. 거절하자 간밤에 있었던 사건의 일지를 불태워 복종을 종용한다. 그 모습이 <영웅본색>의 오마주처럼 보인다.

주먹이 운다

<주먹이 운다>는 두 남자의 각자 다른 절박함을 교차하며 진행해, 마지막 대결 시퀀스를 향해 달려간다. 상환(류승범)의 아버지를 연기하는 기주봉의 모습은 "내 얼굴을 봐서 똑바로 살란 말은 차마 못하는" 아비의 흔한 초상이었다. 무뚝뚝하지만 조용히 곁을 맴돌던 아버지가 돌연 사고로 죽자 상환은 권투 신인왕이 되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된다.

경축! 우리 사랑

딸의 애인을 사랑하게 되는 중년 여자. <경축! 우리 사랑>의 주인공 봉순(김해숙)이다. 그럼 남편 하씨(기주봉)는 '피해자'가 되는 걸까? 속시원히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는 무료함을 핑계로 바깥으로 돌거나 가정에 무책임 해왔는데, 아내의 사랑을 알고 가족지킴이 노릇을 하려 든다. 영화의 톤이 내내 그리 무겁지 않게 흘러, 하씨의 돌변한 태도가 그나마 덜 폭력적으로 보였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폭력적인 기운이 두드러졌던 대부분의 캐릭터와 달리, 홍상수 영화들 속 기주봉은 그저 인자해 보인다. 늘 주인공 옆에 짧게짧게 등장하며, 속을 끓이고 있는 그들의 심정을 얼마간 누그러트려준다. 남한산성에서 만나는 후원이 해원(정은채)과 성준(이선균)에게 주는 위로가 구구절절한 말 없이도 따뜻했다. 해원은 꿈에서도 본 그를 "전에 봤던 착한 아저씨"라고 말한다.

차이나타운

정장남.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있지만 O의원이 아니다. 형사를 자주 연기해 이름보단 직책으로 불리던 경우가 많았던 것과 달리, 말쑥하게 차려 입은 모양새만 수식한다. '엄마'(김혜수)에게 쩔쩔매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녀의 존재감을 부풀리는 역할을 했다. 평소 기주봉의 캐릭터 같았으면 차이나타운의 분위기와 꽤 잘 어울렸을 텐데, 수트를 빼입은 그의 모습은 공간과 어쩐지 동떨어져 보인다.

간신

100편이 넘는 영화를 작업하면서도 기주봉은 사극과 좀처럼 연이 없었다. 미쳐버린 연산군과 그의 왕위를 쥐락펴락 하는 간신을 그린 <간신>에서 백정의 모습을 나타났다. 베일에 싸인 여인 단희(임지연)의 아버지 역이다. 비중 자체가 크진 않았지만 이야기의 중요한 키를 쥐고 있어 관객들의 기억에 뚜렷하게 남았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기주봉을 위한 영화. 찰리 채플린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는, 이발사 모금산이 채플린이 되기를 꿈꾼다는 설정에 이끌려 흔쾌히 출연을 결정했다. 대사의 고저장단까지 정확히 쓴 임대형 감독의 방식 덕분에, 덜컥 암 선고를 받고 자작 시나리오의 주인공을 연기하려는 독특한 캐릭터 이미지를 구현하기가 한결 수월했다고 한다. 본래 "웃는 게 좋아서" 배우가 되기로 한 기질과도 잘 맞아서일까, <.... 미스터 모>의 기주봉은 어느 때보다 자유로워 보인다.

공작

감쪽같은 분장 덕분에 못 알아봤을지도 모르겠다. <공작> 속 김정일을 연기한 배우가 바로 기주봉이었다. 5시간이 넘는 분장을 거쳐여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자료보다는 "냉철하고 단호하며 직관력이 뛰어"나다는 캐릭터 해석을 거쳐 본인이 생각한 김정일을 구현했다. 최신의 특수분장도 결국 보조장치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강변호텔

2008년 <밤과 낮>부터 현재까지, 기주봉은 홍상수와 여덟 작품을 함께 했다. 최근작 <강변호텔>은 기주봉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영화다. 불안함과 넉넉함이 동시에 깃든 중년 시인의 마음이 기주봉의 아담한 육체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어릴 적 목표로 삼았던 "등이 열려 있는 배우"에 한발짝 더 다가간 연기로, 40년 넘는 커리어 최초로 해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영광까지 누렸다.

문동명 /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