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다. 물론 모든 나라에도 시작이 있다. 대개 우리나라의 건국 시조로는 ‘단군 왕검’을 이야기한다. 이후 지금의 대한민국과 거의 동일한 지리를 가진 조선은 고종에 이르러 대한제국이 되었지만, 이후 주권을 빼앗겨 일제 치하에 들어갔다. 독립한 뒤, 곧 분단. 그러고 나서 남한에는 대한민국이 들어섰다. 그때 초대 대통령이 바로 이승만. 그렇게 이어진 것이 지금이다. 어쨌거나 나는 대한민국의 시작을 대강 이런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솔직히 우리나라 근대사에 엄청 밝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 교육 과정에서 근대사는 (시간 순서상) 매우 뒤에 배치되어 있고, 아직도 여러 역사적 해석이 계속되는 까닭에 역사 교육 과정에서 그리 중요도 있게 다뤄지지 않는 탓이리라.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주절주절 우리나라 근대사와 건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건가 싶을 것이다. 사실 지금부터 이야기할 디즈니+ 뮤지컬 실황 영화 <해밀턴>이 바로 미국의 건국 과정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이상, 읽는 이들로 하여금 ‘이 작품 한번 보고 싶은걸’이란 느낌을 갖게 하고 싶은데, 어쩌면 ‘미국의 건국사’를 다룬 작품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과 동시에 이미 흥미가 저 멀리로 도망가지는 않았을까 염려스럽다. 솔직히 필자도 그런 이유로 <해밀턴>을 시작하는데 좀 망설였기 때문이다. 지금 한반도에 사는 내가 굳이 미국의 건국사, 그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이제까지 듣도 보도 못한 ‘해밀턴’이라는 인물의 인생사를 뮤지컬로 볼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을 한 것이다.
사실 ‘해밀턴’이라는 이름을 또렷이 알고 있는 사람은 한국에 그닥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난 이와 유사한 성격의 작품이 우리나라에서 뮤지컬로 만들어지고, 또 이 작품만큼 대 흥행을 거둔다면 아마도 우리나라 많은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건국사에 한결 해박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보는 내내 정말 경이롭고 또 놀라웠다. 그리고 진짜 신기했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난 미국의 현대사에 그리 관심이 있지 않은데도, 이 작품은 러닝 타임 내내 너무 재밌게 봤기 때문이다. 무려 2시간 반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말이지. 그러니 이 글을 읽는 그대들이여, 이 작품은 꼭 한번 보도록 하자. 아마도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이 세계의 가장 최전선에 있는 작품의 지금을 만나게 되리라.
실제 이 작품이 거둔 성과는 정말 놀랍다. 토니상을 휩쓸어 댄 수상 경력은 뭐, 아주 간단한 장식 같은 기록이다. 심지어 이 작품을 일컬어 21세기 브로드웨이 최고 흥행작이라고들 하던데, 작품 보기 전에는 이 말을 듣고는 무슨 개국공신의 이야기가 이렇게 잘 될 일이냐, 미국식 국뽕인가, 싶더라는. 하지만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칭송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작품은 궁금해 하기 충분하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이 작품을 본 필자의 추천사를 한번 보태보도록 하자.
<쇼미더머니>를 시즌별로 챙겨 본다. 처음엔 힙합을 대상으로 하는 신기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생겼다는 호기심에서 보기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힙합이라는 장르에 익숙해 졌고, 그러다 보니 그쪽 음악도 종종 듣게 되었다. 어느 샌가 힙합 아티스트들도 살곰살곰 알게 되었다지. 흥행에 성공한 프로그램이다 보니, 시즌이 거듭되면서 힙합 뮤지션들은 점점 더 대중 안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힙합의 장르도 다양해졌다.
아마도 힙합을 즐겨 듣지 않아도 <쇼미더머니>라는 프로그램은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자, 그렇다. 뮤지컬 <해밀턴>은 힙합과 랩으로 만들어진 뮤지컬이다. 뭐, 힙합 뮤지컬이라고? 미국 건국 시대를 다루는데? 라는 질문이 자연스레 떠오를 것이다. 근데 오프닝을 보기 시작하는 순간 이 작품의 ‘힙함’에 정말 경탄이 나왔다. 고풍스러운 의상을 입은 유색인종 배우들이 미국 역사의 시작을 랩으로 읊는 순간, 나도 모르게 이 작품에 그냥 퐁당퐁당 빠져들고 말았다. 그렇게 본다면, 그 당시 혁명의 시대란 정말 힙합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영어 모국어 사용자가 아니다 보니 이 작품 넘버들의 가사가 바로바로 이해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간 힙합을 들어온 가락만으로도 이 작품의 라임과 박자가 얼마나 이 작품과 잘 어울리는지는 쉬이 알 수 있었다. 이 정도의 두터운 배우층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 역시 브로드웨이가 부러워지는 지점이다. 노래도 랩도 연기도 춤도 잘 추는 배우들이 이렇게 풍성하게 무대를 장식하다니 말이다. 사실 우리나라 주력 배우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도, 랩을 이렇게 능숙하게 할만한 배우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의 라이센스 공연은 역시 요원한 희망인가 싶기도. )
당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정세나 분위기도 이 작품을 통해 매우 잘 파악할 수 있다. 사람들의 평을 보자면, 이 작품의 내용과 구성이 실제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보다 더 정교하고 입체적이라 하니, 뭔가 뮤지컬을 보면서 세계 교양도 넓힐 수 있겠다는 느낌도 든다. 게다가 당시를 떠올려 보면 초대 내각에는 분명 백인들만 드글드글했을 게 분명한데, 실제 이 작품에서 주요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거의 다 유색인종이다. 실제 해밀턴은 백인이었다 해도, 뮤지컬의 해밀턴은 언제나 비 백인 배우가 맡아 한다는 이야기다. 근데 그것이 크게 어색하지도 거슬리지도 않았다. 어찌 보면 그 부분도 참 흥미롭다. 그렇게 백인 아닌 그들이 연기를 하면서 만들어 내는 묘한 긴장감과 흥겨움은 이 작품의 즐거움에 한 몫 한다. 이러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부자연스러운 노력 역시 이 작품이 가진 미덕일지도.
그간 뮤지컬 <해밀턴>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지만, 필자가 브로드웨이에서 이 작품을 보는 건 무척이나 요원한 일이란 생각을 해왔다. 솔직히 주변 공연 마니아들도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힘들 것 같은 공연을 꼽으라면 다들 이 작품을 든다. 작품이 좋지 않아서가 아니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은 이 작품의 고유한 개성 때문이다. 그런 시점에서 디즈니가 이 <해밀턴>의 무대를 영화화할 것을 공표했고, 우리나라에 디즈니+가 시작되면서 이 작품이 공개되자 수많은 공연 팬들은 쾌재를 불렀다. 근데 이 작품을 막상 많은 사람들이 확인하기 시작한 건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바로 올해 봄. 그때부터 번역 자막이 제공되기 시작했기 때문. 어찌 보면 OTT 시대의 덕을 보게 된 것인 겐가.
그러니 즐기자. 전 세계에서 가장 대단한 무대들이 올라간다는 브로드웨이, 그 정중앙에 있는 작품이 바로 이 <해밀턴>이니까. 대한민국 방구석 1열에서 그 무대를 볼 수 있다는 건, 정말 흥겨운 일일지니, 그 수혜를 톡톡히 누려보도록 하자.
여담으로 해밀턴은 미국의 10달러 지폐에 실린 사람이다. 원래 얼마 전에 얼굴이 교체될 예정이었다고 하는데, 이 뮤지컬의 유례없는 흥행 성공 덕분으로 그의 인기가 갑자기 치솟은 바람에 그냥 10달러 지폐의 얼굴로 남아있게 되었다고 한다. 정말 재미난 뒷이야기 아닌가.
테일러콘텐츠 에디터 풀잎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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