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인성은 ‘연기하지 않는 법’을 연구한다고 했다. 연기 경력 27년 차 배우 조인성은 여전히 자신의 쓰임새를 고민한다. 조인성은 자신의 쓸모를 끊임없이 자문하고 자신을 검열한다.
강렬한 이미지를 쌓아온 배우 조인성은 오히려 ‘버리는 법’을 익히고 있다고 했다. 과거 〈비열한 거리〉의 병두처럼 날것의 감정을 터뜨리던 시기를 지나, 〈휴민트〉로 그의 연기 인생의 변곡점을 맞았다. 에너지를 밖으로 뿜어내는 연기에서 안으로 삼키는 연기로, 그리고 조용하지만 강한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를 지향한다던 그는 〈휴민트〉로 절제된 인물을 빚어냈다.
조인성이 지향하는 ‘덜어내고 비워내기’의 연기는 〈휴민트〉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조인성의 조 과장은 영화를 보는 관객을 이끄는 ‘감정의 인도자’와도 같다. 11일 개봉한 류승완 감독의 영화 〈휴민트〉는 비밀도, 진실도 차가운 얼음 바다에 수장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이들이 격돌하는 이야기다. 조인성이 연기한 ‘조 과장’은 대한민국 국정원 요원으로, 위험한 상황에서도 날카로운 직관과 판단력으로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하지만, 처음으로 휴민트(Human Intelligence, 정보원)를 잃은 후 냉혹한 임무와 인간적인 선택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이다.
조 과장은 박건(박정민)과 채선화(신세경)의 멜로를 한 걸음 물러나 지켜본다. 두 사람의 진한 관계성 속, 조 과장은 휴민트를 향한 인간적인 연민과 요원으로서의 책임감 사이에서, 과잉된 감정이 아닌 절제된 표현과 액션으로 관객의 인도자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조인성의 말에 따르면, 〈휴민트〉의 조 과장은 영화의 ‘베이스’와 같은 역할이다. 밴드의 베이스도, 요리의 베이스도, 있을 때는 존재감을 의식하지 못하다가 막상 없어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그렇게 안전한 베이스를 자처한 배우는, 화려한 양념 대신 묵직한 밑 맛으로 류승완표 한상차림을 완성해 냈다.
지난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모처에서는 영화 〈휴민트〉의 개봉 기념 인터뷰가 진행됐다. 이날 씨네플레이는 조인성과 만나 영화 〈휴민트〉에 대한 비하인드부터 진솔한 연기적 고민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류승완표 요리를 맛깔나게 완성해 낸 배우 조인성과 나눈 대화의 전문을 옮긴다.

류승완 감독님이 〈휴민트〉 제안을 주셨을 때 대본도 안 보고 바로 수락하셨다고 들었어요. 처음 시나리오를 받고 쭉 읽으셨을 때 감상은 어떠셨어요.
‘싸늘한데 감정이 뜨겁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요. 동물로 따지면 조 과장 캐릭터는 외로운 늑대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특히 류 감독님은 현장에서 대본을 굉장히 많이 바꾸는 걸로 유명하고, 현장성이 굉장히 강하시기 때문에, 이번에도 같이 하면서 재미있게 만들어보자는 마음으로 하게 됐죠.
〈휴민트〉의 조 과장에게는 ‘우아하다’라는 수식어가 어울립니다. 롱코트를 걸치고 등장하시는데, 그 모습이 미국 고전 스파이 영화 같기도 하고, 홍콩 누아르 영화를 연상시키기도 해요. 조 과장의 스타일과 그리고 액션에 대해서 어떤 점을 고민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코트를 입은 조 과장의 스타일은 박건(박정민)의 무스탕과 대비되는 모습이에요. 감독님이 생각하시기에 제가 키가 크니까 코트를 입는 쪽이 좋겠다는 생각이었는데, 그 코트가 굉장히 불편하거든요. 액션할 때 코트에 걸려서 차라리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웃음) 제 액션이 특별히 우아한지는 모르겠어요. 제가 액션에 큰 뜻을 가지고 연기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류승완 감독님 당신께서 액션을 너무 잘 아시고 잘 운영할 줄 아시니까, 감독님의 연출력, 그 매직이 들어와서 우아하게 보이지 않았나 싶어요. 제가 특별히 우아하게 하려고 한 건 아니에요. 우아하게는 어떻게 하는 거예요?(웃음) 하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키 큰 배우도 많으니까. 저는 액션을 잘 몰라요. 정말 잘 몰라요. 감독님이 잘하시는 거지, 난 몰라요. 그냥 시키는 대로 했어요.(웃음)

그렇다면 류승완 감독님께서 조인성 배우에게 특별히 주문했던 디렉션이 있다면요.
조 과장이 연기할 때 “친절하게”, “다정하게” 하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고요. 그리고 “조 과장은 품위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점을 반복적으로 상기시켜주셨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휴민트 김수린(주보비)이나 채선화(신세경)를 대할 때 다정함이 없었더라면, 조 과장이라는 캐릭터는 입체성이 떨어졌을 거예요. 〈이제 만나러 갑니다〉(채널A에서 방영하는 북한 관련 예능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나원(통일부 소속 기관으로 탈북민이 한국 사회에 적응하도록 돕는 기관)에 갔을 때 국정원 사람들과 얘기하다가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만큼 서울말이라는 게 탈북자들에게는 다정하고 달콤하게 들리는 편인가 봐요. 저도 그런 것들을 참고했어요. 그래서 휴민트와는 정보만이 아니고 감정을 교류한다는 마음으로 다정하게 다가가려고 했고, 그래야 캐릭터가 입체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싶었어요.
조 과장의 키워드로 ‘다정함’을 언급하셨는데, 개인적으로 저는 계속 조 과장과 채선화 사이에 멜로의 텐션이 생기지 않을까 하면서 영화를 봤거든요. 또 조 배우의 눈빛 덕분에 묘하게 박건, 채선화, 조 과장의 삼각 구도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었어요. 연기할 때 그런 걸 의도하신 건지, 감독님의 특별한 주문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감독님이 특별히 주문하거나 제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보셨다면 영화를 풍부하게 봐주신 것 같고요. 저도 어떤 영화를 볼 때, 실제로 그런 장면은 없었지만 뭔가 이루어질 것 같은데 결국 없는 건, 내 마음속에 그 둘의 케미가 느껴졌다는 거잖아요. 따라서 그렇게 영화를 보셨다면 최고의 극찬인 것 같고요. 따로 멜로 눈빛을 연습하거나 따로 염두에 두진 않았고, 그야말로 화학적 작용에서 비롯된 감상인 것 같아요. 〈밀수〉 때 김혜수 선배님과도 묘한 멜로의 텐션을 느낀 분들이 있었듯이, 이번 영화에서도 그런 것들이 보였다면 풍성하게 느끼게 하는 하나의 요소이지 않나 싶습니다. 눈빛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안구건조증이 생겨서 그런 것 같아요.(웃음)
말씀하셨듯, 채선화와의 호텔 장면은 특히나 묘한 멜로의 무드가 느껴지는 장면이었어요. 앞서 박해준 배우는 〈휴민트〉의 최고 장면으로, 해당 장면을 꼽기도 했는데요. 이에 대해 화답하신다면요.
(박)해준이 형이요? 영화 볼 줄 아시네.(웃음) 사실 저는 (박)정민이도 그렇고, (신)세경이도 그렇지만, 해준이 형 보면서 정말 많이 놀랐거든요. 정말 유연하면서도 힘을 빼고 연기를 하는 분이라서 정말 압도적이었어요. 폼을 내려놓고, ‘나 악역이야’ 하는 게 아니고 정말 그 사람이 된 것 같잖아요. 저 인물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읽히지 않을 때 영화가 더욱 흥미진진해지는데, 해준이 형은 정말 더 많은 박수를 받아야 할 연기를 하셨다고 생각해요.
앞서 말씀드린 장면 등에서, 조 과장의 대사 처리도 인상적이었어요. 예를 들어서 “혹시 우리 만나는 거 누구한테 말한 적 있어요? 가족이라도” 이 대사도 중간에 한번 끊으며 텀을 많이 주셨더라고요. 그 덕분에 마치 채선화를 의심하면서도 다정하게 대하는 느낌이었어요. 의심과 친절을 동시에 품기 위해 많은 것을 고려하셨을 것 같아요.
약간의 ‘마’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거든요. 상대에게 우리가 말할 때도, 그 잠깐의 침묵이 많은 것을 품고 있잖아요. 심리 책에서 본 적이 있는데, 시끄러운 군중 속에서 어떤 한 사람이 말을 안 하고 가만히 있다면, 그러면 그게 소리 질러서 소음을 멈추는 것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그 소음을 막는 힘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휴민트〉는 영화다 보니까 초 싸움이 있잖아요. 말을 길게 줄 수도 없고, 너무 짧게 주면 표현이 안 되고. 적절한 타이밍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마를 이용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렇게 알아봐 주셔서 감사하죠.
류승완 감독님이 말하시기를, 장단음과 어미까지 고려하면서 대본을 통째로 외우고 자기화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하시던데,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이었나요.
대사를 완전히 입에 붙이려고 매일 아침 한 번씩 대본을 읽었어요. 그렇게 한 100일이 지나면 입에서 술술 나와요. 한 번 외울 때보다 두 번 외울 때가 더 좋고, 두 번 볼 때보다 세 번 볼 때가 더 좋고. 그렇게 메모리가 쌓이면 술술 나오게 돼요. 그래서 매일 읽었어요. 매일 그냥 한 번씩 소리 내서 읽고, 입에 붙게 하는 과정을 거쳤어요. 이제는 선배 배우가 됐는데 현장에서 NG 많이 나오는 것도, 누가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민망하고. 긴 신을 상대 배우와 쭉 연결해서 해야 하는데, 내가 먼저 NG를 냈을 때 상대 호흡을 끊을 수도 있기 때문에, 대본을 하루에 못해도 한 번은 꼭 봤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장단음도 보이게 됐고. 막상 실제로 연기를 하다 보면 급해서 지켜지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노력은 하자는 마음으로 다른 분들께 부탁해서 (장단음이나 어미 등을) 체크 받아 봤어요.

〈휴민트〉에는 조인성 배우와 박정민 배우의 진한 액션이 다수 등장합니다. 박정민 배우는 앞서 인터뷰에서 조인성 배우와 액션을 하면 아프지 않아서 좋았고, 배려도 넘쳤다고 말한 바 있어요. 액션 장면을 찍을 때는 어떠셨나요.
오히려 정민이랑 하는 건 전혀 걱정이 안 됐어요. 우리는 대화를 하면 되니까. 근데 해외 팀과는 정서가 달라서 어려울 때가 있었어요. 첫 번째 시퀀스에서 동남아시아 액션팀이 왔었는데, 그 팀들은 또 그 팀대로 우리와는 액션 방법이나 스킬이 달라요. 그래서 말이 안 통하고 정서가 안 통하는 해외 스턴트들이랑 일할 때가 더 무서웠던 것 같아요. 러시아 스턴트와도 마찬가지였어요.
박정민 배우가 기자간담회에서 “그동안 형한테 맞거나 뒤에서 서포트하는 모습만 보이다가, 이 작품에서 형하고 강대강으로 붙어서 좋았다”고 소감을 남겼는데요. 선배 입장에서 한 후배의 성장을 지속적으로 바로 앞에서 보신 거잖아요.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라고 하면 정민이를 비하하는 것 같고요.(웃음) 성장 과정을 지켜보게 되잖아요. 〈더 킹〉의 (류)준열이와도 그렇게 작업을 했었고, 정민 씨도 마찬가지로요. 후배 배우들이 더 사랑받을 수 있는 시기와 타이밍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정민이도 그런 타이밍과 준비가 되어 있는 배우였고, 당연히 그렇게 될 친구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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