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립>의 첫 장면을 보는 순간, 난 잠깐 동안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혹시 기억하시는가? <케빈12>이란 예전 드라마를. 아마 딱 지금 내 나이 정도 될 법한 아저씨가 예전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소위 창문 구조로 시작되는 드라마였다. 어린 소년이 사춘기로 진입하면서 친구들과, 형과, 가족들과의 갈등과 사랑 속에 어른이 되어가는 전형적인 성장 드라마였는데, 내가 딱 케빈 정도 나이였을 무렵에 드라마를 봤었다.

<케빈은 12살> 드라마 포스터. 왼쪽부터 폴, 케빈, 위니

어렸을 때 주변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똑똑하지만 바보 같아서 무시당하곤 했던 폴 같은 친구도 있었고, 덩치 큰 케빈의 형도 있었고, 뭣보다 까맣고 긴 생머리가 정말 예뻤던 주인공 케빈의 여자친구 위니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필자는 꽤나 주변머리가 없어 12살 무렵을 생각해보면 즐거웠던 추억보다는 이불킥 하고 싶은 일들이 훨씬 많이 기억나지만, 그래도 마치 <케빈은 12>의 케빈처럼 실수하고 넘어지며 성장했던 그때가 새록새록 떠오른다.

사실 성장영화의 스토리라는 건 마치 조셉 캠벌의 영웅 모험담 구조처럼 일면 도식적이다. 어린 소년 소녀가 사춘기로 진입하고, 그 과정에서 경험과 갈등을 겪으며 어른이 되는 이야기. 일면 뻔하고 일면 유치하지만 그 풋풋한 매력은 항상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이고 그 인생에서 오직 한 번만 존재하는 어린 시절의 즐겁고 또 창피한 기억들이 영화 속 내용들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플립> 역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어린 시절이 영화 속 두 주인공들에게 투영되는 예쁜 영화다.

<플립>은 2010년에 만들어졌고 그때는 DVD, VOD 형태로 출시되었다가 최근 극장을 통해 개봉되었다. 어렸을 때 처음 만난 두 꼬마가 사춘기를 지나며 서로를 자석처럼 밀고 당기는 내용인데 개봉 중인 영화의 내용을 자세하게 적긴 뭐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어렸을 적 생각이 났다. 어떤 장면에선 마치 영화 제목인 ‘Flipped’처럼 어떤 친구에게 첫눈에 반했던 기억이 떠올랐고 어떤 장면에선 어렸을 적 나에게도 저런 어른이 옆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장면도 있었고, 어떤 장면에선 어릴 적 꿈을 접고 살며 그 꿈을 이룬 사람들을 한때 부러워하고 질투했던 내 모습이 보였다.

클래식 칵테일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영화 제목을 보고 아마 다른 걸 먼저 떠올리셨을지도 모르겠다. 바로 플립이라는 칵테일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플립이라는 용어가 1695년에 처음 쓰였다고 언급되어 있다. 맥주와 럼, 설탕을 데우면서 계란을 넣은 뒤 맥주가 날아가고 남은 ‘Drink’를 뜨겁게 서빙하면 그게 바로 플립이라고 적혀 있다. 이후 미국의 전설적인 바텐더 제리 토마스가 1862년 쓴 책인 ‘How to Mix a Drink’에 정리되어 수록되었다.

<Recipe of Flip Cocktail>

기본이 되는 술(위스키, , 브랜디, , 위스키, 포트와인, 쉐리와인 중 하나를 선택)과 물, 계란, 설탕을 넣어 만들며 가니쉬로 너트멕을 갈아서 얹는데 보통은 모든 재료를 셰이킹해서 만들지만 제리 토마스의 책에는 이렇게 차게 만든 플립 말고 뜨겁게 만드는 방법도 언급되어 있다. 요새 같으면 전자레인지로 데워서 토디 글라스에 서빙하는 것이 가장 간편할 것 같은데, 예전엔 팬에 데워서 만들었다고 한다.

직접 만들어본 Cocktail Flip. 너트멕이 없네요 ^^;

레시피를 보고 호기심에 만들어본 Flip 칵테일은 강한 알코올의 킥 직후에 부드러운 달콤함이 따라오는 맛이었다. 베이스로 뭘 쓸까 고민하다가 바카디 화이트럼을 사용해 만들었는데, 럼 특유의 알코올 맛이 첫 순간에 아주 살짝 느껴졌지만 그 직후에 부드러운 계란과 생크림, 그리고 시럽의 맛이 혀를 휩싸고 돌았다. 일면 날카로울 수 있는 알코올의 맛을 부드럽게 감싸는 그런 칵테일이었는데, 입에 대는 순간 나는 브라이스의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서툴고, 고집만 세고, 실수를 연발하는 두 주인공을 화해하게 해주는, 손자에게 인생의 교훈을 따뜻하게 전해주는 그런 정말 어른 같은 할아버지를 말이다. 칵테일로서는 꽤나 구식인 셈이고 맛도 그런 스타일인데 그게 이 영화와 정말 잘 어울렸다. 

<케빈은 12>의 케빈은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위니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그리고 12살 이후 어른이 되어간 자신과 주위 사람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전한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게 꼭 나쁜 것도 아님을 말한다. 플립에 나오는 저 어리고 예쁜 친구들도 앞으로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뭐 상관있을까. 저 두 친구들이 옛날이야기처럼 결혼해서 영원토록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지 아니면 케빈과 위니처럼 각자의 인생을 살지 알 수는 없겠지만 어느 쪽이든 <케빈은 12>의 원제목인 <The Wonder Years>처럼 어린 시절을 추억하면서 그 시절이 정말 신비한 때였음을 어른이 된 후엔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두 예쁜 친구들의 예쁜 사랑에 아빠 미소를 지었고 내 아이도 저런 예쁜 사랑을 하며 성장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행복감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케빈은 12살> 마지막 장면

<케빈은 12>의 마지막 장면을 준비해봤다. 다른 분들도 물론이지만 특히 드라마 속 케빈과 비슷한 나이일 때 드라마를 봤던 동년배 여러분이 좋아해주셨으면 좋겠다. 영상을 보며 옛 생각이 난다면 내친김에 극장에 가서 <플립>을 보시라 권유하고 싶다. 이 영상을 보면서 받은 느낌을 다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내일은 좀 일찍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아들과 캐치볼을 해야겠다. 분명히 비가 그치고 선선하게 바람이 불 것이다.

플립

감독 로브 라이너

출연 매들린 캐롤, 캘런 맥오리피

개봉 2010 미국

상세보기
케빈은 12살

감독 아서 앨버트, 닐 말렌스, 제프리 D. 브라운, 아트 울프, 피터 볼드윈, 그렉 비먼, 스티븐 크레그, 마이클 디너, 브라이언 고든, 데이빗 그린월트, 피터 호튼, 닐 이스라엘, 마티아 카렐, 댄 로리아, 닉 마크, 리처드 마저, 짐 맥브라이드, 스티브 마이너, 톰 무어, 알린 샌포드, 토마스 쉬라미, 다니엘 스턴, 앤디 테넌트, 켄 토폴스키, 피터 워너, 롭 톰슨

출연 프레드 세비지, 다니엘 스턴, 댄 로리아, 앨리 밀즈, 올리비아 다보, 제이슨 허비, 다니카 맥켈라, 조쉬 사비아노

개봉 1988 미국

상세보기

데렉 / 술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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