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

※ <유전>과 <곤지암>의 결말을 포함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처음 <유전>을 볼 때는 공포에 몸서리치느라 어떤 ‘생각’을 하기가 어려웠다. 운 좋게도(혹은 나쁘게도) <유전>을 다시 보게 됐을 때 <곤지암>이 떠올랐다. 국적도 다르고, 형식도 다르고, 공포를 유발하는 방식조차 다른 두 영화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곤지암> 포스터

<곤지암>은 2018년 3월 28일 개봉해 267만 명을 동원한 흥행작이다. 한동안 흥행 소식이 끊겼던 공포 장르에 활기를 넣어주었고 ‘파운드 푸티지’(정돈되지 않은 촬영본을 엮은 방식의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이 인터넷 방송 문화와 어떻게 접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유전>

<유전>은 2018년 6월 7일 개봉해 6월 22일 기준, 15만 관객을 간신히 넘었다. 개봉 전부터 입소문이 났던 것에 비하면 지지부진한 성적에 관객들의 호불호가 명확했다(미국 현지 반응도 비슷하다). 같은 해에 개봉했지만,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인 두 영화가 왜 겹쳐 보인 걸까.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곤지암>은 폐허가 된 곤지암 정신병원으로 탐방을 나선 인터넷 BJ와 젊은이들이 주인공이다.  아는 이도 있겠지만, <곤지암>은 <그레이브 인카운터>(2011)의 형식을 차용했다. 정신병원이란 공간, 공포의 원흉을 담으려는 TV 제작팀, 파운드 푸티지 형식까지 유사하다. <곤지암>은 영화 속 제작팀을 20대 집단으로 교체하고 공간에 한국사의 흔적을 남기며 차이점을 만들었다. 이 변화가 <곤지암>의 아이덴티티가 됐다.
    
요약하자면 <곤지암> 미지의 공간에 사실상 생면부지인 타인과 함께 들어간 20대의 이야기다. <곤지암>은 ‘찾아가야 하는’ 폐허를 공포의 공간으로 설정하면서 인물과 관객 모두 일상에서 떨어뜨린다. 손전등 하나에 의지한 채 낡아빠진 병원을 돌아다니는 1인칭 시점의 화면은 관객의 공포를 자극하는 방식이자 관객을 인물에게 동일시시켜 일상적인 느낌을 털어내려는 트릭이다.

그레이브 인카운터

감독 더 비시어스 브라더스

출연 숀 로저슨, 주안 리딩거

개봉 2011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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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

<유전>은 그와 정반대다. <유전>의 모든 공포는 일상으로부터 비롯된다. 할머니가 죽은 이후 그레이엄 가족에게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사건들. 환상이 보이고 자신도 모르는 자해를 하는 등, 일련의 사건은 모두 집과 학교라는 일상적인 공간에서 벌어진다. 익숙한 공간 곳곳에서 귀신이나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징후를 접할 때의 공포는 낯선 곳의 낯선 것만큼이나 섬뜩하다.
    
또 <유전>은 나와 가장 시간을 오래 했을 가족의 얼굴에 공포의 전조를 띄운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생긴 상실과 그로 인해 가까운 이들 간의 관계가 무너지는 과정은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 가정이란 공간뿐만 아니라 개념까지 파괴하면서 관객에게 심리적 공포감을 조성한다.
    
요컨대 <곤지암>과 <유전>은 공포를 다루되 상반된 방향을 취한다. <곤지암>이 밖에서 공포가 존재하는 안으로 파고드는 전개라면, <유전>은 외부에서 침투한 공포가 점차 그 범위를 넓혀나가는 식이다. 깊숙한 곳으로 수렴되는 공포와 점차 넓은 곳으로 발화하는 공포, 거기에 <곤지암>과 <유전>은 각자 비유를 얹어 사유의 여지도 챙긴다.


두 영화가 말하는 환경의 공포

괴담의 원천인 ‘곤지암 정신병동’은 운영 당시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대통령 박정희나 304명이라는 단어나 누군가 ‘고문’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몇몇 단서들은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자세한 부분은 이용철 평론가의 글을 참고하자.)
    
그리고 이 공간을 탐험하는 건 20대 청년들이다. 돈이든 호기심이든 각자 욕망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호기롭게 곤지암에 발을 디딘 이들은 전부 그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곳을 떠도는 형이상학적 힘에 의해 사라지거나, 죽거나, 떠돌 뿐이다.
    
그래서 <곤지암>을 보노라면, 정범식 감독이 의도했든 안 했든 ‘헬조선’이란, 대한민국 사회를 향한 웃지 못할 별명이 떠오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청년들은 그곳에 남겨진 유산 속에서 뭐라도 해보려다가 실패하고 사라진다. 최소한 곤지암 원정대에겐 ‘들어간다’는 결정권이라도 있었는데, 현실 속 대다수의 청년들은 그 선택조차 상실한 채 곤지암에 던져지고, 떠돌고 있다.

<유전> 포스터의 일부분

그럼 <유전>이 의미하는 건 뭘까. 이 영화에서 택한 단어들을 살펴보면 운명, 미니어처, 샤머니즘이 있다. 각각 주제의식, 비주얼, 스토리에서 핵심적인 세 단어다. 이 가운데 시각적으로 표현되는 미니어처가 가장 인상적이다.

<유전>이 사용한 미니어처는 애니(토니 콜렛)의 대사처럼 “객관적으로 보려는” 시도로 봐야 한다. 이 영화는 밤낮이 바뀌는 장면에서, 오프닝과 엔딩 장면에서도 미니어처 효과를 사용한다. 즉 관객들이 미니어처라는 이질적인 요소를 통해 이 영화를 객관화하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유전>의 오프닝 장면

<유전>의 엔딩을 보자. 이 영화 속 비밀 집단은 마침내 파이몬 왕을 소환하는데 성공한다. 줄기차게 그려졌듯 이들의 ‘힘’은 한 개인을 좌지우지할 정도이며, 그런 이들이 숭배하는 파이몬 왕도 분명 강력한 존재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유전>은 이 모든 걸 다락방의 미니어처로 표현한다. 종말의 서막을 웅장한 표현으로 알리기보다 이 작은 공동체가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끌어내린다. 백인 중년들이 나체로 (남자아이의 신체와 여자아이의 영혼에 담긴) 파이몬 왕에게 경배하는 장면은 보는 이에 따라 웃기기까지 하다.
    
이 장면을 미니어처 형식으로 표현해 거리를 둔 이유는? 경고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이 조그마한 공간에서 몇 사람들이 마음 먹는 것만으로 이런 종말의 시작을 열 수 있다면, 세계 어디서도 이런 징후가 드러나고 있음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경고. 실은 이 웃겨보이는 광경을 도시나 국가로 확장했을 때, 한 인간에 빙의된 악마 이상의 것을 소환했을지도 모르는 우리 삶의 경고.

<유전>

어쩌면 그래서 <유전>을 보며 <곤지암>을 떠올렸는지 모른다. 둘 다 과거의 유산으로부터 발생한 거부할 수 없는 힘에 포획된 인간들의 이야기니까. 다만 <곤지암>은 현대적인 형식에 맞춰, <유전>은 고전적이면서 문학적인 방식으로 풀어낸 것이다. 어쩌면 둘은 결과와 원인인지도 모른다. 이미 주어진 환경 때문에 개인의 삶이 사라지는 과정이 <곤지암> 속 공포의 모태라면, 악마 소환을 통해 그 거부 못한 형이상학적 힘을 쟁취한 게 <유전>의 엔딩이지 않은가.
    
두 영화는 다르다. 완성도 면에서도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두 영화를 함께 도마 위에 올려본 건 이런 공통점을 느꼈기 때문이다. 스타일이 다른 영화라 비교 대상이 되지 않을 듯하지만 ‘환경의 공포’를 각자의 방식으로 풀어낸, 같은 해에 등장한 두 영화. 흥행작과 실패작 혹은 아류작과 수작이라는 단순명료한 딱지를 붙이기엔, 이 영화들은 아직 할 얘기가 너무 많은 듯하다.

곤지암

감독 정범식

출연 위하준, 박지현, 오아연, 문예원, 박성훈, 이승욱, 유제윤

개봉 2017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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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

감독 아리 에스터

출연 토니 콜렛, 밀리 샤피로, 가브리엘 번, 알렉스 울프

개봉 2017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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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