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트레이딩 카드 회사로 국내 스포츠 카드 커뮤니티에서도 잘 알려진 어퍼 덱(Upper Deck)에서 <마블 비기닝스>를 출시하였다. <마블 비기닝스>는 마블 코믹스 캐릭터들을 백과사전식으로 총망라한 총 540종 분량의 카드 세트로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마블 캐릭터들은 다 포함되어 있었는데 나름 마블 코믹스를 열심히 읽었다고 생각하는 필자조차 생소한 캐릭터도 다소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기억에 남는 것이 스파이더 햄(Spider Ham)과 스쿼럴 걸(Squirrel Girl)이다. 다람쥐처럼 거대한 꼬리가 달려 있는 소녀 캐릭터인 스쿼럴 걸의 일러스트를 보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는데, 얼마 후 이 캐릭터가 독자들과 창작자들에게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는 캐릭터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경악하였다.

스쿼럴 걸을 만든 것은 윌 머레이라는 작가. 1953년생이고 업계에서 일한 지도 꽤 되었지만 거의 무명에 가까운 그는 놀랍게도 매사추세츠 대학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이다. 젊은 나이에 펄프 소설에 빠진 그는 졸업 후 반평생을 펄프 소설/잡지 연구와 집필, 그리고 만화 글쓰기에 온전히 바친다. 그의 인터뷰를 보면 ‘자신의 인생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반추해 보면 아마 1961년경 첫 만화책을 구입한 것이 시작점이었던 것 같다’고 쓰여있다. 만화책은 이렇게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릴 정도로 무서운 존재인 것이다.

그는 당시 살고 있던 집 지붕을 돌아다니고 가끔 창문으로 들어오던 다람쥐들에게 영감을 얻어 스쿼럴 걸을 고안해 내었다. 평소에는 컴퓨터를 전공하는 대학생이라는 설정은 그의 전 여자친구를 모델로 해 정했다고 한다. 스쿼럴 걸의 디자인은 누구에게 맡길까 고민하다가 1960년대 스탠 리와 함께 스파이더맨을 창작한 작가이자 호러 만화의 대가인 스티브 딧코에게 부탁하기로 한다. 1991년 당시 스티브 딧코는 거의 은퇴한 상태였으나 윌 머레이의 부탁을 받아들여 8페이지짜리 만화를 같이 작업하기로 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윌 머레이와 스티브 딧코의 합작 ‘스쿼럴 걸의 등장’이라는 단편 스토리는 옴니버스 형식의 타이틀이었던 계간 만화잡지 <마블 코믹스 슈퍼 히어로즈> 겨울 특집호에 수록된다. 다람쥐들과 자유자재로 의사소통할 수 있고 초인적인 민첩성과 힘, 그리고 울버린처럼 수관절 부위에서 짧은 발톱 같은 돌기를 돌출시키는 능력이 있는 스쿼럴 걸은, 첫 등장부터 아이언맨과 협력하여 닥터 둠과 싸워 승리하는 괴력을 보여준다. 

스쿼럴 걸이 첫 등장한 단편

물론 그걸로 스쿼럴 걸의 등장은 끝날 예정이었다. 옴니버스형 잡지에 페이지수 채우기 용도로 만들어진 장난에 가까운 캐릭터였기 때문에 마블 코믹스의 다른 만화에 등장할 예정은 없었다. 1992년 마블 코믹스의 팬 잡지에 한 컷 등장하긴 했지만 ‘절대 나오지 않을 책: 스쿼럴 걸 2099’라고 농담의 소재로 사용된 것뿐이었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면서 스쿼럴 걸의 장점들이 갑자기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만 하여도 만화책의 주인공들은 근육질이고 거칠었으며, 스토리는 전혀 기름기가 없이 액션 장면으로만 꽉 차 있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메인스트림 만화에 코믹한 캐릭터나 귀여운 캐릭터, 또는 로맨스 장르를 기반으로 한 캐릭터들이 낄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만화들과 캐릭터들이 물론 존재하기는 했으나 인지도나 인기 면에서 철저히 비주류였던 것이다.

하지만 2000년대가 되었다. 미국 독자들도 일본 만화와 유럽 만화의 귀여운 캐릭터들을 점차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고 인터넷의 영향으로 미국 코믹스를 전 세계인들이 소비하게 되면서 ‘귀여움’은 미국 만화나 팝 컬처에서도 흥행에 매우 중요한 필수 요소로 떠오르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귀엽고 독특하고 재미있는 캐릭터들이 독자들의 주목과 사랑을 받기 시작하였고, 마블 코믹스와 DC 코믹스 등 메인스트림 출판사들도 이러한 추세에 맞춰 이러한 캐릭터들을 점점 전면에 부각시키기 시작했다. 이렇게 새 시대에 주목을 받기 시작하여 현재는 간판급 슈퍼스타가 된 대표적인 캐릭터가 마블 코믹스의 데드풀과 DC 코믹스의 할리 퀸이다. 이 둘이 첫 등장한 1990년대 초반만 하여도 약 20년 후에 이들을 주제로 한 영화가 나오고 바다 건너 아시아의 사람들까지도 이들의 이름을 알게 될 것이라 했더라면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스쿼럴 걸은 어마어마한 가능성이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일단 남녀노소에게 인기를 끌 만한 요소들이 모두 갖춰져 있다. 대학생이고, 귀엽고, 다람쥐꼬리를 달고 있고 동물 친화적이며 타노스와 닥터 둠과 싸워서 이길 만한 능력의 소유자이므로 현재 시점으로 캐릭터로서 모든 성공 요소들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마블 유니버스를 떠나서 디즈니의 기존 작품들과 병치해 놓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디즈니/마블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겠지만 스쿼럴 걸/밤비 팀업 같은 것도 절대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스쿼럴 걸의 성공 가능성 요인으로는 시대적 배경이 가장 클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미국 만화의 흥행 기준 자체가 바뀌어 버렸다. 물론 근육질 슈퍼 히어로들이 나와서 치고받고 싸우는 만화들이 아직 메인스트림이지만, 슈퍼맨, 배트맨이나 어벤저스처럼 이미 잘 알려진 캐릭터가 아닌 새로운 캐릭터가 성공하려면 코믹하고 귀여운 요소가 필수적으로 섞여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번 2018년 샌디에이고 코믹콘 한정판 만화책 중에 가장 잘 팔린 만화 중 하나가 데드풀과 위니 더 푸를 버무려 놓은 ‘데드푸’를 소재로 한 만화라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스쿼럴 걸은 아마 근 미래에 TV나 영화관 화면에서도 분명히 등장할 것이다. 현재 제작 여부가 불투명해지긴 했으나 제작 예정이었던 TV 시리즈 <뉴 워리어즈>에서 핵심 멤버로 등장 예정이었고 캐스팅까지 정해진 상태였었다.


최원서 / 그래픽 노블 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