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넷플릭스의 <데어데블> 시즌 3를 매우 재미있게 보았다. ‘역시 넷플릭스/마블 슈퍼히어로물이라면 <데어데블>’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데어데블> 시리즈가 인기와 시청률이 가장 높고, 그만큼의 완성도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시즌 3는 시즌 1의 주적이었던 킹핀(빈센트 도노프리오)이 다시 등장하여 강렬한 연기를 보여준다.
   
현실적인 힘으로 독자를 사로잡은 빌런
마블 유니버스의 대표 빌런 중 하나로 꼽히는 킹핀은 현실에서 실제로 존재할 것 같은 빌런이다. ‘슈퍼 빌런’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로 그가 지닌 초인적 신체능력은 거구에서 오는 강인한 체력과 힘 밖에 없는데, 이마저도 사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에 등장하는 여타 괴물급 히어로/빌런들에 비하면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다.
   

코믹스 속 킹핀의 모습

킹핀의 진정한 힘은, 그의 사업가적 능력과 휘하에 두고 거느리는 광범위한 범죄 조직 네트워크에서 온다. 설정상 뉴욕의 경제를 지배하는 제왕에 가까운 부와 영향력을 갖고 있는 인물 킹핀의 본명은 윌슨 피스크. 코믹스 첫 등장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50호였다. 얼마 전 작고한 스탠 리와 존 로미타 시니어가 같이 만든 캐릭터이다. 예상할 수 있듯이 스탠 리는 킹핀을 실제 존재하던 마피아 보스들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었다. ‘킹핀’이라는 이름 자체도 그 당시 널리 유행하던, 핵심 마피아 보스를 지칭하는 용어를 그대로 따 온 것이었다.

원래는 스파이더맨의 기타 자잘한 맞수들과 큰 차이 없는, 설정 외에는 큰 특징 없는 캐릭터이던 킹핀. 그가 마블 유니버스의 대표급 빌런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 <데어데블> 만화, 좀 더 구체적으로는 작가 프랭크 밀러의 역할이 크다. 미국  대학 문학 수업에서도 교재로 활용된 적도 있는 프랭크 밀러의 1980년대 <데어데블>은 그전까지 과장되고 허무맹랑한 만화적 묘사와 장치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누아르나 하드보일드 소설들의 문법을 전격적으로 차용하여 현실감 넘치는 슈퍼히어로 세계관을 확립하였다. 이 시리즈가 아니었더라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3부작이나 현재 넷플릭스/마블의 TV 시리즈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킹핀은 올해 발매된 스파이더맨 게임 <마블스 스파이더맨>에도 등장한다.

이런 현실적인 슈퍼히어로 세계관에 가장 걸맞은 빌런이 킹핀이었다. 여타 슈퍼 빌런들이 초인적인 힘을 사용하여 건물을 부수고, 은행을 털고 하는 동안 킹핀은 겉으론 합법적이고 성공한 기업가 행세를 하며, 은밀하게 살인, 납치, 협박 등을 자행했다. 현실 속 범죄조직과 다를 바가 없는 인물이었다. 킹핀에게 저항하는 자는 이유 없이 직장을 잃거나, 주변 인물들이 실종되거나, 사용하던 신용카드가 막히고 은행에서 거래를 거부당하거나, 심지어는 목숨을 잃게 되는데 이러한 위협은 성인들이 읽어도 섬뜩할 만큼 피부로 느껴질 만한 현실적인 것이었다.  황제와 같은 권력자 킹핀과, 일개 변호사에 불과한 데어데블/맷 머독과의 싸움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연상시켜 독자들에게 끊임없는 긴장감과 카타르시스를 선사하였다.

데어데블은 어떻게 킹핀에 맞서게 됐나

2003년 영화 <데어데블>에서 킹핀을 연기한 고 마이클 클락 던칸(왼쪽), 현재 마블 드라마의 킹핀을 맡은 빈센트 도노프리오

킹핀과 데어데블의 대립은 만화 평론가와 독자들이 20세기 최고의 만화 중 하나로 꼽아 주저하지 않는 <데어데블: 본 어게인>에서 정점에 달했다. 기독교적 종교적 모티브를 제목과 내용 전개에 적극적으로 차용한 이 작품은 킹핀의 무시무시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정치계와 사법계를 완전히 장악한 조직이 어떻게 한 개인의 삶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지를 소름 끼치게 묘사한 이 작품은 시공사를 통해 국내에도 정식으로 발간 됐으니 킹핀과 데어데블 캐릭터에 관심이 있으면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킹핀이 악역이 아니라 주인공급으로 등장하는 스토리 중 가장 흥미로운 건 1991년부터 4회 분량으로 연재된 <데어데블: 킹핀의 몰락>이다. 1990년대 초반 <데어데블: 폴 프롬그레이스> 등 메이저 데어데블 스토리들을 담당했던 더그 치체스터가 쓴 이 스토리에서는, 1987년 <데어데블: 본 어게인>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지게 된다. <데어데블: 본 어게인>에서 킹핀이 개구리를 연한 불에 천천히 삶아 죽이듯 데어데블/맷 머독을 체계적으로 영혼까지 파괴하려 들었다면, <데어데블: 킹핀의 몰락>에서는 반대로 데어데블이 킹핀을 천천히, 단계적으로 옥죄며 최대한의 고통을 선사한다. 그의 연인이자 슈퍼 빌런인 타이포이드 메리(넷플릭스 <아이언 피스트> 시즌 2에도 등장한 메리 워커)로 하여금 그를 배신하도록 만들고, 마블 유니버스의 대형 범죄 조직인 하이드라가 킹핀의 뉴욕시 자산에 대한 이권 다툼에 참여하게 만든다. 하이드라의 대형 헬리콥터가 기관총으로 킹핀의 사무실을 습격하여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는 장면을 멀리서 관찰하며 미소 짓는 데어데블의 표정은 이 스토리의 백미이자 핵심이다.

<데어데블: 본 어게인>

결국 데어데블과는 달리 잃을 것이 많았던 킹핀은 평소의 평정심과 이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데어데블: 본 어게인>에서 데어데블이 그랬던 것처럼 무작정 데어데블에게 달려들지만 준비된 데어데블에게 참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가 무고한 시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기물을 파손하는 장면까지 뉴스에 생생히 중계돼 그가 악당임이 미국 전역에 알려지게 된다. 이 부분은 넷플릭스의 <데어데블> 시즌 3 결말과 유사하다. 데어데블은 <데어데블: 본 어게인>에서 누명을 쓰고 상실했던 변호사 자격증까지 다시 회수하게 된다. 데어데블의 복수는 완결되고 데어데블과 킹핀, 두 숙적 사이의 승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데어데블: 킹핀의 몰락>

스토리의 결말도 인상적인데, <데어데블: 본 어게인>에서 데어데블/맷 머독이 부활하는 과정을 종교적인 모티브를 입혀 묘사하였다면, <데어데블: 킹핀의 몰락>에서도 킹핀이 자신을 협박하는 경쟁 범죄조직 간부를 살해한 후 피를 빗물에 씻으며,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부활의 의지를 명확히 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이 장면에서 킹핀이 첫 살인을 한 후 손을 씻던 장면이 오버랩되는데 <데어데블: 본 어게인>의 결말에 버금갈 만한 강렬한 연출이다. 악인의 심리 묘사를 이 시리즈만큼 심도 있게 한 만화 시리즈는 요즘에는 찾기 매우 힘든데 국내에서도 번역 출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최원서 / 그래픽 노블 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