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곁에서
소박하고도 강인한 영화를 만났다. 어느 순간에 환상성을 불어넣어야 할지 확신하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가르는 영화, 그 경계 사이로 감정이 흘러갈 수 있도록 고무하는 영화, <아워 미드나잇>은 건강해서 아름답고 유연해서 강하다. 어떤 영화를 아름답다고 말하는 건 영화의 미학적 형식을 상찬하는 표현으로, 강인하다는 건 인물들과 서사를 다루는 영화의 태도에 대해 이르는 표현으로 읽히기 쉽지만, 사실 둘을 분리하는 작업은 어렵고 대체로 무용하다. 형식과 태도는 하나다. 허울만 좋은 이미지 안에서 인물들이 생생히 살아나기는 어렵고, 주제에 몰입하는 서사는 영화가 지닌 환영성의 가치를 종종 무시한다. 영화의 환상성을 사랑하되, 현실의 무게를 저버리지 않는 임정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 <아워 미드나잇>은 단출하지만 강력한 형식을 구사하며 특별해진다. 그리고 그 형식의 중심에는 도시의 밤거리를 나란히 걷는 두 남녀가 있다.
밤을 걷는 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생계를 꾸려가는 무명배우 지훈(이승훈)은 오래된 연인 아름(한해인)에게 이별 통보를 받는다. 지훈과 같은 길을 걸어오다 배우의 길을 버리고 번듯한 직장을 찾은 아름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지훈을 이기적이라고 말한다. 서른 즈음에도 변변한 돈벌이 없이 꿈을 좇아본 이라면 가까운 사람에게 이기적이라는 말을 듣는 게 얼마나 혹독한 일이 될지 한번쯤 상상해봤을 것이다. 마음을 다잡으며 비루한 일상을 버텨내는 꿈꾸는 자들. 자괴감으로 한숨을 내쉬고 희망으로 또 한숨을 들이쉬는 자들. 지훈은 그렇게 꿈꾸는 자이고 밤거리를 나란히 걷는 인물 중 한명이다.
그와 함께 걷는 이는 사내 연애를 하다 데이트 폭력을 당해 신고했지만, 그 일로 회사에서 곤란을 겪으며 회복하기 힘든 내적 상흔을 입은 은영(박서은)이다. 공무원인 선배의 제의로 한강 다리 위에서 자살 방지 순찰 아르바이트를 하던 지훈은 텅 빈 시선으로 다리 위에 우두커니 서 있던 은영을 지나치지 못하고, 이내 곧 그 자리에 쓰러져버리는 은영을 응급실에 데려다준다. 그렇게 그들의 첫 번째 밤이 지난다. 그리고 쓸쓸함과 고통과 환희에 찬 두 번째 밤, 회복의 기운이 감도는 세 번째 밤과 아침이 이어진다. <아워 미드나잇>은 지훈의 고난과 내상을 입은 은영의 힘든 이야기를 담백하고도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소박한 아름다움과 강인함이 담백한 서사와 고운 자태에서만 기인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실 무명배우의 곤경과 고뇌는 독립영화의 오래된 소재다. 데이트 폭력과 그 사실을 고발한 이후 더 큰 상처를 입은 인물은 최근 한국 독립영화에서 자주 다뤄졌다. 게다가 강변에서 만난 두 남녀가 밤의 한가운데를 걸으며 긴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는, 이러한 서사들의 모태가 되었던 도스토옙스키의 <백야>를 상기시킨다. 그런데 익숙한 소재와 이야기가 흠이 아니라 힘이 된다면? 아름의 말처럼 “닳고 닳은” <갈매기>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해석되어 끊임없이 상연되는 이유가 시간이 흘러도 세상에 흐르는 감정들을 관통해내고 있기 때문이라면, <아워 미드나잇> 또한 ‘우리’의 ‘밤’이 지닌 힘을 동력 삼아 두 사람을 나란히 걷게 만든다. 그리고 그들의 행위와 그들을 비추는 장면들 속에서 시적 정취와 밤의 고유한 리듬, 또 환상적인 순간에서조차 희석시키지 말아야 할 현실감을 지속시켜나간다.
지훈과 은영이 양화대교에서 다시 마주한 밤, “괜찮으시면 좀 걸을래요?”라는 지훈의 제안은 이상하리만치 감동적이다. 쉽게 건네는 회유의 말보다 우선은 까만 밤 안에서 정체되어 있는 당신의 신체 리듬을 동적으로 바꾸고 그 걸음에 함께하고 싶다는 의지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함께 걷기 시작한다. 물가를 나란히 걷고, 인적이 끊긴 명동 거리와 선유도 공원과 돌담길, 을지로와 종로의 영화관 거리를 걷는다. 그곳은 우리에게 익숙한 장소들이지만 왠지 본 적 없는 장소들 같다. 아무리 익숙한 거리라도 인적이 끊기고 어둠 속에 잠기면 마치 다른 세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만 같은 밤 안에 그곳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밤은 그런 것일 테다. 밤은, 홀로 깨어 있으면 이 세상에 나 홀로 남겨진 듯한 고독이 밀려오고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착각도 일어나는 때이다. 더욱이 <아워 미드나잇>의 밤들은 더 어둡게 찍혔다. 명암이 짙은 흑백 화면 안에서 인물들이 거니는 장소들은 어두운 곳은 더 어둡고 조명이 있는 곳은 세상의 유일한 빛이 맺힌 것처럼 더 환하다. 이 영화가 조성한 환상성은 이미 촬영의 방향에서 결정된 것 같다. 그건 밤 안에서 고유의 장소성을 희석시키고 지리적 감각을 은근히 지우는 일이다. 말하자면 두 인물을 서울 도심의 밤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라 밤이라는 세계 속의 자유로운 유랑자로 만드는 것이다.
물론 지훈과 은영이 공유하는 낭만 안에는 고통 또한 자리하며, 이도시 유랑자들은 어두운 도심 속에 세 차례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두번은 고통과 회복의 기운으로 찬 역할극 속에서, 한번은 순수한 놀이를 함으로써. 카메라는 우선, 은영이 옛 연인에게 못다 한 말들을 토해내기 위한 의도로 시작한 역할극을 하는 두 사람의 그림자를 비춘다. 두 인물의 삶에 드리운 어둠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카메라는 곧이어 인물들이 위치한 곳으로 패닝해 두 인물의 표정을 비춘다. 과거의 그림자에서 현재 인물들의 생생한 감정들을 세심히 살피려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인물들을 무거운 서사에 정박하지 못하도록 하는 의지가 담겨 있는 듯하다. 그 우울한 그림자들이 사라지고 나면 유희적인 그림자놀이가 시작되는데, 극장 앞에서 이뤄지는 그림자놀이는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연출한다. 지훈은 극장의 외벽 앞에서 손으로 동물들의 형상을 구현하는 그림자놀이를 시작하고 조금씩 난도를 높여가다 코끼리 형상을 만들기 시작한다. 은영 또한 손을 모아 더욱 그럴싸한 코끼리 형상이 만들어질 즈음, 불현듯 커다란 코끼리 그림자가 두 인물에게 다가온다.
환상의 힘
<아워 미드나잇>에서 가장 큰 환희를 안기는 이 장면은 두 가지 면에서 감동을 준다. 첫째로는, 세속에 등장한 코끼리의 환영을 두 인물을 위무하기 위한 직접적인 장치로 사용하는 데 영화가 전혀 망설이지 않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영화의 환상성을 향한 감독의 진한 애정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영화 초반부에 등장했던 장면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옥탑방과 학교 연습실을 오가는 지훈은 연습실에서 찰리 채플린의 <시티 라이트>(1931)를 보고 있는데, 영화를 보는 지훈과 영화가 거울에 함께 비치기에, 지훈이 마치 보고 있는 영화 안에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엔 우울한 나날 속에서도 긍정적인 기운을 잃지 않는 지훈의 캐릭터를 찰리 채플린과 연결시켜보려는 의도가 담긴 장면이라 여겼지만, 은영과 지훈의 그림자놀이 안에서 <시티 라이트>가 다시 한번 상기된다. <시티 라이트>에서 코끼리는, 사랑하는 여인을 돕고자 도시 청소부로 나선 채플린의 고난을 희극적으로 그리기 위해 고안된 장치이다. <아워 미드나잇>에서의 코끼리는 한밤을 거닐 수밖에 없는 도시 유랑자들을 위한 위무적 장치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희극적 상상력과 고무적 상상력이 빚어낸 환상은 영화의 환영을 무한 긍정하며 현실의 곁을 단단히 지키고 있다. <아워 미드나잇>이 강인해 보이는 건 어느 순간 환상이 현실에 힘이 되어줄지 확신하며 용기 있게 환상을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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