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폴리탄의 세상에서 뉴욕은 가장 상징적인 도시다. 자유를 찾아 미국이라는 용광로에 녹아 든 모든 인종은 뉴욕에서 꿈과 사랑과 탐욕을 펼친다. 집도 절도 없이 남의 집 카우치를 전전하는 <인사이드 르윈>의 스타 뮤지션 지망생 르윈 데이비스(오스카 아이삭)부터 <아이언맨>의 천재 재벌 히어로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까지, 서울보다 조금 더 큰 뉴욕에 모여 산다. 그만큼 뉴욕은 누군가는 찬양하고, 누군가는 경멸할 이야기들이 넘치는 도시이기도 하다.

또 뉴욕은 여러 작품 속 배경으로 등장하며 수많은 세계의 시민들로부터 관광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 뉴욕을 뛰노는 차갑고 세련된, 워커홀릭에 인스턴트 사랑을 즐기는 뉴요커에 대한 환상도 생겼다. HBO 시리즈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사라 제시카 파커)가 사는, 실제로는 월세가 어마어마할 맨션과 마놀로 블라닉 슈즈보다 먼저 뉴요커의 이미지를 만든 건 <티파니에서 아침을> 속 할리(오드리 헵번)의 지방시 벨벳 드레스와 5번가의 티파니 건물이다. 인적도 드문 이른 아침, 뉴욕을 대표하는 옐로우 캡에 몸을 맡겼던 할리는 티파니 건물 앞에서 내려 들고 있던 크루아상과 커피를 먹으며 쇼윈도 안쪽의 보석들을 구경한다. 이 초라하지만 우아한 식사 장면은 역대 가장 유명하고 강렬한 영화 오프닝 중 하나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뉴욕에 백야 현상이 있어 밤도 낮처럼 밝은 것이 아니라면 이 대목의 시간대를 아침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해는 비스듬히 뜬 채 사람이 거의 없는 거리를 비췄고, 할리가 바라보던 티파니는 아직 개점 전이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제목이 <티파니에서 아침을>인 것만 보아도 할리가 티파니 앞에서 보석 구경을 하며 먹은 빵과 커피는 아침 식사여야 한다.

하지만 정작 이 유명한 조식의 주인공 할리의 생각은 달랐다. 할리는 할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수감 중인 마피아의 면회를 가서 말동무를 해 주는 대가로 100달러를 받고, 나머지는 파티에서 버는 소소한 용돈으로 근근이 뉴요커 생활을 유지한다. 그는 매일 뉴욕의 유명인들이 모이는 화려한 사교 파티에서 밤새 부자 남편을 찾는 데 골몰한다. 하룻밤 구애를 하는 남자들은 할리가 화장실에만 가도 50달러를 건네는데, 그들이 영 마음에 차지 않으면 몰래 파티장을 빠져나와 받은 돈으로 택시를 타고 티파니 앞에 내리곤 했다. 간혹 할리의 집까지 따라와 본전 이야기를 꺼내는 지질한 남자들도 있었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힘든 밤을 보내고 할리가 꼭 들르는 티파니는 그에게 파티의 시끄러움과 천박함이 없는 고고하고 조용한 공간, 상상 속 유토피아 같은 곳이었다. 할리는 뉴욕으로 왔을 때부터 티파니 같은 집을 마련하기 전까진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했다. 길에서 주워 온 고양이에게도 이름을 붙이지 않고, 맨션에는 침대 말고는 가구를 찾아볼 수 없다. 남편감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에게 호감을 보이는 남자들을 '쥐(rat)'라 부르는 할리는 스스로를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야생동물로 여겼다. 결국 자신이 쥐의 포식자가 될 거라는 확신 같은 것이 그에게는 있었다.

할리의 이웃 폴(조지 페퍼드)은 아직 성공하지 못한 소설가인데, 남편이 있는 유명 인테리어 디자이너와 비밀스러운 연애를 하는 조건으로 금전적 지원을 받는다. 과거 호평받았던 글의 영광을 잊지 못하지만 정작 타자기의 먹물은 말라 있는 폴과 그저 부자 남편을 통한 신분 상승만을 노리는 할리는 서로 처한 상황을 알고 난 후 친구가 된다. 첫 만남부터 두 사람이 느낀 건 강한 이끌림이었지만, 그들은 '돈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결혼할' 관계였다. 바꿔 말하면 돈이 없는 한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그러던 중 폴은 할리가 어릴 적 가난 탓에 칠면조 알을 훔치다가 농장 주인이자 수의사인 중년 남자의 후처가 되고 만 룰라매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고작 14세부터 누군가의 아내로 살았던 할리는 농장을 도망쳐 뉴욕으로 왔고, 남편은 할리의 동생 프레드를 핑계 삼아 그를 다시 농장으로 데려가려 한다. 할리는 여전히 보호자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지만, 농장에서의 과거를 떨치고 남편을 홀로 돌려보낸다. 폴 역시 할리의 격려에 힘입어 오랜만에 쓴 글을 파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폴은 이 기쁨을 누구보다도 빨리 할리와 나눈다.

아침부터 샴페인을 터뜨리며 폴의 재기를 축하하던 두 사람은 하루 종일 서로 해 본 적 없는 일을 번갈아가며 시도하기로 한다. 폴과 할리가 손을 잡고 나선 5번가는 이미 출근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아침. 할리의 첫 '해 본 적 없던 일'은 아침 산책이었다. 뉴욕에 온 후로 오전 6시에 5번가를 걷긴 했지만 그건 아침이 아닌 밤이었다고 말한다. 소유하지도, 소유당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강한 체했지만 결국 티파니의 고고함과 조용함을 갖춘 집을 원했던 할리의 가련한 모순이 이 대목에서 폭로된다. 야생동물처럼 살겠다는 고집스러운 자기방어로 결국 스스로를 옭아맨 할리는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는 소설가를 향한 마음을 애써 꺾으려 한다. 동생 프레드와 함께 살 수 있는 재정적 자유는 부자 남편만이 줄 수 있다고 믿었고, 그런 결혼은 할리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폴은 할리를 위해 디자이너와의 불륜 관계를 끊어 내지만, 할리는 폴을 밀어내려 브라질 부호와의 결혼을 추진한다. 하지만 할리의 목표를 지탱하고 있던 동생 프레드가 군대에서 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이 비극은 오히려 할리를 야생동물의 삶이라는 우리에서 벗어나게 했지만, 할리는 그 우리 밖으로 걸어 나올 자신이 없다. 정확히는 우리 밖에 삶과 사랑이 실재한다는 걸 아직도 믿을 수 없었다. 소유하지 않겠다며 텅 비워 둔 집에 가구들을 들인 건 정착 의지가 무의식적으로 발현된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브라질 부호에게 차이고 난 후 끝까지 다른 부자들을 찾아 떠나겠다는 아집은 할리가 떨치지 못한 두려움의 다른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폴은 문이 열린 우리 밖으로 선뜻 나서지 못하는 할리의 손을 이끈다. 주제넘게도, 어디로 도망치더라도 다시 우리로 돌아갈 것 같은 할리의 지금 모습을 꾸짖는다. 그러면서 폴은 서로 소유하는 사랑이 있다고 말한다. 사랑은 결국 또 다른 우리와도 같겠지만, 그건 적어도 실존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리고 비 오는 오전 10시, 두 사람은 비로소 '티파니에서 아침을' 맞을 준비를 마치고야 말았다.


칼럼니스트 라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