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바다, 초원이 어우러져 그림 같은 정경을 만들어내는 섬 이니셰린. 마냥 평화로워 보이는 이곳에 일명 ‘성격 좋은 친구’로 불리는 파우릭(콜린 파렐)이 있다. 그는 걱정거리 하나 없어 보이는 모습으로 활기차게 입장한다. 돌담길을 지나 바닷가 외딴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 누가 봐도 경쾌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길의 끝엔 일방적 통보가 기다리고 있다. 천진한 사내에게 일생일대의 시련을 안겨줄 가혹한 이별 통보 말이다. “이제 자네가 싫어졌어.” 어제까지만 해도 단짝이었던 콜름(브렌단 글리슨)은 하루아침에 돌변해 절교를 선언한다. 앞으로 말 한마디 걸지 말라니 아무래도 단단히 뿔이 난 모양이군. 파우릭이 선선한 마음으로 뭐든 사과하겠다며 운을 떼 보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잘못한 일도 없고 미안할 필요도 없단다. “시간이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들어. 남은 생은 사색하고 작곡하며 살 거야. 자네 한심한 소리 듣고 있을 시간 없어.” 우리가 함께 있는 시간이 모두 쓸데없는 낭비라니 이토록 잔인한 말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런데 더 잔인한 일은 그다음에 벌어진다. 계속 귀찮게 하면 손가락을 자르겠다며 콜름이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바이올린 켜는 콜름 자신의 손가락 말이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그들이 속한 마을 공동체에도 영향을 주는 우정의 붕괴를 다룬다. 갑자기 이별을 통보받은 파우릭은 짙은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슬픔에 잠긴다. 일평생 칭찬으로 알아들었던 성격 좋다는 이야기도 의심하기 시작한다. 콜름의 말처럼 파우릭은 그저 지루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방적으로 결별을 통보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온갖 생각 속에서 끙끙 앓으며 파우릭은 특유의 다정한 면모를 잃어간다. 포기하지 않는 파우릭을 상대하느라 콜름도 피폐해진다. 이제 시시한 수다 떨기는 그만두고 음악과 함께 하려는데 옛친구는 좀처럼 손을 놔주지 않는다. 게다가 콜름은 못 이기는 척 다시 관계를 회복하는 게 아니라 끝내 손에 피를 묻히고 마는 성정의 소유자다. 작은 소동인 줄 알았던 절교 선언은 인물들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건 물론 종국엔 더 큰 희생마저 불러오는 소용돌이가 된다. 파우릭의 여동생 시오반(케리 콘돈)과 동네에서 제일가는 바보로 불리는 도미닉(배리 케오간)도 이 균열의 여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저마다 정서적으로 동요하며 각자 선택의 기로에 선다. 모두의 삶을 바꿔놓을 분열의 씨앗은 대체 어디서 날아온 걸까.
영화는 1923년 4월이라는 구체적인 배경을 제시한다. 아일랜드 내전이 막바지에 다다른 시기, 본토가 바라보이는 섬에서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셈이다. 다가오지 말라는 남자와 계속해서 다가가는 남자. 이들의 괴상한 싸움은 형제들의 전쟁으로 불리는 아일랜드 내전과 느슨히 겹친다. 양자 사이에 접촉은 금지되고 소통의 의지는 피를 부른다. 본토에서 잊을만하면 들려오는 대포 소리는 두 전쟁의 연관성을 지속해서 일깨운다. 하지만 가상의 섬 이니셰린은 내전의 직접적 영향을 받는 장소는 아니다. 전쟁터의 흙먼지는 결코 섬으로 흘러들어오지 않는다. 이니셰린은 기묘한 곳이다. 역사와 가까이 있지만 동시에 외부와 단절된 폐쇄적 공간처럼 느껴진다. 그 때문인지 아일랜드 내전은 섬에서 발생한 갈등의 원인이 아니라, 그저 인물들의 전쟁 같은 상황에 대한 비유로만 읽힌다. 여기엔 인과가 없다. 분열은 정말이지 운명처럼 다가온 것이다. 물론 콜름은 결심의 이유를 여러 차례 늘어놓는다. 하지만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겠다면서 손가락부터 자르기 시작하는 행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시오반이 정확히 지적했듯, “그건 아저씨 음악에 도움이 안” 된다.
“내게서 떨어져 달라”고 요구하며 자기 파괴를 일삼는 콜름의 행동은 삶의 무의미와 싸우는 몸짓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는 시간이 흘러 다정한 기억은 모두 사라져도 음악만큼은 남아있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인생이 이토록 덧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콜름이 내놓은 핏빛 답변은 주변 사람들을 경악케 하지만 본질적 고민 역시 불러일으킨다. “죽길 기다리며 혼자 만족하는 삶”을 회의한다는 콜름의 이야기를 곧장 알아듣는 건 다름 아닌 시오반이다. 오빠와 달리 책 읽는 걸 좋아하는 똑똑한 그녀는 섬 생활의 외로움에 점차 지쳐간다. 어쩌면 그녀의 진짜 삶은 바다 너머 본토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흥미롭게도 콜름과 시오반은 파우릭에게 비슷한 걸 요구한다. 공간을 구분해줄 것. 콜름은 파우릭과 같은 곳에 있고 싶지 않다고 밝힌다. 시오반은 집 안에 동물을 들이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파우릭은 그들의 요청을 따르지 않는다. 이들은 다른 종류의 인간이다. 지금 이곳이 아니라 다른 어딘가에 있을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이들은 타자와의 거리도 필요로 한다. 반면 파우릭과 도노반은 여기 이곳에서 지금까지 그랬듯 그대로 존재하길 원한다. 그들에게 새로운 거리 설정은 차라리 죽음과도 같은 것이다. <이니셰린의 밴시>가 다루고 싶은 건 바로 이러한 차이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극작가로 먼저 유명세를 얻은 마틴 맥도나가 직접 쓰고 연출한 네 번째 장편 영화다. 현실의 다양한 재료들을 가져다 장르적 코드를 활성화하는 특기는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거대한 우화로도, 세밀한 블랙 코미디로도 읽을 수 있는 이번 영화는 베니스국제영화제를 비롯해 여러 시상식에서 감독에게 각본상을 안겼다. 마틴 맥도나의 장편 데뷔작 <킬러들의 도시>(2008)에서 호흡을 맞췄던 브렌단 글리슨과 콜린 파렐의 조우만으로도 <이니셰린의 밴시>는 반가운 작품이다. 감독에 따르면 영화의 출발점은 이별의 슬픔을 담아내는 것이었다. 쉽게 빠져나오기 어려운 감정적 회오리를 만들어내는 건 마틴 맥도나가 <쓰리 빌보드>(2017)에서도 보여줬던 뚜렷한 특징이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인물들이 툭툭 던지는 대화에 피식거리며 웃다가 이내 덜컹이는 심장을 부여잡게 되는 영화다. 굵직한 설정과 눈에 띄는 선택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배우의 사소한 표정과 몸짓, 화면을 채우는 동물들의 눈빛, 작은 섬을 뒤덮는 빗방울과 햇빛이 특유의 정서를 완성해낸다.
리버스 reversemedia.co.kr
글 손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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