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의 19번째 영화가 개봉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제67회 베를린 영화제에 공식경쟁부문에 출품돼 김민희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화제를 낳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주목을 끌었던 건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를 촬영하며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는 사생활 논란이 불거지면서부터였다. 일체 공식적인 발언을 자제해오던 두 사람은 이번 3월 23일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개봉이 정해지며 기자회견에 참석해 진지하게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둘의 사랑과 영화는 별개로 봐달라는 말과 달리, 여배우가 유부남 감독과 사랑에 빠져 모든 걸 잃고 독일로 떠난다는 영화의 내용은 실제의 모습과 많이 겹쳐 보인다.
비슷하지만 매번 다른, 홍상수의 영화
사실 홍상수 감독은 현재를 기반으로 한 자신의 삶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재료들로 영화를 만들어왔다. 영화감독이나 작가와 같은 남자 주인공, 우연한 여행들이나 혹은 흔히 펼쳐지는 술자리, 그 속에서 부대끼는 남녀의 치정이나 혹은 사랑, 그리고 이별 등을 통해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한국형 누벨바그를 찾아낸 셈이다. 찌질하고 궁상맞을 수 있는 남녀의 얘기들을 통해 관계와 기억이 재조합되고, 미시적이고 상대성적인 리얼리티를 조망한다. IMF나 탄핵, 그 어떤 정치적 이슈나 사회적 현안을 건드리지 않지만,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과 그 속의 갈등, 예술가로서 자의식을 드러내며 속물적인 인간사에 대한 대답과 탐구를 이어왔다.
그런 의미에서 19편이나 되는 그의 영화들이 외형적으로 닮았고, 반복되어온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새로운 현장에서 다양한 배우들과 스탭들이 만들어내는 화학작용을 통해 홍상수는 색다른 변주와 기운을 이끌어내며 매번 다른 상황과 디테일을 캐치해냈다. 그렇게 홍상수의 영화들은 변해왔고, 각 영화들마다 다른 삶의 태도와 찰라의 감정, 미묘한 시각차를 지니게 되었다. 이자벨 위페르나 제인 버킨, 카세 료뿐만 아니라 국내의 다양한 배우들의 참여도 한몫했다. 홍상수 영화에서 배우의 존재감은 중요하다. 현장에서 모든 게 결정되는 만큼 각본과 편집의 역할까지도 어느 정도 짊어지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홍상수의 음악적 페르소나, 정용진
여기에 자신이 제작까지 겸하게 되며 영화 외적으로 미니멀한 형태로 나아갔고, 디지털의 수용과 현장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도 노련해지며 초기작들보다 빠른 공정을 갖게 되었다. 김기덕 감독과는 또 다른 노하우의 축척이자 자신만의 독자적인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익숙한 배우들의 재기용이나 주축이 되는 스탭진의 고정화도 이에 해당하는데,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건 배우도, 촬영도, 편집도 아닌 음악을 맡은 정용진이란 이름 석 자다. 그는 2004년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시작으로 19편의 홍상수 영화 중 무려 12편의 음악을 담당했다. 어찌 보면 영화음악가 정용진은 진정한 홍상수의 페르소나인 셈이다.
4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지만 가정 형편상 일반 학과로 진학했다가 독일, 미국 유학을 떠나며 베를린 국립음악대학과 버클리 음대, 캘리포니아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에서 영화음악과 전자음악, 뉴미디어 작곡으로 학위를 받은 정용진은 홍상수 감독과의 인연을 시작으로 영화음악에 발을 내디뎠다. 홍 감독과의 협업 외에도 SBS 다큐멘터리 <차마고도 1000일간의 기록>과 KBS 다큐멘터리 <인간의 땅> 등 방송음악과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 <나쁜 놈이 더 잘 잔다>나 <터치>, <꿈보다 해몽>, 중국판 <분신사바> 1, 2편 그리고 최근의 <해빙>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한 그는 여전히 대중들에겐 생소하지만 조금씩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중이다.
음악은 간단하고 감미롭고 세련되게
홍상수 영화에서 음악은 조금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일반적인 영화에서 쓰이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스코어가 극적인 요소를 드러낸다거나 감정을 표출하는 경우는 드물고, 테마 또한 특별히 정해놓지 않는다. 홍상수 특유의 많은 대사들과 보이스오버, 드라마틱하지 않은 구조 때문에 음악은 최소화되고, 보편적이고 익숙한 본연의 역할을 소화하지 못한다. 대신 상투적인 경험과 현실을 다시 바라보고 재조합해가는 홍상수의 시각처럼 정용진의 음악도 기존의 요소들을 초월해 중의적이고 상충되며 양가적인 의미로 작동한다. 영화음악으로서는 소극적인 역할일 수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만큼 더 자유스러워지고 넓은 확장성을 갖는다.
홍상수는 <씨네21> 752호 평론가 정성일과 한 대담에서 “음악은 그 자체로 너무 뚜렷한 정서를 가지고 있어서 어쩌면 제 작업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 이유로 자신의 영화에는 “선율이 단조로우면서도 약간의 감흥은 있지만 뚜렷한 정서까지는 주지 않는, 동요 멜로디 비슷한 곡이 많다”고 했다. 2006년 9월 <씨네21>과 한 인터뷰에서 “간단하고 감미롭고 세련되게”를 자신 음악의 모토라고 밝혔던 정용진의 음악관과도 어느 정도 상통하는 셈이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 단순하고 반복적인 정용진의 선율과 리듬이 홍상수의 초현실적인 희비극과 맞물리며 기묘한 조화를 낳고, 색다른 이완과 템포를 부여한다.
영화음악도 일종의 ‘배우’다
단출하게 건반을 메인으로 삼고, 요란한 편성을 요하지 않은 그들의 작업물들을 보면 얼핏 우디 앨런 영화 속 재즈들을 상기시킨다. 혹은 초기 기타노 다케시 영화들에서 히사이시 조를 떠올리게도 만든다. 스케르초나 왈츠의 느낌으로 인생의 한 단면을 희화화하고, 미니멀한 선율로 극사실적인 분위기에 판타지의 기운을 심는다. 정용진의 음악은 마술처럼 다가왔다 바람처럼 사라진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그림자처럼 조용하지만 굉장히 효과적인, 할 것 다하면서도 튀지 않는 영화음악가로 남겨지길 원했다. 홍상수는 “음악감독의 이런 결과물들을 (일종의) 배우처럼 생각한다”고 했다. 그만큼 음악이 갖는 힘이 중요하고 크다고 본 것이다.
이런 스코어 외에도 홍상수는 기존의 음악들을(그것도 주로 클래식을) 종종 영화에 삽입해왔다. <생활의 발견>에서 엔딩에 흐르는 건 아르보 패르트의 ‘거울 속의 거울’이고, <밤과 낮>의 오프닝과 엔딩을 장식하고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 신시사이저로 편곡돼 엔딩을 마무리짓는 곡은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의 2악장’이다. <극장전>에선 요한 스트라우스 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이 쓰였고, <옥희의 영화>에선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이 사용됐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선 독특하게 동요인 ‘봄이 오면’이 흐르고, <우리 선희>에선 최은진의 ‘고향’이란 곡이 빈번히 나와 웃음을 선사한다. 그리고 이번에 개봉하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는 슈베르트의 ‘현악5중주 C장조 D.956 2악장’이 삽입됐다.
홍상수는 이런 곡들이 가진 정서와 이미지를 적극 활용해 다른 효과들을 주고자 했다. 실제로 삽입곡들은 관객들에게 웃음과 이질적인 거리감, 그리고 반어적이고도 다면적인 해석을 갖게 만든다. 그럼에도 홍상수 영화 안에서 음악은 여전히 이질적이고, 사용에 조심스럽다. 데뷔한 지 20년이 넘었고, 19편의 영화들을 만들었지만, 그는 (촬영이나 음악, 편집 같은) 기술적인 부분에 있어 자신만의 확고한 접근법을 버리지 않았다. 한계와 제약, 난관이 존재하지만 이를 어떻게든 부딪치고, 서로 설득하며, 생각과 분위기를 전염시키는 게 홍상수식 영화 만들기의 본질이다. 그런 이유로 정용진 음악감독도 매번 현장을 찾으며 음악을 만들어왔다.
홍상수 영화 다르게 보기
안타깝게도 홍상수 영화의 사운드트랙이 상업적으로 발매된 건 음악이 (그나마) 풍성하게 쓰였던 <해변의 여인>이 유일하다. DVD 한정판 번들로 OST가 포함됐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까지 포함한다면 두 작품이 전부인 셈. 옥길성 박사의 전위적이고 강렬한 현대음악이 빛났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나 무성영화 스코어를 떠올리게 하는 <오 수정>, 드라이하고 나른한 원일의 <강원도의 힘>과 역동적인 힘이 느껴졌던 강기영의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등을 비롯해, 정용진 음악감독의 일련의 작업물들을 듣기 위해선 영화를 봐야 한다. 이들 음악을 눈여겨 들어보고, 쓰임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차이를 구분하게 된다면 비슷하게만 느껴졌던 영화들이 확 달라져 보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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