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낮의 잔재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의 번역자 김유경은 이 소설 제목의 유래에 대해 저자의 인터뷰를 인용해 이렇게 보고한다. “제목을 정하는 것은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과 비슷하다. …… <남아 있는 나날>의 경우에는, …… 한 작가 친구가 언급한 ‘낮의 잔재’라는 프로이트의 개념에서 나온 것이다.”('파리 리뷰'와의 인터뷰 중에서) 프로이트의 ‘낮의 잔재day residue’가 이시구로에 의해 ‘The Remains of the Day’(낮이 남겨놓은 것들)가 되었다가, 한국어 번역본과 동명의 영화 제목에서는 <남아 있는 나날>이 된 셈이다.
오역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영화 말미 고집스런 집사 스티븐스는 이제 막 불들이 켜지기 시작하는 해변가에서 미스 켄튼(벤 부인)에게 이런 질문을 받기 때문이다. “하루 중 저녁이 가장 좋은 시간이래요.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래요. 당신이 기다리는 건 뭔가요?” 대저택의 영광스런 낮은 다 갔다. 그리고 늙은 스티븐스에게도 저녁이 찾아왔다. 그랬으니 저 질문은 ‘한때 사랑했던 스티븐스 씨, 당신은 이제 남아 있는 나날들을 어찌 보낼 셈인가요?’라고 묻는 것에 다름 아니겠다. 따라서 ‘남아 있는 나날’도 나쁘지 않은 제목이다.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이시구로는 도대체 프로이트의 ‘낮의 잔재’란 말을 빌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구멍 난 저택을 떠나는 꿈
‘낮의 잔재’라는 말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다섯번째 장 '꿈 재료와 꿈 출처'에 등장한다. 대체로 우리가 꾸는 꿈은 최근 겪은 낮의 기억들을 재료로 삼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영화 「남아 있는 나날」을 집사 스티븐스가 (영광스런 대저택에서 보낸) 낮의 잔재들을 재료 삼아 꾼 한 편의 꿈으로 읽는다고 해서 무리한 독법은 아니겠다. 그렇게 읽을 때, 스티븐스의 ‘휴가’는 ‘수면’과 유비될 만하다. 다만 휴가 중에는 몸이 쉬지만, 수면 중에는 (이드와 초자아의 야단법석에 지친) ‘자아ego’가 쉰다는 차이는 있겠지만…… 유사하게 그의 ‘여행’은 ‘꿈’과 유비될 만하다. 여행도 꿈도 얼마간의 현실 원칙을 쾌락 원칙에 넘겨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휴가를 즐기기 위해 여행을 가듯, 수면 상태를 누리기 위해 우리는 꿈을 꾼다. 꿈은 잠을 방해하는 (내적, 외적, 성적) 자극을 ‘소원 성취’를 통해 해소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수면 상태를 연장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말한 이도 프로이트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가 시작되면 스크린 가득 영국식 대저택의 일러스트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 중앙에 구멍이 뚫리고, 커지는 그 구멍 속으로 영국의 전원을 달리는 자동차가 보인다. 스크린 너머의 세계로 향하는 차, 곧 여행의 시작, ‘입몽(入夢)’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자극이 스티븐스의 편안한 수면을 방해했던가?
“세상 구경 좀 하고 오게. 마지막으로 세상 구경한 게 언제인가? 말해보게”라며 여행을 권유한 이는 (달링턴 경을 대신해) 저택의 주인이 된 미국인 루이스다. 스티븐스는 이렇게 답한다. “과거에는 이 집 안에서도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자극의 정체는 이 대답에 있다. “과거에는.” 달링턴의 저택이 지구의 중심이었다(고들 착각했다). 온 유럽의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유럽의 운명을 농단하던 중심(실은 독일의 전쟁 준비를 신사도란 이름으로 돕는 일이었음이 드러나지만)……,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켄튼 양의 편지 낭독과 함께 시작하는 영화 초입 “매국노의 보금자리 헐리다”라는 데일리 지의 기사가 언급되고, 결국 저택을 루이스가 구입했다는 정보가 관객들에게 먼저 전해진다. 그리고 상징적이게도 ‘신사도’란 이름의 엘리자베스 시대 그림이 미국인 루이스에 의해 경매되는 장면도 보인다. 달링턴 홀은 이제 세상의 중심이 아니다. 스티븐스는 이제 그 중심을 통해 세계를 볼 수 없다.
게다가 세상 사람들의 말대로라면 그는 전쟁 유발에 중요한 책임이 있는 매국노를 아무런 성찰 없이 평생 동안 보살핀 일종의 부역자다. 그랬으니 주인의 품위가 집사의 품위를 결정한다는 그의 평소 신념에 따를 때 그의 마음이 편할 리는 없다. 여행은 그러므로 그에게 이 결여를, 이 산산조각 날 위기에 처한 삶을, 메우고 기워주어야 한다. 무엇들을 덧대고 이어 붙여서? ‘낮의 잔재들’ 그러니까 영광스러웠던 날들의 기억들이 재료다. 물론 목표는 소원 성취, 곧 각성 없는 영원한 잠이다.
던커크에서 죽은 내 아들의 방에서 주무세요
따라서 여행 중 그가 떠올리는 낮의 잔재들은 대체로 감동적이고 영광스럽다. 회고 (그러니까 낮의 잔재들로 누빈 퀼트 같은 꿈) 속에서 그는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단 한 조각의 사심도 없이 ‘신사’ 달링턴 경을 보필했다. 역시 평생을 ‘위대한 집사’로 살다가 죽은 자신의 아버지 윌리엄처럼…… 그 아버지가 죽는 순간 “네게 할 말이 있다”고 그를 부를 때조차 “지금은 바빠요. 내일 얘기하는 건 어떨까요”라고 답한 이가 스티븐스다. 그는 실제로 바빴는데, 독일의 재무장을 논하는 유럽의 인사들이 연회장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에 틀림없는 켄튼 양이, 다른 이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며 그에게 마지막 손을 내밀 때도, “위층에 가봐야 하오. 아주 중대한 모임이 있소”라고 말한 이가 그다. 정직한 그는 역시 실제로 바빴는데, 위층에서 독일 대사와 영국 총리와 달링턴 경이 비밀회담을 열고 있었기 때문이다(곧이어 방에서 들리는 켄튼 양의 서러운 울음소리, 돌아오는 길에 그 소리를 듣고 문을 열고 들어간 스티븐스가 입을 연다. “말할 게 있는데. 창고 청소를 어린 하인에게 좀 시켜주시겠소?”).
단 한 치도 흐트러짐 없이 임무를 수행한 집사의 기억이 복원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의 꿈은 소원을 성취한 것일까? 그렇다하기엔 그가 꾼 꿈은 너무 허술해서 차라리 소원을 성취하기는커녕 그것을 조롱하는 악몽에 가까워 보일 때가 많다.
잠깐 들른 상점의 주인이 묻는다. “거기 달링턴 경이라는 나치가 살았었죠?”(물론 스티븐스는 지금의 주인은 미국인이고 자신은 그 전 주인은 모른다고 부인한다). 또 선술집에서 만난 해리 스미스란 사내가 그의 면전에서 이런 말을 한다. “영국 남자들이라면 다 신사라고 할 만하지. 영국에서 태어난다는 건 자기 의견을 피력할 권리와 대표자 선출권을 가진다는 특권이 있소. 그래서 나치와 싸울 수 있지.”(스티븐스는 단 한 번도 주인 앞에서 자기 의견을 피력해 본 적이 없음을 오히려 자랑스러워해 왔다. 저 말에 따를 때 그는 절대 신사가 아닌 셈이다). 달링턴의 대자(代子) 칼라일의 말은 더 독하다. “자네는 눈 뜬 장님인가?”(그는 훗날 독일과의 전쟁에서 죽게 된다. 바로 자신의 대부에게 큰 책임이 있는 그 전쟁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묵을 방을 안내해 주면서 선술집 주인장(테일러)이 하는 말이다. 그 방은 “던커크에서 죽은 장남”의 방이다. 그 방에서, 그 청년의 사진들이 여전히 놓여 있고, 그가 입었던 옷들이 여전히 걸려 있는 그 방에서 스티븐스가 자야 한다. 이것은 소원 성취의 꿈인가, 악몽인가?
아버지 제가 불타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으세요?
짐작건대 그 밤에 스티븐스가 꿈을 꾸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 유명한 ‘불타는 아이의 꿈’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어떤 부인 환자가 들려주었고, 프로이트가 기록했다가(<꿈의 해석> 일곱번째 장), 라캉의 ‘세미나’(<세미나 11>)로 유명해진 이 꿈 속에서, 소원 성취의 꿈은 순식간에 ‘투케’(La Tuché: 실재와의 조우)를 실현한다.
오래 앓던 아이가 죽은 밤, 늙은 노인 시중에게 시신을 지키게 하고 옆방에서 잠이 든 아버지가 꿈을 꾼다. 꿈속 아이가 침대 곁으로 다가와 그의 손을 잡고 묻는다. “아버지 제가 불타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으세요?” 물론 프로이트는 이 악몽 역시 수면을 연장하기 위한 소원 성취의 꿈이라고 단정 짓는다. 왜냐하면 바로 그 순간 죽은 아이는 꿈속에서 살아 있기 때문이다. 꿈에서, 일어나면 아이의 죽음을 다시 확인하게 될 아버지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라캉의 말은 다르다. 아이가 살아난 것은 소원 성취라 치자. 그러나 이 꿈이 소원 성취라면 아이가 뱉은 그 참담하고 슬픈 말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바로 그 말 때문에 그는 소스라쳐 깨어났고 현실로 돌아온다. 그럴 때 꿈은 어디를 지시하는가? 꿈이 말해주는 진실, 그러니까 바로 자신이 아이의 죽음과(부자 관계의 오래된 신화가 지시하듯이), 화재에 책임이 있다는 (밤을 지새울 능력이 없는 노인에게 시신을 맡김으로써) 진실 앞에서, 그는 차라리 꿈을 피해 현실로 돌아간 것은 아닌가? 아이의 죽음을 다시 확인하게 되더라도, 차라리 노인을 질타하고 급히 화재를 진압함으로써 책임감 있고 최선을 다한 아버지의 위치로 복귀하는 것이 꿈이 실현한 ‘실재와의 조우’가 주는 고통보다는 낫지 않을까? 라캉의 질문은 요컨대 이런 것이다. 우리는 현실을 피해 꿈으로 도망가는가? 꿈을 피해 현실로 돌아오는가?
그렇다면 던커크에서 죽은 청년의 방에서 하루를 묵은 후, 다시 만난 켄튼 양(이제는 벤 부인)이 그에게 던진 이 질문은, 스티븐스에게는 차라리 고문 같았으리라. “당신이 기다리는 건 뭔가요?” 기억의 보상을 기대했던 여행에서 그는 되레 자신의 전체 삶에 구멍이 나버렸음(대저택에 난 구멍!)을 확인했다. 소원 성취로 시작한 꿈이 투케를 준비해 두고 있었던 셈이다. 자 이제 그는 여전히 현실을 피해 꿈(설사 악몽일지라도)을 계속 꾸어야 하는 것일까? 꿈이 가리키는 고통스런 진실을 피해 다시 현실(대저택의 집사)로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 위대한 집사의 대답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스티븐스는 말한다. “달링턴 저택으로 돌아가서 빨리 하인들 문제를 해결하는 거요. 맞소. 난 항상 일하고 또 일하고 앞으로도 그럴 거요.” 그는 불타는 아이의 아버지처럼 꿈에서 깨어나 다시 충실한 집사가 되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아무래도 투케는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쾌락원칙의 입장에서는 불쾌이니까……
비둘기, '데우스엑스마키나' 혹은 날아다니는 가축
그러나 비둘기 한 마리에 대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여행에서 돌아온 달링턴의 저택, 아니 이제 루이스의 저택에 ‘신사도’를 벽에 거느라 하인들이 북적거린다. 이제 다시 직무로 돌아온 스티븐스가 주인과 인사를 나누는데, 느닷없이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든다. 이 생뚱맞은 ‘데우스엑스마키나deus ex machina’가 영화의 결말을 모호하게 한다(소설의 결말은 달랐다. 스티븐스는 물론 다시 복귀하지만 그가 바닷가에서 우는 장면이 먼저다. 그리고 ‘농담’에 대해 말한다. 감정이 생긴 셈이다).
천장의 유리에 몇 번 부딪히고 내려앉은 비둘기를 미국인 루이스가 손으로 잡아 창문 밖으로 날려 보내준다. 이 뻔한 상징 속에서 물론 비둘기는 새장 안의 스티븐스다. 이어지는 ‘버즈 아이 뷰’. 카메라는 새처럼 자유롭게 대저택을 벗어나 하늘로 날아오른다. 이 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돌아온 집사와 풀려난 비둘기…… 집사의 몸은 저택에 있지만 이제 그 영혼은 자유롭다? 영혼은 비상을 꿈꾸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새장 속에 갇혀 있다?
물론 해석은 관객들 각자의 몫이다. 다만 나로서는 저 관대한 주인 루이스를 연기한 배우가 바로 크리스토퍼 리브, 그러니까 원조 ‘슈퍼맨’이었다는 사실, 그가 이 저택에서 열렸던 비밀 회담에서 강조했던 것이 바로 호모이코노믹스들의 미덕 ‘프로 정신’(아마추어 신사도가 아니라)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물려받은 거대한 유산으로 이 저택과 ‘신사도’를(실은 스티븐스까지) ‘사들였다’(일괄 구매)는 사실은 지적해두어야 공평할 듯싶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비둘기는 요즘 하는 꼴로 미루어보건대 더 이상 자유나 평화의 상징이 아닌 것 같다는 말도 덧붙인다. 이 조류는 이제 그저 날아다니는 가축으로 보여서 점점 닭과 구분이 되질 않는다.
저자 | 김형중
1968년 광주에서 태어나 전남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문학동네신인상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평론집 《켄타우로스의 비평》 《변장한 유토피아》 《단 한 권의 책》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후르비네크의 혀》 등과 에세이 《평론가 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가 있으며, 소천비평문학상(2008), 팔봉비평문학상(2017)을 수상했다. 현재 조선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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