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리시맨> /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

11월 셋째주 개봉작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두 작품이 있다. 마틴 스코세이지와 넷플릭스가 만난 <아이리시맨>과 영화를 완성하고 스스로 세상을 놓은 故 후보 감독의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다. 각각 3시간 29분, 3시간 54분 동안 진행되는 영화다. 3시간을 넘길 정도로 긴 영화라면 제 작품을 향한 감독의 결단이 따르는 법. 기나긴 러닝타임이 결코 아깝지 않을 영화적인 경험을 안겨주는 명작들을 소개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대부> 시리즈, <반지의 제왕> 시리즈,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포함되지 않은 리스트다.


인랜드 엠파이어

Inland Empire

2006, 3시간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로 ‘21세기의 영화’를 열어젖혔다는 찬사를 이끌어낸 데이빗 린치는 난해한 서사와 이미지로 꿈을 유영하는 듯한 감상을 안기는 방향을 밀어붙인 <인랜드 엠파이어>를 발표했다. 할리우드 스타 니키(린치와 <블루 벨벳> <광란의 사랑>을 작업한 로라 던이 연기했다)가 출연하길 간절히 원했던 영화에 캐스팅 된 후 기묘한 상황에 빠져든다는 시놉시스가 전하는 정보 값은 린치가 직접 촬영하고 편집한 <인랜드 엠파이어> 속 모골이 송연해지는 이미지들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 아주 좋은 의미로, 3시간 동안 버티는 게 도전과도 같은 영화적 경험을 안긴다.


중국 여인의 연대기

和凤鸣

2007, 3시간 4분

왕빙은 홀연히 나타났다. 중국 셴양시 철서구의 일상을 9시간이 넘는 분량에 담은 다큐멘터리 <철서구>(2003)를 들고서. 이번 기획에서 소개할 작품은 <철서구> 이후 4년 만에 내놓은 <중국 여인의 연대기>다. 184분. 전작의 1/3분량에도 미치지 않은 러닝타임이지만, <중국 여인의 연대기>는 단 여섯 개의 숏으로 이루어졌다. 왕빙은 그저 듣는다. 단 한 장면의 자료화면 없이 허펭밍이라는 노년 여성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경청한다. 문화대혁명 시기 체제에 우파라는 누명을 쓰고 온갖 박해를 당한 지난 세월을 담담히(다만 그 내용은 아주 참혹하다) 들려주는 사이, 해는 기울어 집 안이 완전히 어두워지면 노인은 불이 켜서 다시 이야기를 이어간다. 허펭밍이 경험한 박해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는 왕빙이 작년 발표한 8시간 15분 분량의 다큐멘터리 <사령혼: 죽은 넋>으로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잔느 딜망

Jeanne Dielman, 23 quai du Commerce, 1080 Bruxelles

1975, 3시간 21분

벨기에의 시네아스트 샹탈 아케르망의 <잔느 딜망>은 페미니즘 영화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싱글맘인 주인공 잔느 딜망이 사는 집 주소가 제목인 영화는 잔느가 부엌에서 요리나 설거지 등 가사노동을 하고, 거실에서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침실에서 매춘을 하는 3일을 그린다. 201분 내내 지극히 건조하게 잔느가 집 안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과정 끝에 맞이하는 결말은, 주부에게 가해지는 억압이 켜켜이 쌓여 마침내 터져버리는 결과처럼 보인다. 아케르망은 리얼타임인 것처럼 진행되는 <잔느 딜망>을 시간이 흐르는 걸 느끼게끔 연출했고, 이 영화를 보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말하는 건 칭찬이 아니라고 밝힌 바 있다.


말콤 X

Malcolm X

1992, 3시간 22분

철저히 흑인 사회에 초점을 맞춘 <똑바로 살아라>(1989), <정글 피버>(1991) 등을 연달아 성공시키며 80년대 말 90년대 초를 주름잡았던 스파이크 리가 활약하던 흑인 인권 운동가 말콤 X의 삶을 영화로 만드는 건 당연해 보였다. 온건한 노선의 마틴 루더 킹과 달리 급진적으로 '행동'을 외쳤던 말콤 엑스의 파란만장한 삶이 200분 동안 펼쳐진다. 일관된 톤으로 그의 삶을 열거하는 방식이 아닌, 그의 삶을 시기 별로 나누어 각각의 파트를 촬영 스타일을 달리해 연출했다. 백인을 흉내내며 마약과 여자에 탐닉하고, 감옥에 들어가 흑인이라는 정체성을 깨닫고, 메카 순례를 끝낸 후 세상의 중심이 되는 등 과정들이 저마다 다르게 펼쳐져 '미학'과 '오락'을 동시에 만족시켰다.


천국의 문

Heaven's Gate

1980, 3시간 39분

70년대 말 마이클 치미노는 마치 무적 같았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이들의 삶이 완전히 망가지는 걸 3시간에 걸쳐 그린 두 번째 영화 <디어헌터>(1978)는 제작비 대비 3배를 웃도는 흥행을 기록하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다. 치미노의 승승장구는 오래가지 못했다. 19세기 말 와이오밍 주에서 벌어진 존슨 카운티 전쟁을 영화로 만든 <천국의 문>은 애초 어마어마한 물량 공세와 수많은 촬영 횟수 등 치미노의 고집스러운 연출을 감당하다가 애초 계획된 바보다 4배가 불어난 4400만 달러를 들여 완성됐다. 그리고 그에 10%에도 못 미치는 350만 달러를 거둬들였다. 하지만 세계영화사를 대표하는 '저주받은 걸작'으로 손꼽히는 <천국의 문>은 '저주'보다는 '걸작'에 방점이 찍혀야 마땅할 만큼 아름답다. 다행히 치미노의 필모그래피는 계속 이어졌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러닝타임은 계속 짧아졌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牯嶺街少年殺人事件

1991, 3시간 57분

1960년대에 들어선 대만.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는 경제개혁을 빌미로 독재 정치를 밀어붙였다. 사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제목은 그 자체로 스포일러다. 14살 소년 샤오쓰(장첸)의 가족들의 삶이 야만적인 시대에 할퀴어져 점점 부서지고, 결국 샤오쓰가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걸 4시간에 육박하는 시간 동안 천천히 보여준다. 이 순해 빠진 소년이 완벽하게 무너지기 위해선 그만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듯 느릿하고 꼼꼼하게( 종종 흘러나오는 라디오 방송의 멘트조차도 복선으로 작동한다) 진행된다. 여름의 넉넉한 햇볕보다는 우기의 축축한 공기가 더 어울리는 배경은, 대만 뉴웨이브의 선두주자 에드워드 양이 완벽하게 구성한 이미지와 빛을 통해 구현됐다.


해피 아워

ハッピーアワー

2015, 5시간 17분

하마구치 류스케는 2010년대를 마무리하는 현재 일본영화계에서 가장 빛나는 이름이다. 작년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아사코>로 전세계 눈 밝은 관객들을 매료시킨 그가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2015년작 <해피 아워>부터였다. 30대에 접어든 네 명의 친구가 각자 삶에서 눈덩이처럼 불어난 문제를 대면하고 그걸 헤쳐가는 걸 진득히 지켜본다. 동일본 대지진 피해지역에서 만든 일련의 다큐멘터리들을 연출한 하마구치 감독은 연기 경력히 전무한 배우들의 육체를 빌려 재앙과도 같은 위기에 직면한 사람들의 숨결을 영화에 새겼다. 제 아무리 기술이 발전한대도 결코 구현해낼 수 없는 영화적인 에너지가 <해피 아워>에 있다.


카를로스

Carlos

2010, 5시간 34분

육중한 러닝타임의 영화는 (완성도와는 별개로) 느리고 지루하다는 선입견이 따르기 십상이다. 한국 관객에겐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2014)와 <퍼스널 쇼퍼>(2016) 등으로 친숙한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프랑스의 채널 '카날+'을 위해 만든 TV 영화 <카를로스>는 철저히 예외다. 1970년대 악명을 떨쳤던 베네수엘라 출신의 테러리스트 카를로스 더 자칼의 흥망성쇠를 바탕으로 한 이 역작은, 자본과 제국주의에 대항해 무장 투쟁에 헌신하는 시기와 결국 자본에 의해 몰락하는 시기,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진행된다. 특히 카를로스가 명망 있는 테러리스트로서 성장하는 전반부는 첩보물 속 작전의 엑기스를 담았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위험한 스릴을 선사한다.


사탄탱고

Sátántangó

1994, 7시간 12분

헝가리의 아티스트 벨라 타르는 <파멸>(1988) 이후 6년의 침묵 끝에 432분의 대작 <사탄탱고>를 발표했다. 스스로를 "지옥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독자들을 위한 작가 같다"고 칭한 헝가리의 대문호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가 직접 자기 소설을 각색했다. 해체된 집단농장에 남아 가난을 버티며 살아온 사람들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한 사내가 돌아온다는 걸 알고 희망과 두려움에 휩싸인다. 안개 자욱한 흑백화면 속에서 11분간 느리게 소 떼를 따라가면서 문을 여는 <사탄탱고>는 그렇게 느리게 마치 정물 같은 사람들의 건조한 '움직임'을 긴 호흡으로 우두커니 지켜본다. 탱고의 스텝(전진 6, 후진 6)을 따라 구성된 총 12개 파트는 절멸로 향해가는 길에 다름 아니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