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아파로, 짐 스탈린의 <배트맨: 가족의 죽음> 표지
전화 한 통이면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1988년, DC에서 배트맨 담당 편집장이었던 데니 오닐은 편집회의 때 독자들이 스토리에 직접 참여하는 기획을 아이디어로 내었다. 당시에 도입됐던 1-900 ARS 전화를 이용해서 독자들이 직접 스토리의 방향을 정하게 하자는 참신한 기획이었다. 그의 아이디어는 만장일치로 통과됐고, 이것이 중요한 이벤트로 알려져야 한다는 것에 모두 동의했다.

당시 배트맨의 사이드 킥 캐릭터 '로빈'은 제이슨 토드라는 소년이었다. 1940년부터 배트맨의 단짝으로 활동하던 1대 로빈인 딕 그레이슨의 뒤를 이은 2대 로빈으로 활약하던 때였다. 그런데 이 소년 캐릭터는 딕 그레이슨이 다른 슈퍼히어로 그룹인 틴 타이탄스에서 나이트 윙으로 활약하게 되는 설정 때문에 생긴 '로빈'의 공석을 메꾸기 위해 편집부에서 거의 급조한 인물이나 다름없었다.

제이슨의 외형은 거의 1대 로빈과 판박이었다. 그나마 변별력을 두기 위해 1대 로빈보다 더 반항적이고 과격한 성격의 거리에서 성장한 인물로 설정했다. 그는 의외로 독자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작가들도 대본을 쓰는 데 애를 먹는, 방향을 잘못 설정한 캐릭터였던 것이다.

이 골칫거리 캐릭터를 "죽이자"는 것은 데니 오닐의 아이디어였다. 당시 사장인 자넷 칸을 포함한 모두가 이에 동의해 로빈에게는 잠정적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스토리는 4부작으로 기획되었고, <가족의 죽음(Batman: A Death in the Family)>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3부에 해당했던 <배트맨> 427호 맨 뒷면에는 전설로 남게 된 ARS 광고가 실렸다.

“로빈은 복수를 원하는 조커의 손에 죽게 됩니다. 하지만 당신이 전화 한 통으로 그를 살릴 수 있습니다”라는 카피, 그리고 1-900 전화번호와 함께. 이제 그를 살리고 죽이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었다.


실제 코믹스에 삽입됐던 당시 독자 참여 ARS 광고

박빙의 승부

DC의 총 편집장 딕 지오다노는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득표율로 독자들이 로빈을 살려낼 것이라 생각했다. 그와 반대로 아이디어를 냈던 데니 오닐은 엄청난 표 차이로 로빈이 죽음을 맞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어쨌든 두 사람 모두 로빈의 운명 결정에 참여하는 전화가 수만 통은 올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둘 다 틀렸다. 일단 ARS 참가 전화는 실망스럽게도 1만여 통 정도밖에 오지 않았고, 의외로 박빙의 승부였다.

결과는 5271 대 5343. 불과 72표의 차이로 반항기 많은 거친 소년 제이슨 토드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배트맨: 가족의 죽음> 426-429호 각 이슈별 표지

끔찍한 죽음과 여파
제이슨 토드의 죽음이 묘사되는 만화 속 한 장면. (사진 출처: DC 위키아)

<가족의 죽음> 기획에 참가한 사람들은 데니 오닐, 짐 스탈린, 짐 아파로였다. 전부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소재와 묘사로 유명한 작가들이었다. 심지어 책의 표지를 그린 사람도 나중에 <헬보이>로 유명해지는 작가 마이크 미뇰라로, 그 역시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ARS 결과는 차치하더라도 사실 이러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기획에서 로빈이 살아남는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일단 사형 선고가 내려지자, DC의 애물단지였던 제이슨 토드는 조커의 손에 의해 필요 이상으로 끔찍한 죽음을 맞게 된다.

당시 대중은 지금의 심의 기준으로 봐도 매우 폭력적인 로빈의 죽음을 생각보다 좋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슈퍼 히어로의 죽음이 연중행사처럼 흔한 일이 되어 버린 현재와 달리, 1980년대 당시에만 해도 이는 거의 뉴스에 실릴 정도의 이벤트였다. 실제로 로빈의 죽음은 USA 투데이와 월스트리트 저널 등에도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만화책 애독자가 아닌 일반 대중은 당연히 이번에 죽은 로빈이 1960년대 영화와 시트콤으로 널리 알려졌던 그 로빈인 줄 알았다. 때문에 편집국에는 (어린 소년 캐릭터를 참혹하게 죽이는 묘사에 대한) 항의 편지가 쇄도하였고 각종 매체들은 만화의 폭력성을 재조명하는 내용을 내보냈다. 데니 오닐은 갑자기 여기저기서 이름이 언급되는 나쁜 사람이 되어버렸고, 편집국에서는 한동안 그의 이름을 간행물에서 뺄 정도였다.

영원한 죽음이 매우 드문 일인 미국 만화의 관례상 제이슨 토드는 다시 살아나 현재에도 잘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가족의 죽음>에서 등장했던 그의 죽음과 관련된 스토리와 설정은 지금도 배트맨 전체 스토리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고 있다. 이후 발간된 수많은 다른 배트맨 스토리들과 만화 영화들 외에도, 2015년에 발매된 게임 <아캄 나이트>에도 로빈의 죽음은 주요 모티브로 다뤄진다. 최근작인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도 이 스토리를 넌지시 언급하고 있다.

제이슨 토드의 죽음은 우울하고 폭력적인 내용이 자연스럽게 다루어지던 1980~90년대 만화의 유물처럼 앞으로도 계속 기억될 것이다.


그래픽 노블 번역가 최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