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그런 사람이 있을 것 같다. 자주 만나진 못하지만 가끔 생각나는 그런 친구. 나 역시 그런 친구가 몇 명 있다. 며칠 전 그런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와 난 학부와 대학원을 같이 다녔다. 세상에 ‘좋은’ 대학원 지도교수따위 존재할 리 없는지라 그 친구와 나도 꽤 고생을 하면서 연구원 생활을 했었는데 허름한 연구실 구석에서 책상을 나란히 하고 앉아서 실험을 하고 보고서를 쓰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며 보낸 시간들이 눈에 선하다. 솔직히 신이 있어 나를 20대 시절로 돌아가게 해 줄 수 있다고 해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될 정도로 즐겁지 않은 시간들이었지만 그래도 그런 시간을 같이 견딘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늘 생각한다.
생을 되돌린다면 어떨까, 과거로 다시 돌아가면 어떻게 살까, 그런 생각을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건 아마도 지나간 세월에 대한 후회와 더불어 늙어가는 내 몸과 마음이 아쉬워서일 거라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들이 아마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는 영화를 만드는 단초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작품이다. 소설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소설의 분위기와 영화의 분위기는 꽤 많이 다른데 오히려 좀 늦게 출간된 <막스 티볼리의 고백>이라는 소설이 영화 내용적인 측면에서 원작 소설보다 더 비슷한 편이다.
주인공 벤자민은 영화 제목 그대로 시간을 거꾸로 살아간다. 노인의 몸으로 태어나 시간이 지날수록 젊어지는 신체의 그는 친아버지 손에 의해 버려진 후 양로원을 운영하는 양부모 밑에서 자란다. 노인의 몸으로 태어난 벤자민은 어린 시절을 즐길 기회도 없었고, 한참 연애를 할 시기에 충분하게 사랑을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살던 벤자민을 우연히 만나게 된 벤자민의 친아버지가 그를 술집으로 데려가 같이 술을 마신다. 사제락(Sazerac)이란 칵테일이다.
사제락이란 칵테일은 미국에서 오래 전에 만들어진 클래식 칵테일로 뉴올리언즈주의 공식 칵테일이다. 처음에는 브랜디를 사용해 만드는 방식이 보편적이었으나 이후 미국의 라이 위스키(Rye whiskey, 호밀로 만든 위스키)를 사용해 만드는 방식이 대유행하면서 공식적인 레시피가 되었다. 칵테일 역사상 가장 오래된 칵테일 중 하나이다.
만드는 방법은 술에 설탕과 물, 비터즈(여러 약초 등을 주정에 녹여내어 약용하기 위해 만든 술. 현재는 칵테일에 양념처럼 쓰인다)를 넣어 만드는 클래식 칵테일의 제법을 그대로 따른다. 먼저 압생트(Absinthe)를 잔에 소량 넣은 후 잔 안쪽에 골고루 묻혀서 향을 입힌 후 남은 압생트를 따라낸다. 그 잔에 설탕을 넣어(대개는 각설탕을 으깨어 사용한다) 그 위에 페이쇼드 비터즈를 뿌린 후 아주 약간의 물을 넣어 잘 녹인 후 라이 위스키를 넣어 마신다.
영화 속에서 벤자민의 아빠가 굳이 사제락을 시켜 마신 것은 그 당시 뉴올리언즈 상류계급이 가장 많이 마셨던 칵테일이기도 하지만 미국 남부 특유의 고지식한 문화를 상징하는 한 수단으로 칵테일을 등장시킨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또한 유럽에서 악마의 술이라고도 불렸던 압생트를 사용한 칵테일이라는 점에서 인생의 여러 부분을 드라이하게 보여주는 이 영화와 아주 잘 어울리는 칵테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달콤하면서 씁쓸한, 거기에 매혹적이면서도 거부감이 드는 풍부한 향까지, 그야말로 우리네 인생 같은 칵테일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벤자민이 어려지는 몸을 가졌다는 걸 제외하면 성장영화의 이야기를 그대로 따르는데 벤자민의 첫 친구였던 피그미족 남자는 벤자민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다. “너도 고독해질 걸. 달리 살아본들 마찬가지야. 비밀을 알려줄까? 뚱보건 말라깽이건 꺽다리건 백인이건 다 고독해. 당혹스런 노릇이지.” 그 말대로 그는 우여곡절 끝에 아내를 맞고 아이를 낳지만 어린 딸을 오랫동안 지켜주지도 못한다. 그렇게 남들이 늙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어려지다가 갓난아기의 몸으로 죽는다.
맞는 말이다. 누구든 특별한 인생을 꿈꾸지만 누구나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오히려 어느 한도 이상의 비범함은 마치 벤자민이 그랬듯 그 사람의 행복에는 방해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 누구든 고독하고, 누구든 평범하고, 누구든 불행한 것이 삶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고, 영화에서 계속 등장하는 벼락을 7번 맞은 할아버지처럼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삶을 살게 된다.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그 순간 순간을 사랑해야만 한다. 이 영화는 그런 메시지를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전달한다.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와 직장 이야기, 가족 이야기를 하다가 건강 이야기가 나왔다. 친구가 큰 수술을 했다고 한다. 나도 최근 1년여 동안 이런 저런 건강 문제를 겪었다. 그런 건강 이야기, 이제는 정말 나이가 많이 드신 우리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 삶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순간 좀 울적해졌다. 그래도 최대한 즐겁게 살아보자고 이야기하며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다음에 만나면 바에서 사제락을 같이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살아 보자구, ‘칭구’.
데렉 / 술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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