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렉트라'의 첫 등장. 이름 철자가 틀리게 표기되었다.

미국 만화에서 히어로나 빌런의 영원한 죽음은 없다고 하지만, 꼭 그러한 것은 아니다. 캐릭터가 죽었다는 사실이 정체성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마블 코믹스에서 1980년대에 만든 캐릭터 중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로 손꼽힐 만한 엘렉트라도 그러한 비운의 인물이다.


프랭크 밀러의
어둠의 자식

엘렉트라(또는 일렉트라)는 1981년 작가 프랭크 밀러의 손에서 탄생했다. 프랭크 밀러는 1980년대 미국 만화계에 어마어마한 족적을 남긴 작가이다. <다크 나이트 리턴스>, <배트맨: 이어 원>, <데어데블: 본 어게인> , <로닌> 등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만화’ 리스트 5위권 안팎으로 포진되어 있는 작품들은 전부 프랭크 밀러의 80년대 창작물들이다.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이 워낙 유명하긴 하지만, 많은 독자들은 프랭크 밀러의 최고 역작으로 그의 80년대 초중반 작품인 <데어데블> 연재분을 꼽는다.

느와르적 배경과 남성적 스토리, 개인이 상대하기 어마어마한 범죄세력에 대항해 외로이 홀로 맞서는 개인 등이 프랭크 밀러가 좋아하는 주제다. 그는 특별한 초능력도 없고 오히려 장님이라는 큰 핸디캡이 있는 히어로 데어데블을 통해서 그가 좋아하는 것들을 전부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고 한다.

그가 연재를 시작할 무렵, 데어데블은 어느 정도 인지도는 있었으나 판매량이 워낙 저조해 마블 사내에서도 마이너리그 급으로 분류될 정도로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허나 프랭크 밀러는 그를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수준의 범죄와 싸우는, 탐정 소설에 나올 법한 고독한 히어로로 탈바꿈시켰다. 팬들은 지금까지 다른 만화에서 볼 수 없었던 세련되고 깊이 있는 내용과 문체, 그리고 남성적인 그림체에 열광했다.

프랭크 밀러가 쓰고 빌 신케비치가 그린 미니시리즈 <엘렉트라: 어새신>. 마블에서 나온 그래픽 노블 중 걸작으로 꼽힌다.

호평 속에 <데어데블>을 연재 중이던 1981년 1월, 그리스 로마 신화에도 조예가 깊었던 프랭크 밀러는 아가멤논의 딸 엘렉트라에서 이름을 딴 여자 조연 캐릭터를 만들었다. 사실 원래부터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지금까지 이어오던 스토리가 끝난 시점에서 잠시 쉬어가는 호에 조연으로 등장시키는 정도의 분량을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랭크 밀러는 이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 이후에도 엘렉트라를 계속 등장시키게 된다.

엘렉트라에는 80년대에 프랭크 밀러가 심취해 있던 요소들이 전부 융합되어 있다. 일본의 정서, 삼지창, 무술의 달인, 닌자, 서구적이면서도 동양적 외모, 깊게 파인 동양적 의상, 강인한 여성상 등 80년대 프랭크 밀러의 작품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었던 요소들이다. 실제로 그는 현역으로 활동하던 여성 보디빌더를 모델로 삼아 엘렉트라를 만들었다고도 한다.

그리스 외교관이라는 비밀 신분을 가진 엘렉트라는 데어데블과 한 편이 되어 싸우기도 하고 그의 목숨을 노리기도 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둘은 결국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만, 그 시점에서 프랭크 밀러는 그녀를 데어데블의 숙적 불스아이의 손에 죽임을 당하게 만든다.

그녀는 암살자 집단 ‘핸드’에 의해 부활하지만, 몇 호 후에 데어데블과 다시는 영원히 못 만날 것임을 암시하고 그에게 아련한 기억으로 남겨진 채 떠난다. 그리고 실제로 엘렉트라는 1990년대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엘렉트라가
후대에 끼친 영향
<맨 위드아웃 피어>에서 엘렉트라의 모습

프랭크 밀러의 연재분에 등장한 데어데블과 엘렉트라는 이후 만화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케빈 이스트만과 피터 레어드라는 청년들이 자체 발간한 인디 만화 <틴에이지 뮤턴트 닌자 터틀즈>는 프랭크 밀러의 데어데블 연재분에 대한 직접적인 패러디이다. 특히 라파엘이 들고 있는 삼지창과 전원이 머리에 두르고 있는 두건은 엘렉트라에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엘렉트라는 2003년 <데어데블>, 2005년 <엘렉트라> 각각의 영화에 모두 등장했지만 팬들과 평단의 혹평을 받았다. 올해 공개된 넷플릭스의 <데어데블> 시즌2에서도 엘렉트라의 등장과 죽음을 전면에서 다루고 있는데, <데어데블>의 1980년대 연재분과 1994년 미니시리즈 <맨 위드아웃 피어>에서 묘사된 엘렉트라의 적절한 조합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제니퍼 가너가 엘렉트라를 연기한 영화 <엘렉트라>(2005)

엘렉트라는 지금은 예전 같은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프랭크 밀러의 젊은 시절에 탄생했다. 어쩌면 작가 프랭크 밀러는 그가 원하던 여성상을 엘렉트라를 통해 전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그는 엘렉트라를 절대 부활시키지 말라고 마블 사에 신신당부하였지만, 캐릭터의 소유권을 갖고 있는 마블 사는 그 후에도 그녀를 수 차례 부활시켜 여러 작품에서 활용했다.


그래픽노블 번역가 최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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