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헐크 호건과 워리어가 있었다. 둘의 대결이 펼쳐진 WWF 썸머슬램은 다른 그 무엇보다 중요한 관심사였고, 비디오가게에서 프로레슬링 비디오를 빌려보고 잡지를 읽으며 프로레슬러에게 열광했다. 프로레슬링이 ''라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각각의 캐릭터에 빠져들었고 워리어 근육 힘줄이 터져 죽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믿기도 했다.

임대호(송강호)에겐 김일과 천규덕이 있었다. 김일의 박치기, 천규덕의 당수, 여건부의 알밤까기에 열광했던 대호는 평범한 은행원이 됐다. 소년 시절의 영웅들을 까맣게 잊고 지내던 대호가 다시 프로레슬링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직장 상사인 부지점장 때문이었다. 실적도 낮고 늘 지각하는 임대호에게 돌아오는 건 부지점장의 강렬한 헤드락이다. 헤드락을 푸는 방법을 알기 위해 체육관을 찾은 그에게 관장은 반칙왕 캐릭터를 제안한다.

반칙왕 울트라 타이거 마스크가 되기 위해 장 관장의 딸 민영(장진영)의 지도로 혹독한 훈련을 하지만 사회에서 대호의 입지는 좁아져간다. 부지점장의 비인간적인 횡포와 친구 두식(정웅인)의 퇴사로 실제 생활에선 안 좋은 일만 계속되지만 링 위에선 새로운 열정을 발견한다. 은행원 대호는 회사와 집을 오가는 소심한 소시민이지만, 링 위에서만은 현실을 잊고 새로운 캐릭터와 함께 최고가 되려 한다.

유머와 연민이 함께 공존하는 영화. 송강호가 있기에 가능했다. '개인기'라고 해도 좋을 송강호의 연기는 웃음과 연민을 함께 전한다. 장진영, 신구, 장항선, 송영창, 정웅인, 박상면, 이원종, 김수로 등의 연기도 영화를 한층 더 빛나게 한다. 최고의 테크니션 레슬러라 불리는 유비오(김수로)와의 박진감 넘치는 혈투는 프로레슬링의 매력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영화에선 종종 비현실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강한 바람과 함께 신문지가 날리는 골목에서 우연히 프로레슬링 체육관을 발견하는 장면이나 동료 은행원 미스 조(김가연)에게 타이거마스크를 쓰고 고백하다 거절당하는 장면이 그렇다. 이 비현실적인 장면에서 장영규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어어부 프로젝트의 리더 장영규만큼 이 비현실에 꼭 맞는 음악가도 찾기 어렵다.

이때는 장영규, 또는 어어부 프로젝트의 역량이 절정에 달해있을 때였다. <, 럭키 스타><21C New Hair>라는 명반 사이에 자리한 사운드트랙이니만큼 앨범의 질()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반칙왕>이라는 영화의 성격을 단번에 드러내는 주제가 '사각의 진혼곡'이나 미스 조에게 거절당할 때 흘러나오는 이은하의 커버곡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만으로도 영화음악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 장영규가 만들어내는 소리들은 비록 편하진 않지만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백현진과 한대수의 목소리처럼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UhUhBoo Project - 사각의 진혼곡

장영규는 <반칙왕>의 영화음악 작업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사운드트랙 작업에 매진한다. <휴머니스트><복수는 나의 것>,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 같은 작업에서도 장영규의 색깔은 그대로 유지된다. 때론 기괴하고 불편하기도 하지만 번뜩이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반칙왕>은 가장 처음, 그리고 가장 짙게 장영규의 색깔이 드러난 영화음악이다.


김학선 / 대중음악 평론가

재밌으셨나요? 내 손 안의 모바일 영화매거진 '네이버 영화'를 설정하면 더 많은 영화 콘텐츠를 매일 받아볼 수 있어요. 설정법이 궁금하다면 아래 배너를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