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리메이크가 진행 중인 영화 <크로우>(1994)의 동명 원작은 1980년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던 인디 만화 출판사 중 하나인 캘리버 프레스에서 출간한 만화 시리즈이다. 작가는 당시 20대였던 제임스 오바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고아원에서 자란 그는 1970년대 말쯤 약혼녀를 만나게 된다. 운 나쁘게도 약혼녀는 결혼 전에 음주운전자에 의한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고아였던 그에게 약혼녀는 그만큼 더 소중한 존재였다. 우울감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그는 현실을 도피하려 해병대에 자원 입대한다. 약혼녀를 앗아간 무책임한 음주운전자에 대한 극심한 분노, 그리고 1980년대 말 만연했던 통제 범위를 벗어난 강력 범죄들에 대한 분노에 시달리던 그는 분노를 이길 방안으로 만화를 택한다. 복수의 화신이 가해자들에게 무자비한 처벌을 가하는 내용을 그림으로써 자신의 고통을 승화시키려는 방어 기제를 사용한 것이다.
<크로우>는 그렇게 탄생했다. 주인공은 여자친구와 차를 타고 가던 중 차 고장으로 서게 되는데, 인근에 있던 갱단들에게 여자친구가 무참하게 농락당하고 살해당한다. 그 모습을 뜬 눈으로 지켜본 주인공도 응급실에서 운명을 다하지만, 까마귀에 의해 불사에 가까운 몸으로 환생해 가해자들을 찾아다니면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부합하는 잔인한 복수를 감행한다.
만화는 1980년대 중반 인디 만화의 특성들을 다 갖추고 있다. 일본 망가에서 영향받은 시원시원한 패널 나눔, 흑백 컬러, 넘쳐나는 독설과 비속어들, 그리고 매우 과장된 폭력 장면들이 넘쳐난다. 작가는 아마 고스 컬처/음악을 좋아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주인공의 얼굴 화장이나 복장, 그리고 주변 인물들이나 배경이 전부 고스풍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각 챕터의 제목도 필자도 좋아하는 밴드 '조이 디비전'의 정규 1~2집 곡명을 차용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 제임스 오바는 이 만화를 본인의 우울감을 달래는 목적으로 그렸기 때문에 출간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7년이 지나고 난 후, 캘리버 프레스에서 그의 만화를 출간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였다. 제임스 오바의 무력감과 분노에 공감하는 독자층이 많아서였을까, 아니면 나름 큰 유통망을 갖고 있던 회사인 캘리버 프레스의 역량 때문이었을까? <크로우>는 인디 만화치고는 놀랍게도 전세계적으로 100만부에 가까운 판매부수를 달성하게 되고, <타임> 등에 아트 슈피겔만의 <마우스>와 함께 주목할 만한 인디/대체 만화로 소개되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게다가 작가 제임스 오바는 프랑스 앙굴렘 만화상까지 수상하니 자가 치유 목적으로 그린 만화치고는 괄목할 만한 성공을 이룬 것이다.
더 큰 성공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1994년 <크로우>가 브루스 리(이소룡)의 아들 브랜든 리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것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브랜든 리는 이 영화 촬영 중 프롭 총 오발 사고로 목숨을 잃고 영화는 그의 유작이 되었다. 시종일관 우울하고 음습한 톤을 유지하면서 뮤직비디오에 가까운 편집으로 스타일리쉬하게 연출된 폭력 장면들을 보여주는데, 만화의 내용과 분위기에도 나름 충실한 수작이었다.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받은 뒤 나온 후속작들은 금방 잊혀질 만한 내용들이었지만, <크로우> 자체는 컬트 클래식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
<크로우>의 사운드트랙도 굉장하다. 당시 인기있던 1990년대 그런지/고스 성향의 밴드들의 헌정곡들로 꽉 차 있다. 나인 인치 네일스는 앞에서 언급한 원작 만화에서 '조이 디비전' 노래들의 제목이 사용된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동 밴드의 인기 곡 '데드 소울스'를 커버하여 수록하였다.
최원서 / 그래픽노블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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