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음악을 빼놓고 이야기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소리가 없던 무성영화 시절에도 음악은 늘 존재해왔다. 애당초 영화를 상영하게 된 무대 자체가 희곡과 오페라를 걸던 극장에서 출발했으며, 영사기의 소음을 가리기 위해, 또 유령처럼 소리 없이 상영되는 영상에 생동감과 감정을 불어넣기 위해 음악이 라이브로 연주됐다. 매번 즉흥적으로만 연주할 수 없어 무성영화를 위해 연주될 레퍼토리 악보가 출판되었으며, 영상에 맞춰 연주자들은 애잔하거나 흥겹거나, 무섭거나 감미롭게 곡을 골라 관객들에게 들려줬다. 지금 그 흔적을 들을 순 없지만 영화음악의 역사는 사실상 영화의 탄생과 궤를 같이 한 셈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생상스는 1908년 <기즈 공의 암살>이란 무성영화를 위해 특별히 음악을 작곡했고, 이렇게 하나의 작품을 위해 동일한 음악을 극장에서 연주할 수 있게 따로 작곡가들이 고용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구스타브 홀스트나 에드문드 마이젤, 아르튀르 오네게르, 다리우스 미요 등 정통 클래식 작곡가들도 영화음악에 뛰어들었으며, 이는 영화음악이란 형식이 오케스트라를 기반으로 닦여지게 된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유성영화로 넘어오며 <재즈 싱어>의 알 존슨이 부른 노래가 관객들에게 깊은 잔향을 남겼고, 뒤이어 맥스 슈타이너의 <킹콩>이 나오며 비로소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 영화음악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평단과 관객 모두가 극찬한 본격 영화음악 다큐
맷 슈레이더 감독의 <스코어: 영화음악의 모든 것>은 이런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백년에 걸친 역사에 대해 따분하게 늘어놓지 않는다. 대신 쉽고도 간략하게 극장에 놓인 오르간 연주를 통해 영화음악의 탄생을 언급하고, 바로 관객들이 알고 있는 유명하면서도 다채로운 영화음악들을 영화 장면과 함께 보여주며 그 위대한 힘과 마력에 빠져들게 만든다. 지난 10월 19일 국내에서 소규모로 개봉했지만 평단과 관객들에게 조용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이 다큐멘터리는 할리우드에서조차 보기 드물게 영화음악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그간 가려져 있던 영화음악의 매력과 궁금증에 대해 속 시원하게 밝혀준다.
에미상을 수상한 바 있는 CBS뉴스 소속의 프로듀서 맷 슈레이더는 이 작품을 위해 오래 전부터 준비해왔으며, 2014년 가을 직장을 그만두고 나와 자신의 동료이자 친구 5명을 규합해 사비를 털어가며 촬영과 편집 장비를 마련했다. 모자란 제작비는 크라우딩 펀딩 사이트 킥스타터를 통해 4만불의 예산을 충당하려 했고, 한 달 만에 이를 3배나 초과한 12만불(약 1억 3천만원)을 모아 성공적으로 제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무려 60여명에 이르는 할리우드 최고의 작곡가들이 인터뷰에 응했으며, 제임스 카메론과 게리 마샬, 스티븐 스필버그 등 감독부터, 평론가 레너드 마틴, 심리학자 시우 란 탄, 영화음악 제작자 리차드 크라프트 등 다양한 업계 관계자와 전문가들의 생생한 발언을 통해 할리우드 영화음악에 대해 심층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특히나 한스 짐머를 위시해, 대니 엘프만, 퀸시 존스, 패트릭 도일, 엘리웃 골든탈, 데이빗 아놀드, 마이클 다나, 크리스토퍼 영, 마르코 벨트라미, 하워드 쇼어, 알렉산드르 데스플라, 레이첼 포트만, 브라이언 타일러, 베어 맥트레리, 조 크레이머, 해리 글렉슨 윌리엄스, 존 파웰, 존 데브니, 스티브 자브론스키, 정키XL, 트레버 라빈, 트렌트 레즈너, 크리스토퍼 벡, 데이빗 뉴먼, 헤이터 페레이라, 마크 마더스바우, 콘라드 포프, 조셉 트래패니스, 바빈 웨렌 등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영화음악가들이 직접 들려주는 작업 노하우나 생생한 레코딩 현장, 웃지 못 할 고충들과 작업에 대한 스트레스, 색다른 실험적인 면모들은 놀라움과 웃음, 감동과 정보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쉴 새 없이 흐르는 영화음악의 감동
여기에 짧지만 인상적으로 등장하는 영화음악들의 황금 라인업도 뛰어나다. 너무나 익숙한 고전들부터 최근 만들어진 작품들까지 상영시간 내내 쉬지 않고 흐르는 스코어들의 향연에 절로 리듬을 타게 되고, 따라 흥얼거리게끔 만든다. 위대한 음악에 대한 즉각적이지만 자연스런 반응이다. 그리고 그 곡들을 통해 영화음악의 기능과 효과를 설명하고, 역사적 의의와 산업적인 맥락을 집어준다. <록키>의 테마로 뛰어난 선율이 가지는 스토리텔링의 효과와 감정의 극대화를 체화시키고, <미지와의 조우> 클립과 <반지의 제왕> 테마로 영화음악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라이트모티브’에 대해 손쉽게 이해하게 만든다.
알렉스 노스가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에서 처음 시도한 재즈 선율의 도전에 놀라고, 존 배리가 밴드 음악적 색채를 가져와 스파이 음악의 기틀을 다졌던 ‘007 시리즈’ 음악에 경배하게 된다. 기타와 휘슬, 여성 보이스를 활용해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스파게티 웨스턴’ 사운드를 창출한 엔니오 모리꼬네와 <현기증>과 <싸이코>에서 전위적이고 강렬한 사운드를 선사해 영화의 임팩트를 극대화시킨 버나드 허먼의 천재성에 대해서도 방점을 찍어준다. 특히 <E.T.>를 통해 존 윌리엄스의 놀라운 스코어가 관객들에게 심리적으로 미치는 영향을 영화 클립과 함께 심리학자가 설명해주는 편집은 본 다큐의 백미로, 영화음악의 위력을 다시금 직접적으로 깨우치게 만드는 장면이다.
짧은 러닝 타임의 한계.
그러나...
물론 아쉬운 부분도 존재한다. 백년이 넘은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역사를, 또 수백 명에 이르는 영화음악가들의 모든 면모를 93분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 안에 다 담아낸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깊이나 디테일한 부분에서 놓치고 가는 점들이 더러 눈에 띈다. 제리 골드스미스와 존 윌리엄스, 대니 엘프만과 한스 짐머, 토머스 뉴먼과 트렌트 레즈너의 음악 세계에 대해선 조금씩 다루지만, 또 다른 할리우드 레전드급의 영화음악가인 미클로스 로자나 디미트리 티옴킨, 빅터 영, 프란츠 왁스만, 헨리 맨시니나 앨머 번스타인 등 황금기의 고전 작곡가들과 할리우드에서 활동했던 모리스 자르, 니노 로타, 랄로 쉬프린, 반젤리스, 조르지오 모르더 등 비영미권 작곡가들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활발히 활동하는 중견 작곡가 알란 실베스트리나 제임스 뉴톤 하워드, 카터 버웰이나 마크 아이샴, 살아있는 아카데미상 최다 수상자이기도 한 알란 멘켄, 현재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계승자라 할 수 있는 마이클 지아치노의 부재도 조금은 아쉬운 대목이다. 하지만 맷 슈레이더 감독이 밝혔듯 “TV와 영화, 게임과 애니 등을 오가며 작곡과 편곡, 연주와 녹음, 믹싱까지 여러 편의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는 영화음악가들과 스케줄을 맞추는 게 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공백이 충분히 이해된다. 수백 시간 분량의 촬영분을 모아 이처럼 놀랄 만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그저 찬탄과 박수를 보낼 뿐.
영화음악을 위한 영화음악
눈치 채긴 힘들겠지만 <스타워즈>, <슈퍼맨>, <인디아나 존스>, <죠스>, <쥬라기 공원>, <인셉션>, <다크나이트>, <소셜 네트워크>, <킹콩>, <석양의 무법자>, <록키>, <반지의 제왕>, <매드맥스>, <싸이코>, <아메리칸 뷰티> 등 쟁쟁한 영화음악들 사이로 이 다큐멘터리를 위해 라이언 타우버트가 작곡한 오리지널 스코어도 슬쩍 들린다. 주로 광고음악과 단편영화, TV와 블록버스터의 보조 음악을 작곡하던 그는 영화음악이 주는 감동과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로 짧지만 정서적인 울림을 던지는 큐들을 제공했다. 비록 15분에 불과하고, 반복된 곡도, 사용되지 않은 곡도 있지만 영화음악을 위한 영화음악으로 제대로 된 역할을 해낸다. 음악이 신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할 때와 영화의 가장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는 것도 그의 감동적이고 스펙타클한 음악이다.
영화가 끝난 뒤 크레딧이 오를 때 바로 극장에서 나가는 우를 범하지 말기를. 제임스 카메론이 2015년 세상을 떠난 제임스 호너의 음악에 대해 짧게 언급하는 쿠키가 있다. 영화 내내 거론되지 않았던 제임스 호너를 위한 깜짝 예우이자 헌사다. 제임스 호너가 직접 연주하는 타이타닉의 피아노 선율과 함께 <스코어: 영화음악의 모든 것>에 투자해준 전 세계 43개국 1827명의 후원자 리스트도 공개된다.
사운드트랙스 / 영화음악 애호가
재밌으셨나요? 내 손 안의 모바일 영화매거진 '네이버 영화'를 설정하면 더 많은 영화 콘텐츠를 매일 받아볼 수 있어요. 설정법이 궁금하다면 아래 배너를 눌러주세요.










댓글 (0)
댓글 작성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로그인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