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나 유효성도 갖지 않는 것들에 대한 절대적이고 개인적인 애착이야말로 초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들이 반복해 묘사해 온 테마 중 하나일 것이라고 일본의 평론가이자 음악가인 오타니 요시오는 말한 바 있다.
 
예를 한번 들어보자. 죽은 친구를 잊지 않기 위해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동전에 구멍을 뚫어 열쇠고리로 만들려고 공방에 부탁했는데 공방에서 그 동전을 잃어버리고 말아 똑같은 다른 동전으로 열쇠고리를 만들어 줬다면 과연 그것은 열쇠고리를 만들어달라고 말한 사람에게 어떤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 (사실은 이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피소드다.)
 
그래서 인간은 무작정 주관적일 수도, 또 객관적일 수도 없다. 상대방을 대할 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면 사람 간 문제의 80% 이상은 해결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이유기도 하다. 더도 덜도 아닌 80% 정도.
 
이렇게 어떤 객체에 대한 가치판단은 객관적이어야 하지만 또 왕왕 주관적이어서 어느 누군가에겐 아무 가치도 없는 것들이 다른 누군가에겐 큰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술의 세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객관적으로는 암만 좋게 봐줘도 좋은 술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들도 사람에겐 큰 의미를 갖곤 하는데 단적으로 술을 한 번이라도 입에 대본 우리나라 사람들 중 소주에 대한 추억이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런 술들은 객관적인 가치와는 관계없이 개인의 정서와 맞물리며 가치를 갖게 된다.
 
조금 아쉬운 것은 우리나라의 술 문화가 아무래도 다양한 편이 아니다 보니 정서적인 연결고리를 가지는 술이 소주로 집중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가까운 일본만 해도 일상 속에서 상당히 다양한 술을 마시는 터라 일본 친구들과 술 이야기를 하다 보면 꽤나 다양한 술과 추억이 결부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어떤 경험이든 기억에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첫 경험일 것이고 그러다 보니 개인의 추억들도 처음 마신, 혹은 그 누군가와 처음 마셨던, 이야기해보면 그런 추억들이 많은데 재미있게도 일본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이 술이 꽤 자주 등장한다. 바로 매실주.
 
혹자는 동네 술가게에서 아버지가 사다 놓은 술을 몰래 맛봤더니 맛있어서 조금 마셨다가 대취했던 이야기, 또 다른 사람은 집 마당에서 키우던 매화나무가 열매를 맺으면 그 열매를 모아서 집에서 담금주식으로 술을 담가 마셨던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해 줬던 기억이 난다. 마치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네 자매처럼.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요시다 아키미가 그린 원작 만화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영화화해 만들었다. 출연진도 쟁쟁한데 그 유명한 나가사와 마사미를 비롯해 아야세 하루카, 카호, 히로세 스즈가 네 자매로 출연했고 영화의 평도 좋아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까지 진출했으며 2015년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는 15년 전 가족을 버리고 도망친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며 시작된다. 부고를 받은 세 자매는 장례식장으로 향한다. 오래전 헤어져 이제는 기억조차도 잘 나지 않는 사람의 장례식이라는 건 암만 아버지라고 해 봤자 무미건조하고 슬픔도, 감흥도 없게 마련이다.
 
그렇게 간 장례식장에서 세 자매는 마치 오래전 그들같이 지금 몸과 마음을 둘 곳을 아버지의 사망과 동시에 잃어버린 배다른 동생 스즈(히로세 스즈)를 만난다. 장례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역에서 세 자매는 스즈에게 같이 살겠느냐는, 가족이 되겠느냐는 제안을 하고 스즈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며 영화는 세 자매가 아닌 네 자매로서의, 가족으로서의 틀을 갖추게 된다.

영화의 얼개는 자칫 막장드라마가 되기 십상인 구조이지만 히로카즈 감독 스타일이 스타일인지라 영화는 그냥 네 자매의 평범한 삶을 조용히 이야기한다. 도쿄 근처의 작은 바닷가 마을인 가마쿠라의 풍광은 이런 영화적 분위기를 정말 잘 살려내고 있다.

가마쿠라의 다른 풍광도 좋지만 특히 네 자매가 살고 있는 집은 영화 속에서 그들의 안식처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데 집 앞뜰에서 자라는 매화나무의 열매인 매실을 따서 씻은 뒤 매실주를 함께 담그는 모습이 특히나 아름답게 그려진다. 시간과 더불어 숙성된 매실주를 마시며 네 자매 역시 시간과 더불어 진짜 가족이 되어간다.

영화에 네 자매의 화합을 상징하는 주요한 매개로 등장하는 매실주는 소위 담금주로 불리는 술로 매실을 설탕과 함께 도수가 높은 술에 담가서 만든다. 보통 가정에서 만들 때는 담금주용으로 판매하는 고도수의 소주(대개는 30도이다.)를 사용해서 만드는데 전문 업체에서는 소주의 원료인 주정에 침전시킨 후 숙성시켜서 생산하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소주가 싸서 보통 소주를 사용하지만 일본에서는 보드카나 과실주를 만들 때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싼 브랜디(숙성하지 않은 것)을 사용하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단맛을 내기 위해 설탕이나 기타 당류를 사용하는데 특히 잘 숙성된 매실주는 그야말로 새콤달콤하게 맛있어서 긴장 풀고 마시다가는 자칫 만취하기 십상이니 조심하시길. ^^
 
술을 분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큰 기준은 3개의 큰 분류로 나누는 것이다. 당류나 곡식류를 발효시켜서 만드는 양조주, 양조주를 다시 증류해서 만드는 증류주, 그리고 양조주나 증류주, 혹은 주정에 다른 재료를 넣어 섞거나 해서 만드는 술은 모두 리큐르 칭한다. 소주나 담금주 종류가 단적으로 모두 리큐르 종류라고 보시면 되겠다.
 
짐작하시겠지만 국제 기준으로 보면 양조주나 증류주에 비해서 리큐르가 상대적으로 박한 평가를 받고 고급술이라고 일컬어지는 술들 역시 양조주 아니면 증류주에 한한다. (언필칭 비싼 술로 알려진 술들이 대부분 와인이나 위스키, 코냑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싸잡아 이야기하기는 어렵겠지만 대개의 리큐르는 저급 술이라고 말해도 무리는 없다. 단적으로 주정에 각종 감미료, 그리고 물을 첨가해 만든 소주가 빈말으로라도 고급술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매실주가 리큐르라서 가치 없는 술이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가족이 모여서 직접 매실을 손질하고, 통을 소독해서 열매를 담고, 설탕을 넣고 술을 부어 넣어 숙성시킨 뒤 함께 마시는 술의 가치는 다른 사람이 절대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주도 마찬가지, 개인적으로야 소주를 좋아하지 않고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마시지도 않는 편이지만 소주에 얽힌 추억들이 몸에 알알이 남아 소주가 좋은 사람에겐 소주가 지상 최고의 술일 것이다.

절대적이고 개인적인 애착을 갖고 있지만 다른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어떤 의미나 유효성도 갖지 않는 것들은 사람마다 당연히 다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에겐 소주가 그럴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 매실주가 그럴 것이고, 어떤 사람에겐 아마추어 밴드 활동이, 웨이트 트레이닝이, 오디오가 그럴 텐데, 재미있는 것은 이런 것들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삶 자체가 조금 더 재미있어진다는 것이다.
 
원래 비극이지만 그 안에서 재미를 찾으려 노력하다가 떠나가는 게 삶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자주 하는데 그런 재미를 전해줄 수 있는, 절대적이고 개인적인 애정이 가는 것들을 더 늦기 전에 찾아보면 어떨까. 기왕이면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네 자매처럼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다는 걸 찾는다면 더 좋을 것 같다. 뭐든 과하지만 않다면, 뭐든 가족과 함께 한다면, 삶이 조금 더 재미있어질 거라 장담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출연 아야세 하루카, 나가사와 마사미, 카호, 히로세 스즈

개봉 2015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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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렉 / 술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