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놈>

긴 기다림 끝에 <베놈>이 공개된다. 엑스맨들처럼 마블 캐릭터면서 판권이 팔려 MCU에 합류할 수 없는 슬픈 운명을 가진 베놈(톰 하디)은 이미 샘 레이미 버전의 <스파이더맨> 3부작 마지막 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바 있다. 그러나 샘 레이미는 <스파이더맨: 홈 커밍>에서 빌런으로 등장한 벌처를 다루고 싶어 했고, 최종적으론 악당이 3명으로 불어나는 바람에 베놈의 매력이나 캐릭터의 사연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채 어수선하게 마무리되고 말았다. 그 아쉬움을 달래고자 소니에선 스파이더맨에 이어 자신들의 첫 번째 마블 세계관(SUMC) 스핀오프로 베놈을 선택했고, 마블과 DC를 통 털어 빌런이 단독 주연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최초의 작품이 되었다.

<스파이더맨 3>에 등장했던 심비오트

물론 같은 원작자(토드 맥팔레인)의 <스폰>이나 복수의 화신인 <퍼니셔>, 악당들로만 구성된 <수어사이드 스쿼드> 등 이미 안티 히어로들을 등장시킨 작품들이 여럿 등장했지만, 그 반향이나 호응이 크지 못했던 탓에 <베놈>은 태생적 한계에서 얼마나 벗어나 관객들을 사로잡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샘 레이미와 다퉈가면서까지 베놈에 집착했던 소니였던 만큼 꽤 오래 전부터 단독 영화화를 갈망해왔는데, 그런 애정과 달리 영화화 과정은 꽤 지난한 과정을 거쳤다. 2007년 첫 등장 후부터 여러 작가들을 고용해 개발했지만, <스파이더맨> 시리즈가 두 번에 걸쳐 리부트될 때마다 영향 받은 건 안타깝게도 베놈이었다.


등급과 수위에 대한 아쉬움
<베놈>
R등급 히어로물의 장을 연 <데드풀>과 <로건>

하지만 폭스에서 시도한 2016년 <데드풀>과 2017년 <로건>의 R등급(국내 청소년 관람불가) 히어로물 성공으로 다시 다크 히어로의 가능성을 발견한 제작자 아비 아라드는 원작 팬이라고 알려진 톰 하디와 <좀비랜드>로 호평을 받은 루벤 플레셔 감독을 끌어들여 구색을 갖추고, 여기에 미셸 윌리엄스와 리즈 아메드 등을 캐스팅해 긴 영화화 과정에 드디어 닻을 올렸다. 광폭하고 잔인한 베놈 캐릭터 특성상 R등급의 안티 히어로물이 될 거란 기대와 달리, 최종적으로 PG-13(국내 15세 관람가)의 안전(?)한 등급을 받긴 했지만,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 영향을 받은 영웅인지 악당인지 모를 이중적인 캐릭터의 복합적인 매력으로 관객들에게 어필하겠다는 접근법은 괜찮은 시도로 보인다.
 
숙주에 기생하며 그 분노와 공격성에 영향을 받는 심비오트의 불안정한 기운이 조금 더 자극적으로 표출되길 원했던 원작팬들에게 15세 관람가는 많이 아쉽겠지만(특히 등급을 위해 40분 가까이 잘라냈다는 소문마저 돌며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데뷔작을 통해 시니컬한 유머와 재기발랄한 연출력을 보여준 감독의 연출력과 이미 비슷한 이름의 DC 빌런 베인을 소화하고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이미 안티 히어로를 열연한 톰 하디의 연기력까지 더해지며 그 아쉬움을 덜어낼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대런 아프노프스키의 눈이라 불리는 매튜 리바티크가 촬영으로 합류했고, 히어로물의 진정한 꽃이라 할 수 있는 음악엔 올 한해 북미에서 가장 핫한 주인공 러드윅 고랜슨이 크레딧을 차지하고 있어 기대감을 부추긴다.


올해 영화음악과 팝계에서 가장 핫한 러드윅 고랜슨
러드윅 고랜슨
차일디쉬 감비노의 ‘디스 이즈 아메리카’(This is america) 뮤직비디오

1984년 스웨덴 태생의 러드윅 고랜슨은 7억 달러가 넘는 초특급 히트를 기록하며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전초전이 될 거란 예상과 달리 본진이 되어버린 <블랙 팬서>의 음악을 담당하는 한편, 차일디쉬 감비노의 첫 빌보드 핫100에서 1위를 차지한 - 충격적인 뮤비로도 깊은 인상을 남긴 - ‘디스 이즈 아메리카’(This is america)를 도널드 글로브와 같이 만들며 대중적인 성과까지 이뤄냈다. 2007년 미국으로 건너와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USC)를 다니며 영화음악을 공부한 그는 대학에서 운명의 지기 라이언 쿠글러와 만나 의기투합했고, 졸업 후 영화음악가 테오도르 샤피로 밑에 들어가 어시스턴트를 하며 빠르게 할리우드에 안착했다. 2009년 NBC의 인기 시트콤 <커뮤니티>의 음악을 담당하면서부터 주목을 받았고, 여기서 도널드 글로브와 인연을 맺게 된다.

(왼쪽부터)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 O.S.T.와 <크리드> O.S.T.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인생을 바꾼 건 라이언 쿠글러 감독과 함께 한 극영화 세 작품을 통해서였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돼 선댄스영화제와 칸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를 시작으로, 권투의 영화의 대명사로 이제는 대장정을 끝낸 것으로 보였던 <록키> 프랜차이즈에 새 생명의 불꽃을 이식한 스핀오프 <크리드>와 마블 최초의 아프리칸 슈퍼 히어로 <블랙 팬서>까지 짧은 시간 그들이 이뤄낸 결과물들은 사뭇 인상적이었다. 특히 실베스터 스탤론과 함께 록키의 아이콘과도 같았던 영화음악가 빌 콘티의 부재를 커버하며 새로운 전설의 출발을 이끌어낸 <크리드>는 시리즈에 대한 예우를 보이면서도 자신만의 색채를 확실히 부각시키며 극찬을 이끌어냈다.


<크리드>와 <블랙 팬서>의 눈부신 성공
<록키>의 영화음악을 작곡한 빌 콘티

빌 콘티의 전설적인 록키 테마 ‘아이 고나 플라이 나우’(I gonna fly now)와 ‘고잉 더 디스탠스’(Going The Distance) 등을 자유자재로 변주하며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R&B 리듬과 힙합 비트를 차용한 고랜슨의 스코어는 스포츠 장르물의 열혈 사운드를 이입하는 동시에 콘티의 기존 음악들과도 훌륭한 변별점을 가졌다. 단순한 인기 시트콤과 평범한 코미디물 작곡가라 한정지었던 편견을 깨부수는 데 도움을 준 탁월한 솜씨였다. <록키>로 빌 콘티가 영화음악가로 다시 태어난 계기가 되었다면, <크리드> 역시 러드윅 고랜슨을 다시 보게끔 만들게 된 기회가 된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어진 <블랙 팬서>의 결과물은 그러한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시켜 준다. 할리우드 최고 작곡가들의 경연장이 된 MCU에서 그는 이 작품으로 자신의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블랙팬서> O.S.T.

직접 세네갈과 남아공에 가서 보이스 싱어들을 접촉하고, 민속악기 연주자들을 섭외하는 열정을 보인 고랜슨은 판에 박힌 아프리카풍 소리들을 흉내 내는 것에서 벗어나 진짜 아프리칸 사운드를 MCU에 이식했다. 켄드릭 라마의 힙합과 아프리카 민속 음악, 100인조가 넘는 전통적인 할리우드의 대규모 심포닉 스코어가 혼재된 <블랙 팬서>의 음악은 단순히 개인의 영웅담으로 시야를 좁히지 않고, 영웅이 태어나고 자란 곳 그리고 운명을 짊어져야 하는 곳으로 지역적 정체성까지 부여하며 보다 확장된 의미의 사운드를 조망해낸다. 그런 의미에서 블랙 팬서(채드윅 보스만) 혼자만의 팡파레가 아닌 5대 부족 모두를 아우르는 ‘와칸다’의 테마가 전면에 등장하고, 이를 등진 안티테제 ‘킬몽거’의 테마가 대척점으로 주요하게 배치되었다.


안티 히어로 베놈과 에미넴
에미넴 / 에미넴의 ‘카미카제’X<베놈> 프로모션 이미지

<블랙 팬서>의 성공이 그를 <베놈>의 음악으로 이끌었지만, 사실 그가 맡은 일련의 영화들(<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 <스트레치>, <크리드>, <블랙 팬서>, <데드위시> 등)에서 공통적으로 다뤄지는 소영웅(혹은 안티 히어로)들의 모습을 비춰보면 러드윅 고랜슨이 얼마나 이런 이야기와 캐릭터들에 최적화된 사운드를 뽑아냈는지 알 수 있다. 아울러 루벤 플레셔 감독과는 2011년에 <털기 아니면 죽기: 제한시간 30분>을 같이 작업하며 극영화에 데뷔한 인연도 갖고 있어 그의 합류는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고랜슨이 “<베놈>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한 몸을 공유하지만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두 감정적인 캐릭터들의 충돌이었다”고 한다. 이를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메탈 기타와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충돌(그리고 조화)였다.

기타와 자극적인 타악기가 어둡고 흉포한 베놈의 심리를 상징한다면, 스케일이 느껴지는 코러스와 웅장한 관현악은 슈퍼 파워와 이로 인해 그(들)이 닥칠 시련을 의미한다. 고랜슨이 <베놈> 스코어를 두고 “전속력으로 질주하는(Pedal to the Metal) 기분을 맛볼 거”라 했는데, 그만큼 파워풀하고 강렬한 사운드를 선사할 것으로 기대된다. 여기에 동명의 주제가로 참여한 랩퍼 에미넴의 존재도 빼놓을 수 없다. 영화 개봉에 앞서 8월말 기습적으로 발표한 그의 10번째 앨범 <카미카제>에도 포함된 이 노래는 한물갔다던 그가 아직 건재하다는 걸 알려주는 증표로, 베놈이라는 캐릭터와 에미넴이 가진 공격적으로 파워풀한 음악적 스타일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며 색다른 즐거움을 안긴다.

<베놈> O.S.T.
베놈

감독 루벤 플레셔

출연 톰 하디, 미셸 윌리엄스

개봉 2018.10.03.

상세보기
크리드

감독 라이언 쿠글러

출연 실베스터 스탤론, 마이클 B. 조던, 그레이엄 맥타비쉬, 테사 톰슨

개봉 미개봉

상세보기
블랙 팬서

감독 라이언 쿠글러

출연 채드윅 보스만

개봉 2018.02.14.

상세보기

사운드트랙스 / 영화음악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