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장편 데뷔작 <유전>(2018)으로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낸 아리 에스터 감독이 다시 한번 공포영화를 내놓았다. 밤이 없는 스웨덴의 축제 하지제를 체험하러 간 이들이 경험하게 되는 기괴한 광경을 그린 영화는, 전작 <유전>과는 완전히 자유로운 스타일을 선보일 뿐만 아니라, 공포를 넘어 어떤 위로까지 전달하는 독특한 이야기로서 아리 에스터 감독이 앞으로 보여줄 폭넓은 스펙트럼에 대한 기대치를 한껏 높인다. <미드소마>에 대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정리했다.

** <미드소마>에 관한 스포일러성 정보가 있습니다.


차세대 호러 명장으로 떠오르 있는 아리 에스터. 정작 그는 스스로를 호러 감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많은 장르에 걸친 시나리오를 써온 그가 공포영화를 쓰기 시작한 건 불과 얼마되지 않았다고. 에스터는 여러 자리에서 <미드소마>를 '동화'이자 '오페라 같은 이별 영화'라고 언급한 바 있다.

아리 에스터


<미드소마>에는 반전이 없다. 평이한 플롯이라는 뜻이 아니다. 영화 곳곳에 그림이 화면을 가득 메우면서 등장하는데, 이것들은 하나같이 그저 하지제를 둘러싼 이 기괴한 공간에 미스터리를 더하는 역할을 넘어,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를 고스란히 암시한다. 뉴욕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중국계 아티스트 무 판이 그린 커다란 그림을 영화 오프닝부터 수평으로 쭉 훑으며 시작할 정도다. 147분 간 담긴 이야기가 이 짧은 트래킹쇼트에 죄다 담겨 있다. 불그스름한 음료에 들어 있는 이물질의 출처를 소상히 기록한 그림, 크리스티안이 어떤 방에 앉아 보게 되는 불타는 곰의 형상 역시 머잖아 그 실체가 드러난다. 오차 없이. 아리 에스터 감독이 지향한 호러 연출이 갑작스러운 트릭으로 허를 찌르는 데에 있지 않다는 지표다.


아리 에스터 감독은 지난 2년반을 첫 두 작품을 작업하는 데에 쏟아부었다. 데뷔작 <유전>을 다 만든 후에도 현지 개봉 일정이 2018년 6월 8일으로 잡혀 에스터는 프로모션에 거의 참여하지 못하고 여름을 배경으로 하는 새 영화 <미드소마>의 촬영 준비에 매진해야 했다. 이야기 그대로 스웨덴에서 촬영하기로 계획했지만 막상 가본 현장은 영화와 어울리지 않았고 스웨덴법으로 하루 8시간 이상 촬영하는 것도 금지돼 있어, 결국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교외로 촬영지를 옮겨야 해서 일정은 더욱 빠듯했다. 에스터는 2018년 8월 5일 촬영을 시작해 2019년 6월 24일 최초 공개하는 타이트한 일정을 소화해냈다. 덕분에 데뷔작 <유전>의 성공에 대한 부담을 느낄 틈조차도 없었다고.


<미드소마>는 4명의 미국인이 스웨덴 하지제에 참여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리는 영화다. 그렇다면 그들을 연기한 배우들 모두 미국인일까? 아니다. 조쉬 역의 윌리엄 잭슨 하퍼만 미국인이다. 플로렌스 퓨(대니)와 윌 폴터(마크)는 영국인이고, 잭 레이너(크리스티안)는 미국 콜로라도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아일랜스 사람이다.

(왼쪽부터) 윌리엄 잭슨 하퍼, 윌 폴터, 플로렌스 퓨, 잭 레이너


숨이 턱 막히는 오프닝 시퀀스를 지난 후, 관객들을 충격과 공포를 몰아넣는 대목이 있다. 바로 '절벽' 의식이 펼쳐질 때다. 삶과 죽음에 대한 신성한 의식처럼 애써 받아들이게 되다가도, <유전>에서도 등장해 이제는 에스터의 전매특허라 불러도 될 법한 '짓이겨진 얼굴'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걸 보면 고개를 절로 돌리게 된다. 고전영화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이 절벽 시퀀스의 주인공인 남자 노인 캐릭터의 배우가 낯익게 보일 것이다. 바로 루키노 비스콘티의 걸작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 속 타지오를 연기한 비요른 안데르센이다. 영화사에 남을 만한 미남자 캐릭터로 나온 안데르센은 이후에도 간간이 영화와 TV 시리즈에 출연했지만 <베니스에서의 죽음>만한 강한 인상을 남기진 못했다. <미드소마>에서 그는 (절벽 의식을 치러야 할) 72세로 나오는데, 실제 안데르센의 나이는 64세다.

비요른 안데르센


여러 인터뷰에서 영화 마니아의 면모를 드러낸 아리 에스터는 관객과의 채팅 세션 중에 수많은 감독들의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하나씩 꼽아서 추천하는 시네필이다. 그가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2003)와 나홍진의 <곡성>(2016)을 좋아한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에스터가 <미드소마>를 연출하며 '시각적으로' 영향을 받은 작품은 다음과 같다. 마이클 포웰, 에머릭 프레스버거의 <검은 수선화>(1947), 알렉세이 게르만의 <신이 되기는 어렵다>(2013), 그리고 로만 폴란스키의 두 영화 <맥베스>(1971)와 <테스>(1979)다.


콜린 스텟슨과 핵산 클록

아리 에스터의 두 영화 <유전>과 <미드소마>는 각각 다른 뮤지션이 음악을 만들었다. <유전>은 색소포니스트 콜린 스텟슨, <미드소마>는 일렉트로니카 뮤지션 핵산 클록이 만들었다. 두 사람 모두 영화음악가이라기보다 독자적인 뮤지션으로서 더 유명한 인물이다. <유전>과 <미드소마>만큼이나 다른 스타일의 콜린 스텟슨과 핵산 클록은 관객을 완벽하게 영화 안에 포박하는 소리들로써 두 작품이 독보적인 작품으로 거듭나는 데에 지대한 공을 더했다. 작업 과정도 서로 달랐다. 스텟슨과는 매일 이메일을 주고 받으면서 결국 최종 작업까지 완성했던 것과 달리, 에스터는 핵산 클록과 이메일로만 작업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곤 직접 그의 LA 집으로 가 <미드소마> 스코어 대부분을 완성할 수 있었다.


지난 7월 9일, <미드소마>의 배급사 A24는 짧은 광고 영상을 하나 올렸다.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이게 얼마나 농담으로 똘똘 뭉친 비디오인지 알 것이다. 영화 마지막을 그렇게 지독하게 끝내놓고서는 마치 "영화 나오는 귀여운 곰 한 마리 몰고 가세요~" 하는 뻔뻔함이라니. A24가 당대 미국 영화신에서 가장 핫한 배급사인 데는 다 이유가 있나보다.


한밤 중 몰래 일어나 하르가의 비밀 문서를 찍어대던 조쉬는 그만 누군가에게 발각되고 만다. 조쉬는 그를 보며 마크라고 부르지만, 얼굴을 자세히 보면 그는 마크의 얼굴 가죽만 쓴 또 다른 사람이다. 그는 누구일까? 영화 개봉 전에 유출된 시나리오에 따르면 그는 마크가 조상들의 나무에 소변을 볼 때 노발대발 한 후로 그를 죽일 기세로 노려보던 하르가의 일원 울프다. 어느 여인에 부름에 따라간 마크는 울프에게 살해 당한 후 가죽이 벗겨졌을 것이다.

마크 역의 윌 폴터 / 울프 역의 헨릭 노를렌


<미드소마> 첫 편집본의 러닝타임은 무려 3시간 40분에 달했다. 지금의 2시간 27분보다 1시간 13분 더 기니까 개봉판의 절반에 해당하는 분량이 편집된 셈이다. 현재 아리 에스터는 3시간 짜리 확장판을 편집 중에 있다고 한다. 제한상영가 등급(NC-17)을 피하기 위해 덜어낸 고어 신들을 대거 살리는 건 물론, 하르가의 의식, 대니와 크리스티안의 연애 관계, 논문을 둘러싼 조쉬와 크리스티안의 경쟁 등이 추가될 예정이다. 이 버전은 영화제나 블루레이, 디지털 서비스 등을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하르가의 하지제는 모두 9일 동안 이어진다고 여러 차례 언급된다. 그러나 영화는 축제가 시작된 지 불과 5일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끝난다. 과연 남은 기간엔 얼마나 더 기괴한 일들이 벌어질까? 5월의 여왕이 된 대니가 그 후 하지제를 어떻게 보냈을지 상상해보는 것도 <미드소마>의 여운을 즐기는 방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문동명 /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