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감추어진 텍스트

이제 많이 알려진 대로, 역사상 최고의 반전(反戰) 영화들 중 하나로 꼽히곤 하는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 Apocalypse Now>에는 원작이 있었다. 폴란드계 영국 작가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암흑의 핵심 Heart of Darkness』(1902)이 그것이다.

물론 코폴라 감독은 거장답게 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삼은 많은 영화들이 자주 범하곤 하는 오류를 잘 피해 갔다. 이른바 ‘문예영화’를 표방한 영화들이 ‘원작에 최대한 충실하려다’ 되레 문자의 힘에 굴복당하고 말았던 수많은 사례들(영화가 우익 문예주의와 결합한 경험이 있는 한국에 유독 그런 사례들이 많다)에 비할 때, 그의 선택은 현명했다. 감독은 원작으로부터 ‘커츠’라는 인물의 음험한 매력, 액자 형식의 골격, 로드무비 방식의 서사, 삽화적 구성만을 차용한다. 이를테면 원작과 영화 모두에서 ‘암흑의 핵심’에 사는 주인공 이름은 커츠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는 ‘말로’라는 인물이, 영화에서는 ‘윌라드’라는 이름의 내레이터가 과거를 회고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각각 콩고강과 넝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자신들이 체험한 사건들에 관한 것이고, 그 사건들이 몇 개의 에피소드로 제시된다.

그러나 공통점은 여기까지다. 감독은 과감하게 작품의 무대를 베트남전 말기 밀림의 격전지로 옮겨 놓는다. 말하자면 영화는 소설의 골격만 가져온 셈이다. 모든 세부적 사건과 인물, 대사 등은 완전히 각색된다. 그러자 20세기 초엽 백인 작가가 쓴 가장 탁월한 반제국주의 소설이, 20세기 후반 베트남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미국 백인 감독이 만든) 가장 탁월한 반전 영화로 거듭난다.

‘불온한 사상’을 가진 커츠(말론 브란도)를 암살하라는 명령을 받은 윌라드 대위(마틴 쉰)가 넝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보게 되는 미군의 행태는 가히 미치광이 짓에 가깝다. 히틀러가 가장 사랑했다는 음악가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을 틀어놓고, 오로지 2미터 파도에서 서핑을 즐기기 위해, 평화로운 베트남 마을에 무차별 헬기 폭격을 가하는 빌 킬고어(로버트 듀발) 대령의 그 유명한 광기는 말할 것도 없고(전쟁이 스포츠가 된다), 플레이걸들의 위문 공연 장면(발정난 짐승과 인간의 경계가 무너진다), 적이 어디에 있는지 지휘관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밤새 욕설과 기관총을 동시에 난사해대는 병사들의 부조리한 야간 전투 장면(피아가 식별 불가능해진다), 강아지 한 마리 때문에 민간인 여러 명의 몸을 벌집으로 만들어놓는 선상 난사 장면(살육과 전투를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아직도 자신들이 베트남의 주인이라 고집하며 저녁 식사 자리를 음악과 보들레르의 시로 치장하는 프랑스인 농장주의 저택 장면(‘속물-노예’와 ‘귀족-주인’의 경계가 사라진다)……

일종의 점층법이랄까? 삽화들이 늘어날수록 인물들은 미쳐가고, 전쟁의 의미는 흐려지고, 부조리는 극에 달한다. 콘래드가 『암흑의 핵심』에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방식이 그와 같았다. 그러나 소설에서 차용한 삽화적 구성의 로드무비 서사가 이 영화에게 가져다 준 이점은 여기까지다. 소설에는 없었던 무언가가 영화에는 있다. 정확히는 코폴라 감독이 참조한 것으로 보이는 또 다른 원작 텍스트 한 권이 더 있는데, 비유하자면 그것은 마치 이 영화의 무의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최종심에서 영화의 결말을 결정한다.

좀더 신화적이고 인류학적이면서 또한 철학적이기도 한 주제 하나가 텍스트의 형태로 화면에 등장하는 것은 러닝 타임 ‘2시간 58분 12초’(리덕스판 기준) 즈음…… 그 텍스트의 제목은 『황금가지 Golden Bough』,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가 1890년에 초판을 출간했던 책(이후 권수를 달리하며 여러 판본이 출간된다)이다. 워낙에 유명한 책이니 아는 독자들이 많을 줄 알지만, 스크린 속에서 저 책을 발견한 관객이 많을지는 잘 모르겠다. 저 책은 화면에 등장하자마자 1~2초 사이에, 마치 영화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듯이 금세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숲의 왕

세 시간 넘는 러닝 타임 중 고작 1~2초 등장하는 책 한 권이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소품일까? 그저 우연의 소산 아닐까? 그러나 원래 잘 만들어진 영화 속에서는 중요한 암시적 장치들이 금세 사라져버리는 법이다. 게다가 의미심장하게도 저 책이 어둡기 그지없는 커츠의 처소(앙코르와트를 연상시키는 유적의 골방) 바닥에서 조명을 받는 순간의 맥락이 이렇다.

내레이션 : 그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었다.

(카메라가 비추는 책들, 위에 『황금가지』가 놓여 있다)

내레이션 : 그는 세상을 버렸고 결국 자신까지도 버렸다

커츠 : 난 공포란 놈을 봤어. 너도 봤을 거야. 넌 날 살인마라 부를 권리는 없어도 날 죽일 권리는 있어. 날 죽일 권리는 있어도 날 판단할 권리는 없어. 말로는 도저히 불가능해 공포가 뭔지 모르는 사람한테 공포가 뭔지 말로 설명하기는. 공포는 얼굴이 있어. 그놈과 친구가 되어야 해. 친구가 되지 않으면 무서운 적이 돼 가장 무서운 적이지.

윌라드가 드디어 대면한 커츠는 이미 죽어가고 있다. 그런데 커츠는 윌라드야말로 ‘공포’와 친구가 될 만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본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자신을 죽이게 함으로써 그에게 숲의 왕 자리를 물려주려고 한다. 다른 책도 아닌 『황금가지』가 저 맥락에서 카메라에 포착되었다면 그것은 절대 우연일 수 없다. 바로 ‘생명력을 다한 숲의 왕 살해’의 주제가 부상하는 장면이 여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주제야말로 전형적으로 프레이저적인 주제이기도 하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는 장식으로 거기 놓여 있었던 것이 아니다.

프레이저가 그토록 궁금해하던(그래서 자신의 책 제목을 따오기도 하고, 책의 첫 문장을 그 그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기도 한) 윌리엄 터너의 그림 <황금가지>는 고대 숲 속에서 행해지던 어떤 기이한 의식을 소재로 삼고 있다. 그림 속 모닥불 주위에서 사람들은 고요하고 평화롭게 숲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찬미하고 있지만, 그곳에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일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젊은 왕이 행한 부왕 살해 의식이 그것인데, 고대에 왕은 초자연적인 주술사이기도 했으므로 숲의 생명력은 오로지 그의 기력과 관계되었다. 그가 늙으면 숲도 늙는다. 따라서 젊은 왕이 그를 죽이고(고대에는 ‘황금가지-겨우살이-칼’로, 지금이라면 촛불이나 가짜뉴스로?) 새로운 왕에 등극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터너의 고요한 그림 풍과 달리 네미호 인근의 숲에서 벌어진 축제는 인신공희의 축제였다. 게다가 훗날 장장 열두 권의 책으로 거듭나게 되기도 하는 프레이저의 저서 속에서 그런 인신공희는 단순히 네미호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세계 곳곳의 신화와 전설들이, 지역을 불문하고 모든 문명의 초입에 그런 잔인한 의례들이 존재했음을 입증한다. 물론 어떤 왕(신)은 자신을 대신해 아들을 인신공희의 제물로 바치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왕은 이른바 ‘파르마코스’(인간 제물)들을 사육해서 제물로 바치기도 하고, 더 시간이 지나면 사람을 대신해 양이나 소를 제물로 삼거나 더러는 포도주와 빵으로 아버지의 피와 살을 대신하는 연극적 진화를 이루기도 하겠지만……

따라서 감탄할 만큼 잘 연출된 영화 결말부, 정교하고도 충격적인 몽타주와 교차편집으로 이루어진 ‘커츠 살해/소 희생제의’ 장면은 코폴라 감독이 명백히 커츠를 노쇠한 숲의 왕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신의 숙소 입구에 역광으로 서 있는 커츠, 그 앞에 소의 실루엣이 보인다. 그렇다면 이제 커츠는 소다. 결국 교차편집된 부락민들의 축제 장면에서 소가 사지를 난도질당할 때, 커츠도 윌라드에 의해서 난도질당하는 것은 신화적으로 당연하다. 게다가 어둠과 빛이 극단적으로 교차하는 조명 속에서 윌라드는 커츠와 구분조차 되지 않는다. 역시 당연한 일이다. 이제 그가 숲의 왕, 2대 커츠가 될 테니……

아버지를 먹어라

영화는 물론 ‘정치적 올바름’의 룰에 따라, 새로운 숲의 왕 윌라드가 부락을 떠나면서 마무리된다. 주민들은 모두 무기를 내려놓았으니 젊은 백인 왕은 떠남으로써 평화의 수호자가 된다. 그러나 신화적으로도 그랬을까? 신화 속에서라면 당연히 윌라드와 부족민들이 난자당한 희생물 ‘커츠-소’를 먹어치웠으리라. 지금도 남아 있는 (변형된 식인) 풍습들이 그 사실을 증거하는데, 가령 나는 엊그제 제사를 지낸 후 조상들의 혼이 깃든 술을(그것은 피겠지) 가족들과 나누어 마셨고(음복이란 이름으로), 신앙을 가지고 싶었던(그러나 최종적으로 실패했던) 젊은 날 성자의 피라는 포도주와 성자의 살이라는 빵을 사제로부터 받아먹고 또 마신 적도 있다.

미루어보건대, 신화 속에서라면(혹은 신화적인 의미에서라면) 그들은 분명히 커츠를 먹었다. 프로이트가 『토템과 타부』에서 얼마간의 가정법을 동원해 묘사하려 했던 것이 바로 그런 장면이다.

“어느 날 문득 (폭군이자 여자들의 독점자이기도 한 ‘원초적 아버지’에 의해) 추방당했던 형제들이 힘을 합쳐 아버지를 죽이고 그 고기를 먹어 버림으로써 부군(父郡)을 결단낸다. 말하자면 자군(子郡)은 단결함으로써 혼자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던 일을 성취시키고 마침내 부군의 결단을 성사시킨다. 그들은 식인종들이었으니, 살해한 아버지의 고기를 먹었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폭력적인 원초적 아버지는, 아들 형제에게는 누구에게나 선망과 공포의 대상이자 전범이었다. 이들 형제들은 먹는 행위를 통해 아버지와의 일체화를 성취시키고, 각자 아버지가 휘두르던 힘의 일부를 자기 것으로 동화시켰다. 아마도 인류 최초의 제사였을 토템 향연은 이 기억할 만한 범죄 행위의 반복이며 기념 축제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범죄 행위로부터 사회 조직, 도덕적 제약, 종교 같은 것들이 비롯되었을 것이다.”(지그문트 프로이트, 『토템과 타부』에서)

프로이트에 따를 때, 숲의 왕 살해는 아버지 살해다. 그러나 살해 후 죄의식이 아들들을 사로잡는다. 이후로 줄곧 그 최초의 살해를 복기함으로써 (죄의식 속에서) 다시는 그런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는 행위, 그것이 제의의 본질이다. 금기를 만들고 법을 만들고 도덕을 만드는 일이 바로 그 아버지 살해와 식인의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른바 ‘죽은 아버지에 대한 사후 복종’의 형식으로서의 인신공희가 폭력으로 창설된 문명의 기원이다(참 그다운 결론이다).

코폴라가 영화의 결말을 그처럼 잔혹한 희생제의 장면으로 마무리했던 이유는 이제 분명해진 듯하다. 암흑의 핵심에 있던 늙은 왕을 죽이고 그를 나누어 먹음으로써, 이 미친 세계에서 법과 금기는 다시 새롭게 힘을 얻고 숲은 평화를 되찾으리라. 잠시 그리너웨이의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 이야기로 돌아가서, 영화 말미 리처드와 조지나가 유대인의 시신을 알버트에게 먹인 이유도 이제 어렴풋이 이해가 간다(알버트에게 먹으라고 강요했던 부위가 바로 부권의 상징 ‘남근’이었단 사실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말로 옮기자면 이런 의미 아니었을까?

“유럽의 부르주아들이여 너희들이 죽인 이 유대인의 시신을 먹어라. 그럼으로써 너희가 행한 악과 죄의식을 나누어 가져라.”

무서워라, 무서워라

통쾌하고 적나라하고 심오한 결말이다. 그러나 나는 물론 그런 신화적이고 미학적인 결말이 지상에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는 믿지 못한다. 신화는 옛날 일이고 예술은 힘이 없어서, 오늘날 희생양은 가짜뉴스가 양산하고 기원과 결별해버린 피와 살은 그 효력을 잃어버렸다. (누구나 희생양을 자처하지만 머리카락 말고는 피와 살을 나누는 법이 없고, 사법 권력은 사법 폭력과 구별되지 않으며, 강남의 재력가와 ‘좌파’란 말이 모순 없이 나란히 쓰이기도 하는 세계, 애국이 광기가 되고 국기가 망상의 표지가 되고……)

코폴라도 어렴풋이 이런 세태를 예감했던 것일까? 커츠도 윌라드도 마지막으로 뱉은 대사는 “Horror, Horror”였다. 무서워라. 무서워라.


저자 | 김형중

1968년 광주에서 태어나 전남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문학동네신인상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평론집 《켄타우로스의 비평》 《변장한 유토피아》 《단 한 권의 책》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후르비네크의 혀》 등과 에세이 《평론가 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가 있으며, 소천비평문학상(2008), 팔봉비평문학상(2017)을 수상했다. 현재 조선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