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K-47>은 9월 24일(목) 올레TV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극장에 걸리진 않았지만 이대로 놓치기 아쉬운 영화들을 한 주에 한 편씩 소개합니다.


일개 병사가 무기 설계자가 되기까지

때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브랸스크 전투가 소련의 패배로 끝났다. 참전 중사 미하일 칼라시니코프(유리 보리소프)는 어깨에 상처를 입고 병가를 받아 수년 만에 고향 알타이로 향한다.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전까지 못 터놓았던 이야기를 술술 하게 되듯, 살다 보면 엄한 사람에게 속 얘기를 할 때도 있는 법. 그 대화의 끝에 큰 깨달음이 있을 때도 있는 법. 고향으로 가는 기차에서 만난 옆자리 병사에게 전쟁 전 철도 공장에서 석궁, 엽총을 만들다 사장에게 쫓겨난 이야기와 지금은 자동 소총을 만들어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칼라시니코프. 전장에서 기관총의 오작동으로 상관이 큰 부상을 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본 기억, 어린 시절 마당에 떨어진 나무로 총 모형을 만들며 총기 발명을 꿈꾸던 기억이 오버랩된다. 무언가 다짐한 듯한 결연한 태도로 고향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갑자기 기차에서 내린다. 그가 일하던 철도 공장이 있던 카자흐스탄 마타이다.

칼라시니코프는 무기 제작을 배운 적이 없다. 가방끈도 짧다. 사장이 그를 또 내칠 것이라는 짐작이 쉬이 간다. 그런데도 그의 결심은 단호했다. 그런 용기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소총을 발명하겠다는 일념으로 철도 공장으로 향하는데…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무기, AK-47

칼라시니코프는 실존했던 러시아인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무기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AK-47을 발명한 무기 설계자다. 그의 아들 빅토르 칼라시니코프도 뛰어난 총기 설계자로 알려졌다. 영화의 이해를 돕기 위해 AK-47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 무기는 1947년 구소련의 주력 돌격 소총으로 채용된 자동 소총으로 현재도 50여 개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현역 소총이다. 현대사의 크고 작은 분쟁이 있는 곳에는 항상 AK-47이 있었다. 현재까지 무려 1억 정이 넘게 생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무기. 영화가 무기 발명 과정에 관한 것이라고 했을 때, 혹여 내용이 어려울까 지레 겁부터 먹을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뭐, 따분하리라 생각했을 이도 있겠다. 배경지식이 없어도 괜찮다. 발명하는 것은 칼라시니코프의 몫이지 우리의 일이 아니다. 이 영화는 칼라시니코프의 무기 발명기면서, 그의 성장 드라마다. 그가 아이디어를 어떻게 발전시켜나가는지, 어떻게 스스로 기회를 잡는지, 그 여정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다. 제작진은 미하일 칼라시니코프의 딸 엘라나 칼라시니코프에게 자문해 고증을 보완하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인사팀장이 좋아할 만한 인재, 미하일 칼라시니코프

바로 앞에서 말했듯, 이 영화는 칼라시니코프의 무기 발명기이자 성장 드라마다. 기회가 올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기회를 찾아 나서야 한다던가. 영화는 칼라시니코프를 통해 이 간결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철도 공장에 찾아간 칼라시니코프는 역시나 사장에게 다시 한번 내쫓긴다. 그렇다고 포기할 그가 아니다. 방법을 찾으려 무작정 마타이를 방문한 중령을 찾아간다. 관할 부대 직속 부하라고 하더라도 중사가 중령 앞에 나서는 일은 드문데, 타지역의 이름 모를 중사가 벌컥 중령 앞에 나섰다? 더 흔치 않은 일이다. 실없는 서두는 필요 없다. 말머리에 미사여구를 늘어놓는가 싶더니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새 소총 개발이 꼭 필요한 이유와 자신의 계획에 대해 막힘없이 말을 잇는다. 중령이 써준 추천서 덕에 공장의 한쪽에 작업할 공간을 얻고, 다음엔 모스크바 무기 제작 본부로 가서 소총을 개발하고, 마지막엔 장교가 된다. 할 수 있다는 믿음, 자신감 하나에서 출발한 것이다. 적극적인 태도, 책임감, 잠재력. 칼라시니코프는 이것들을 모두 갖췄다. 도전정신도 갖췄다. 소총을 만들어 대회에 출품하고 나서 아내 카티아(올가 레르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불안하고 두려워. 근데 동시에 엄청 신나"라고 말했던 것에서도 그 기색이 역력하다. 칼라시니코프가 요즘 취업준비생이었다면 취업 경쟁력을 가히 갖춘 이였을 것이다. 인사팀장이 좋아할 만한 성품을 가진 인재다.

저돌적인 태도로 앞으로만 나아가던 그에게도 슬럼프는 있었다. 그는 '미친 천재'라기보다는 '인간 천재'였다. 실력이 뛰어난 칼라시니코프라지만 무기 제작을 정식으로 배우지도 않았는데 단번에 최고의 무기를 만들어 전장에 배포하는 것은 무리였다. 대회에서 좌절을 맛볼 때마다 그는 확신을 조금씩 잃었다. 뭣도 모르고 소총 제작에 덤볐을 때와는 달랐다. 그럴 때마다 그를 응원하고 그의 사기를 북돋워 준 것은 주변 사람들이었다.

영화에는 '믿음'이라는 말이 꾸준히 나온다. 칼라시니코프는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무기 제작에 뛰어들었다. 그 믿음이 흐려졌을 때는 그의 잠재력을 믿어주는 주변인의 도움을 얻어 다시 믿음을 선명케 했다. 수많은 종류의 믿음 중 결국 나를 움직이는 제1의 믿음은 자신을 향한 믿음이다. 영화는 '너를 믿는다'는 말이 주는 무게와 힘, 그리고 자신을 향한 믿음에 관한 메시지를 은은하게 던진다.


그래도 결국은 전쟁 영화

전장은 전장이다. 크게 보면 <AK-47>도 전쟁 영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칼라시니코프가 큰 업적을 이뤄 스탈린의 훈장을 받게 되었다 한들 전장은 전장이다. 그도 전쟁이 끝나기만을,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기만을 기다리는 병사다. 브랸스크 전투 후 병상에서 깨어난 그가 일어나자마자 묻는 첫 번째 질문은 "다들 살았나요?"였다. 수백수천명이 죽게 될 수밖에 없는 전장에 나간 병사들이지만, 어찌 보면 죽음이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전쟁터지만, 이들도 죽음이 두렵다. 눈(䨮)이 때로는 순수와 설렘을 상징할 수도 있다. 하지만 <AK-47> 속 전쟁터를 뒤덮은 눈은 황무지를 더 초라해 보이게 한다. 창백하다 못해 색을 잃은 것이, 그 자체로 전장의 참혹함을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색이 없는 건 병사들의 표정도 마찬가지다. 앙상한 나무, 빛바랜 하늘색도 마찬가지다.

전쟁 영화에 꼭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가족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이다. <AK-47>의 칼라시니코프도 고향에 있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부친다. 편지 장면은 전쟁 영화의 진부한 공식이라기보다는 전시 병사들의 심정을 고려한 당연한 고증이다. 칼라시니코프는 편지에서 부모·형제, 조부모뿐만 아니라 가까운 이웃부터 먼 이웃까지, 생각나는 모든 사람의 안부를 묻는다. 참전하고 보니 그의 일상에 조금이라도 섞여 있던 이들에게까지 안부를 전하고 싶었던 걸까. 영화 사이사이 들려오던 아코디언 연주는 신명 나는 곡이지만 구슬프다. 밝은 소리에 힘이 전혀 실리지 않는다.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하는 굴곡진 서사

칼라시니코프가 걸어온 길이 탄탄대로였다면 영화가 지루했을 수도 있겠다. <AK-47>은 지루할 틈이 없다. 영화는 납득 가능한 위기 상황을 적절히 배치해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했다. 수차례의 우승 좌절과 사기 저하, 범죄에 연루된 형제, 상관의 핍박, 갑작스러운 휴가 명령과 같은 갈등 상황이 있었기에 그의 성장기가 더 빛날 수 있었다.


웃음과 사랑을 잃지 않는다

<AK-47>은 전시를 그리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았다. 오해를 받아 잠시 유치장에 감금된 칼라시니코프. '네가 무슨 설계자'냐며 조롱과 야유를 보내던 문지기 병사들. 중령이 직접 칼라시니코프를 찾아와 '발명가 칼라시니코프'라 호칭하며 옥에서 나와도 좋다고 그를 꺼내주니 문지기 병사는 머쓱하고 칼라시니코프의 기는 산다. 병사들을 향해 우쭐 고갯짓하는 모습은 웃음을 피식 흘리게 한다. 사랑도 잃지 않았다. 모스크바 무기 제작 본부에서 만난 아내 카티아는 그의 또 다른 동력이 되어주었다. 카티아는 대회 우승이 좌절될 때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주었다. 천막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빗속을 함께 뛰는 모습은 <클래식>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씨네플레이 인턴기자 이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