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은 또렷하고 다부진 목소리들이 빛나는 영화다. 그중에서도 유독 돋보이는 목소리는 단연 '가네코 후미코'의 것. 후미코는 항일운동을 하던 조선 청년 박열의 동지이자 연인이다. 어눌한 한국어를 장착한 채 '박열'을 '바쿠요르'라 부르며 씩 웃던 그녀. '영화를 보는 내내 일본인인 줄 알았다'는 평이 있을 정도로, 최희서는 본연의 모습을 벗어던지고 완전히 후미코에게 이입된 모습을 보인다. 실제로 만난 최희서의 모습도 영화 속 모습 그대로였다. 유쾌함을 잃지 않으면서, 조곤조곤 제 신조를 나열하던 모습.


중고 신인 최희서의 지난 8년
킹콩을 들다

그녀의 데뷔는 꽤 오래전 이뤄졌다. 그녀가 '중고 신인'으로 불리는 이유다. "징크스는 없냐"는 질문에 "딱히 징크스는 없는데, 숫자 8을 좋아한다"며 웃던 그녀. "지금 데뷔한 지 8년째예요. 딱 8년 전에 스크린 데뷔작 <킹콩을 들다>가 개봉했거든요. 8년이 지나서 똑같은 계절에, 이번엔 주연을 맡았네요." <동주>와 <박열>을 만나기 전부터 그녀는 매해 한두 편씩 작업을 이어왔다.

마크의 페스티벌 / 야누스

- 데뷔작 <킹콩을 들다> 이후론 단편 영화나 연극 위주로 활동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본인의 작품을 꼽는다면.

= 이제훈씨와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나를 알아보더라. (무명 배우인) 나를 어떻게 아냐고 물어봤더니 출연한 단편을 인상 깊게 봤다고 했다. 그 단편이 <마크의 페스티벌>이다. 외국 남자친구를 고향에 데려와 일어나는 해프닝을 그린 귀여운 로맨틱 코미디다. 또 하나의 작품은 <야누스>. 고프로 두 개를 연결해 블랙박스 시점으로 진행되는 영화다. 촬영 당시엔 직접 한쪽 손에 카메라를 들고 연기를 하기도 했다. 눈밭도 엄청 뛰어다니고…. 독특한 경험이었다. 상도 많이 받았다.(웃음)

연극 <사랑이 불탄다>

- <동주>에 캐스팅된 일화가 매우 극적이다. 지하철에서 신연식 감독에게 캐스팅 제의를 받았다고. 당시 어떤 연기를 하고 있었나.

= 당시 <사랑이 불탄다>라는 제목의 연극을 하고 있었다. 배우들끼리 올린 연극이다 보니 홍보는커녕 PD조차 없었다. '연기만으로 우리를 기억하게 하자'는 마음으로 무조건 연기에 몰두했다. 그날도 지하철에서 연극 대사를 외우며 연습을 가고 있었다. 남녀가 싸우는 신이 많은 연극이다보니, 중얼중얼거리다 보면 얼굴도 울그락 불그락해지고 목소리도 커지고…. 그 모습이 건너편에 앉아 계셨던 신연식 감독님 눈에 들었던 거다. 감독님은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너무 이상하게 대본을 읽고 있으니까 같은 역에 내리면 명함을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계셨다더라. 그런데 정말 운명적으로 같은 역에 내리게 되어 명함을 받게 되었다. 후에 물어보니 내가 되게 특이해서 명함을 주고 싶었다 말씀하시더라.
특기에 일본어라고 적어 프로필을 냈는데, <동주>의 쿠미 역으로 연락을 주셨다. 여담으로 당시 연극의 상대 배우였던 손석구씨도 연극을 보러 왔던 캐스팅 디렉터의 눈에 띄었다. 현재 넷플릭스 드라마 <센스 8>에 출연 중이다. 완전 <라라랜드>다.(웃음)


<박열>의
주연 배우이자 스태프로

최희서는 <동주>에 이어 <박열>로 이준익 감독과 두 번째 작업을 이어왔다. <동주>의 쿠미가 동주의 갸날픈 조력자 위치에 서 있었다면, 후미코는 "우리 열이 많이 컸네"란 대사를 차지게 소화하는 <박열> 속 하나의 기둥이다. 알고 보면 최희서는 <동주> 개봉 전인 2015년부터 <박열>의 작업을 함께 해왔다. 연기자로서만 아니라 스태프로도 활약한 그녀의 지난날들을 물어보았다.

<동주>의 최희서, <박열>의 최희서와 이준익 감독

- <동주>에 이어 다시 한번 이준익 감독과의 작업이다.

= <동주> 작업 당시 후미코의 자서전을 읽으라 추천해주셨다. 읽어보니 너무 인상적이더라. 영화로 언제 만드실 거냐 물어보았더니, 다음 작품으로 들어갈 예정이라며 '시나리오 회의에 한번 와서 편하게 이야기해보자'고 하셨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동주> 후반 작업 당시의 일이니까 2015년의 말 즈음이다. <박열>은 내게 꽤 긴 작품이다.

- <동주>에서처럼 대사 번역 작업도 함께 했다고.

= <동주>에서는 '쿠미'를 연기함과 동시에 일본어 대사 번역도 함께 작업했다. 소품이나 미술 쪽에 일본어가 필요하면 번역을 하기도 했고. 그 작업의 연장선으로 <박열>에서도 김인우 선배님과 함께 대사 번역 작업을 함께 했다. 이번엔 <동주>보다 3배 정도 많았다. 직접 자료 조사를 하면서 '이 단어는 어떤 단어로 번역하는 게 나을까' 하나하나 고민하며, 내가 할 대사들을 더 내밀히 살필 수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번역은 한 달 정도 걸렸다. '하스요' 역을 맡은 윤슬 배우와 함께 진행했다.


최희서가 전하는
'후미코' 코멘터리

아래 스틸컷 속 최희서가 들고 있는 원고지 뭉치를 비롯해, 영화 속엔 수많은 종이 뭉치들이 등장한다. 최희서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후미코의 자서전을 제 손으로 직접 적었다. "원고지 100장 쓰는 데 얼마 안 걸려요" 하며 호쾌하게 웃던 그녀. 실제로 최희서는 본인의 홈페이지에 <박열> 비하인드 스토리를 연재하며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후미코와 여러모로 겹쳐 보이는 이 배우, 저만의 '후미코'를 어떻게 탄생시켰는지 물었다.

- <박열>에서 타이틀롤인 '박열'보다 '후미코'를 인상 깊게 본 관객들이 많다. <동주>에서 '동주'보다 '몽규'가 더 인상 깊었던 경우와 겹쳐 흥미로워 보이는데.

= <동주> 같은 경우는 '동주'가 내면으로 큰 울림을 전하고 '몽규'가 부분적으로 리드하는 느낌이었다. <박열>은 두 메인 캐릭터가 모두 적극적이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땐 후미코가 박열보다 더 도드라져 보일 거라는 생각은 없었다. '박열'이라는 두 글자를 보고 영화를 보러 오시는 분들이 많아 그런 게 아닐까. 게다가 나는 무명이었기 때문에 이제훈이라는 배우 옆에 이름이 있어도 존재감이 없었을 거다.(웃음) 히든카드라는 느낌으로 비쳤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후미코'란 캐릭터 자체도 여태까지 한국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다. 누가 연기했어도 분명히 주목받았을 캐릭터임은 분명하다.

- 후미코는 아나키스트다. 후미코를 연기하며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이었나.

= '아나키스트'는 굉장히 생소한 소재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무정부주의로 정의한다기보다는 어떤 '절대 권력에 저항하는 집단'이라고 생각했다. 아나키즘의 가장 큰 비전은 평등사상이다. 매우 현대적인 사상이라 공감하는 데 어렵지 않았다. 다만 유의했던 건 후미코의 내면이었다. 후미코를 연기하며 가장 집중해서 본 자료는 그녀의 자서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핍박받고, 부모님에게 버림받고… 그런 유년기의 경험이 모여 절대 권력에 맞서 싸우는 후미코란 인물이 탄생한다. 후미코는 자신의 강한 사상과 정신을 당당하게 피력하는 적극성을 지닌 인물이다. 반항심에 일부러 조금 더 힘을 주려고 했다.

박열의 시를 읽고 '동거합시다' 외치는 후미코

- <박열>의 시작은 후미코의 내레이션이다. 박열의 시를 낭독하는 목소리가 인상 깊었는데.

= 내레이션은 나중에 후시 녹음으로 작업했다. <동주>에서도 성우 같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웃음). 일본어를 할 때 특유의 톤이 있는 것 같다. 문제가 있었다면 내 억양이 표준 억양이 아니라 오사카 억양이었다는 점. 이준익 감독님은 <박열>을 전 세계 어디에서 봐도 '후미코'가 진짜 일본 사람처럼 보이길 바라셨다. 표준 억양으로 교정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녹음도 여러 번 하고. 표준 억양을 쓰는 인우 선배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 후미코는 박열의 시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실제의 최희서도 그럴 수 있을까?

= 시를 읽고 반하는 건 이해가 간다. 그 사람의 사상이 보이는 글, 특히나 긴 글도 아니고 짧은 글이었기에 더 충격이 크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 자리에서 동거를 하자고 하기엔...(웃음) 후미코처럼 급하게 프러포즈를 할 순 없겠지만, 누군가가 쓴 글을 보고 반할 수는 있을 것 같다.

-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후미코'의 모습이 궁금하다.

= 오랜만에 만나 사진을 찍는 장면이 좋았다. 이들은 옥중에 있다 2~3달 만에 만난 연인이다. 그럼 되게 반가워하거나, 손을 잡거나, 포옹을 할 것 같은데. 이들은 다르다. "여전하네", "나 어때, 괜찮아?" 할 뿐이다. 후미코가 박열을 보며 "처음 만났을 때의 거지 같은 모습 그대로야" 말하는 장면이 가장 좋았다. 익살맞게 주고받는 대화만으로 그들의 관계를 단번에 보여주는 장면이랄까.

- 위기에 닥쳤을 때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코를 찡긋하는 후미코의 표정이 인상 깊었는데.

=  영화 속에서 박열과 후미코는 만나자마자 동거하고, 동거하자마자 헤어진다. 정작 서로 만나는 장면이 많지 않다. 우리가 연인이고, 서로를 아낀다는 걸 관객들에게 계속 어필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만의 언어'를 만들었다. 그게 바로 코 찡긋 표정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제스처만으로 전해지는 무언가가 있지 않나. 원래 이제훈씨도 코밑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는 제스처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편집되어 잘 드러나진 않지만..(웃음)

- <박열>의 엔딩 크레딧 끝엔 박열의 가족 사진이 나온다. 박열은 22년 2개월을 복역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장의숙 여사와 결혼했다. 후미코를 연기하는 배우로서 한편으론 안타까웠을 것 같은데.

= <박열>은 스무 살, 스물 두 살 청춘들의 이야기다. 22년 만에 세상에 나와 아내를 만난 박열을 후미코도 이해할 거다. 아, 이에 대해선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실제 나와 친한 배우의 친구가 장의숙 여사님의 손자다. <박열>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분에게 연락이 왔다. 박열 의사와 가네코 후미코가 조명을 받는 것도 좋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둘만 기억하고 장의숙 여사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안타까워하더라.(장의숙 여사는 당시 국제신문 기자였다. 박열 의사와 장의숙 여사는 박열 출감 1주년 기념 특집 인터뷰로 만나 부부가 되었다.)


앞으로가 더 궁금한 배우,
최희서

한참을 '가네코 후미코'에 빙의해 인터뷰를 이어오던 그녀. "그간 꿈꿔왔던 역할이 있었나"란 질문에 입술 양 끝에 힘을 주고 곰곰이 생각한다. "주체성 강한 여성 캐릭터가 끌린다"며 두 눈을 빛내던 그녀는 올해 칸 심사위원을 맡았던 제시카 차스테인만큼이나 우아했다. 앞으로 시나리오 읽을 일이 배로 많아질 것 같은 이 배우. 흥미롭게도 <박열>과 같은 날 개봉한 <옥자>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올해의 기대작 속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해내는 그녀. 단연 올해의 발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옥자>에도 출연한다.

= <동주> 끝나고 오디션이 있었다. '최양'이라는 통역사인데 감독님이 <6시 내 고향>에 나오는 듯한 오버스러운 톤을 원하셨다. 촬영 중 소나기가 와서 처마 밑에서 비를 피했는데 옆에 제이크 질렌할이 서 있어 '대박'을 외쳤던 기억이 난다. 재미있게 촬영했다.

- 혹시 앞으로 연기해보고 싶은, 혹은 연기를 하며 꿈꿔왔던 캐릭터가 있다면.

= 아직 영화나 드라마로 많은 모습을 보여드리지 않아 '이런 걸 하고 싶다'는 건 없지만, 주체성 강한 여성 캐릭터가 끌린다. 개인적으로 이창동 감독님의 영화를 좋아한다. 한 여성의 변화 과정을 지긋이 따라가는. 캐릭터 자체가 비범하지 않나. 나약함과 강단 있는 모습의 공존이 매력적이다. 스릴러 장르에도 도전해보고 싶다. 추리하는 캐릭터도 재미있을 것 같다.

- 이준익 감독과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보는 건 어떨까?
= 감독님에게 "한국의 여성 캐릭터가 점점 사라지고, 주체성 있는 캐릭터도 많이 없고, '영화에 여성 배우들만 나오면 망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라 너무 아쉽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감독님께서 '네가 여성 캐릭터만 나오는 영화를 한번 써보라'고 말씀해주시더라. 박명신 선배님, 전혜진 선배님, 한예리 선배님과 함께 작업해보고 싶다. 진짜 대본을 써가면 검토해주실 것 같다. (웃음)


박열

감독 이준익

출연 이제훈, 최희서, 김인우

개봉 2017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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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에디터 신두영
씨네플레이 에디터 유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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