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봄밤> 속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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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판정을 받은 연인의 사랑 이야기가 한국 멜로드라마의 전형적 소재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가을동화>부터 <미안하다 사랑한다>, <너는 내 운명>, <눈물의 여왕>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품이 이 설정을 활용해왔다. 워낙 빈번하게 사용되다 보니 일부에서는 진부한 클리셰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강미자 감독이 연출한 영화 <봄밤>은 기존의 시한부 멜로드라마와는 확연히 다른 접근을 보여준다. 한 사람이 중병에 걸리고 연인이 헌신적으로 돌보는 일반적인 구조와 달리, 이 작품의 주인공 영경(한예리 분)과 수환(김설진 분)은 각자 다른 이유로 함께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영경은 이혼 후 자녀 양육권을 남편에게 빼앗긴 충격으로 폭음에 빠져 서서히 자살해가는 알코올중독자로 그려진다. 반면 수환은 사업 실패로 노숙생활을 하던 중 류머티즘 관절염 치료 시기를 놓치면서 점진적으로 죽음에 다가가는 인물이다. 권여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이처럼 각기 다른 상처를 안고 살아가던 두 사람이 우연한 만남을 통해 겪게 되는 이야기를 담았다.
특히 주목할 점은 영경과 수환 역을 맡은 한예리와 김설진이 실제로 20년 넘게 절친한 사이라는 것이다. 두 배우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신입생 시절 처음 만나 오랜 우정을 이어왔다. 먼저 캐스팅이 확정된 한예리가 김설진에게 시나리오를 건네면서 이번 작품에서의 만남이 성사됐다고 전해진다.
![영화 <봄밤> 주연 배우 한예리, 김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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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한예리는 "시나리오를 보여줬을 때도 설진 씨가 아니면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했고 촬영을 마치고도 생각이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수환이 영경을 온전히 잘 봐줬기 때문에 영경이 더 빛날 수 있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김설진 역시 "한예리라는 배우와 작업할 수 있다는 게 제겐 흔한 기회가 아니다"라며 "현장에서 본 예리 씨는 백자(白瓷) 같은 사람이었어요. 주변을 해치지 않으면서 은은하게 존재감 있고 빛나는 느낌이었죠."라고 전했다.
두 배우는 인터뷰에서 "둘이 함께할 수 있어 설레는 작업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한예리는 강 감독의 "이번 영화가 내 마지막 영화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즉석에서 캐스팅 제안을 수락했다. 그는 강 감독의 첫 장편 작품 <푸른 강은 흘러라>(2008)에 출연한 인연이 있다.
"강 감독님과 처음을 같이 했으니 끝도 같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예리는 당시 심경을 전했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받아본 후에는 "어떡하지"라며 걱정이 앞섰다고 털어놓았다. 한예리가 맡은 영경 역은 중증 알코올중독자로 설정되어 강 감독은 한예리에게 "아픈 게 눈에 딱 보일 정도로 말라야 한다"고 주문했다고 한다.
원래 마른 체형이었던 한예리는 초췌한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운동을 중단하고 절식을 통해 5kg을 감량했다. 상대역을 맡은 김설진 역시 극한의 변신을 감행했다. 그는 촬영 전 물조차 마시지 않으며 총 10kg의 체중을 줄였다.
![영화 <봄밤> 속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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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영경과 수환이 겪는 고통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후반부에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두 인물이 강추위를 뚫고 기어서 서로에게 다가가는 장면은 관객들에게까지 아픔이 전달될 정도로 강렬하다.
한예리는 영경과 수환의 관계에 대해 "부서져 가던 영경을 하루라도 더 살아내게 하는 사람이 수환"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죽음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인 만큼 절박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며 "서로가 없었다면 수환은 객사했을 것이고, 영경은 술 마시다 집에서 죽었을 거예요. 그래서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을 단순히 '사랑'이라고만 표현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라고 덧붙였다.
김설진은 영경과 수환의 관계를 '카드로 만든 집'에 비유했다. 아슬아슬해 보여도 서로의 무게를 지탱해주며 집의 형태를 갖춘 모습이 두 인물의 관계와 닮아있다는 설명이다.
![영화 <봄밤> 속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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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봄밤>은 주인공들의 관계성뿐만 아니라 영화적 형식에서도 기존 멜로 장르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영화는 세부 스토리를 과감히 생략해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동시에, 비슷한 장면을 반복 제시하는 독특한 구성을 택했다. 간결한 대사가 시적으로 다가오지만, 작품은 대사보다는 몸짓을 통해 사랑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뒀다. 한국무용을 전공한 배우 한예리와 손꼽히는 현대무용수 김설진의 조합이 이러한 연출 의도를 효과적으로 구현해낸다는 분석이다.
김설진은 "촬영하면서도 회화적인 영화라는 느낌을 계속 받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숏폼 콘텐츠를 보면 8차선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를 바라보는 것 같은데, 우리 영화는 잔잔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같은 영화로 다가갈 것"이라고 자부했다.
베를린국제영화제는 올해 2월 <봄밤>을 포럼 부문에 초청하면서 "슬픔을 다루지만 동시에 시와 빛,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작품"이라고 호평했다.
한예리는 "요즘 보기 드문, 다른 차원의 사랑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가 상업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연급 배우로 자리잡은 이후에도 독립영화에 꾸준히 참여하는 이유 역시 이와 맥을 같이 한다.
한예리는 "인물과 스토리가 납작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보다는 자기 이야기를 담으려는 연출자와 작업하는 게 더 재밌어서 작품을 폭넓게 선택하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독립영화 출연은) 제 나름대로 사치를 부리는 것이지만, 좀 더 사람이 보이고 이야기가 있는 작품이 좋다"며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