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트 블란쳇이 4월 FX 오리지널 미니시리즈 <미세스 아메리카>로 돌아왔다. 미국 드라마에는 첫 출연이다. 등장하자마자 에미상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된 그의 연기를 이제 왓챠에서도 만날 수 있다.
완전한 평등을 위한 성평등 헌법수정안 비준 VS. 여성으로서의 특권
<미세스 아메리카>는 1970년대 성평등 헌법수정안(Equal Rights Amendment, 이하 ERA)을 두고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다룬다. 수정안이 하원을 통과하고 효력 발휘까지 38개 주 승인만을 남겨두고 있던 상황에서 어떻게 비준이 좌절되었는지. 당대 미국 정치사가 어쩌다 퇴보로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는지를 그린다. ERA를 찬성하는 여성 해방 운동 진영과 이에 반기를 들고 주부로서의 ‘특권’을 주장하는 STOP(Stop Taking Our Privileges) ERA 진영이 극의 중심에 있다. 하지만 이 두 진영을 흑백으로 분간할 수 있는 무언가, 한 쟁점을 두고 양극단으로 갈라진 무언가로 그저 편히 정리해버릴 수는 없다. <미세스 아메리카>는 여성의 권리를 제 식대로 외쳐온 이들의 목소리에 대한 이야기다.
케이트 블란쳇, 그리고 블란쳇만큼이나 인상적인 배우진
9개 에피소드 중 7회까지의 각 에피소드는 주요 캐릭터의 이름을 타이틀로 하여 해당 인물을 집중 조명한다. 첫 에피소드의 주인공이자 갑자기 등장해 ERA 비준을 좌절시킨 장본인인 극우 공화당원 필리스 슐래플리는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했다. 케이트 블란쳇의 출연만으로 볼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한 이들도 많을 터. 블란쳇은 작품에 참여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필리스와 지향하는 바는 분명히 다르지만, 도대체 어떤 점이 필리스로 하여금 평등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는지 이해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필리스의 친구로 등장하는 극 중 유일한 가상 인물 앨리스 역은 사라 폴슨이 맡았다.
블란쳇 못지않게 강한 인상을 주는 배우들이 여성 해방 운동에 앞선 이들을 연기했다. 로즈 번이 여성 잡지 ‘미즈’(Ms.)의 편집장이자 사회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을, 우조 압두바가 흑인 최초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자 셜리 치점을 연기했다. 마고 마틴데일이 ERA 하원 통과의 1등 공신 여성 하원 의원 벨라 엡저그를, 트레이시 울먼이 여성 운동의 교본으로 여겨지던 <여성의 신비>를 집필한 베티 프리던을 연기했다.
이들이 차별에 대처하는 방법
군사학 전문가 필리스 슐래플리가 왜 갑자기 여성 인권 문제에 주목하고 안티 페미니스트를 자청했을까. 필리스가 말하듯 차별을 느끼지 않아서였을까. 밖에 나가 일 하지 않아도 되는,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되는 주부로서의 특권을 잃는 게 두려워서였을까. 아니다. 첫 에피소드는 당대 여성이 겪어야 했던 보편적 차별을 필리스를 통해 여실히 보여준다. 단적인 예로 이 시리즈의 오프닝 장면에서 필리스는 수영복 차림으로 선거 기금 모금 행사 무대에 서는 정계 인사 아내들 가운데 한 명으로 그려졌다. 필리스는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이 처우들을 당연시 여길만큼 둔감하지 않다. 50세가 넘는 나이에 미국 법대 입학시험을 높은 점수로 통과할 정도의 학식을 갖춘 것,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데 능한 달변가인 것과 관계없이 외모로 판단 받던 시대를 살아가는 그에게 권력 확보의 새 방법이 필요했다. 그런 그에게 공화당이고 민주당이고 할 것 없이 매달리고 있는 ERA라는 법안이 눈에 띄었고 그렇게 필리스는 스스로 페미니즘의 적이 됐다.
앞서 언급했듯 ERA를 두고 크게 두 진영으로 갈리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필리스 스스로도 자신이 설계한 논리의 오점에 부닥치는가 하면, 백인우월주의자까지 묵인하기도 한다. STOP ERA 집단 내 누군가는 인종 차별을 용납하지 않고, 같은 보수 공화당원이더라도 여성 해방 운동에 동참하는 질 럭겔스하우스(엘리자베스 뱅크스)는 또 다른 목소리를 낸다.
여성 해방 운동가들 쪽도 마찬가지다. ERA 비준을 지지하는 남성 후보자에게 표를 몰아주기 위해 흑인 여성 경선 후보자 셜리 치점의 후보 사퇴를 권고하는 벨라 앱저그의 모습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ERA 비준을 목표로 모였지만 인종, 종교, 부, 진보수, 낙태, 동성애에 대한 입장 차이로 다들 다른 우선순위를 가지고 운동에 참여한다. 이외에도 드라마는 소수자 집단 내의 소수자가 또 한 번 외면받는 장면들을 꾸준히 보여준다.
어쩌면 가장 역동적인 캐릭터, 앨리스
앨리스의 태도 변화에 대해 따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7회까지만 해도 필리스 옆에서 그를 동경하며 다소 수동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할 수 있는 앨리스는 휴스턴 전국대회 참여 후 기존까지 고수하던 STOP ERA 주장을 버린다. 고수했다고 하기도 애매한 것이 그저 똑똑해 보이기만 한 필리스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들을 따랐을 뿐이었다. 그런 앨리스가 반대 진영에 있던 이들을 직접 만난 후 필리스 거들기를 포기한다. STOP ERA 대변 방송 인터뷰에서 말을 더듬어 창피를 당하던 그가 극 후반에서는 공식 석상에서 필리스에게 또박또박 직언을 날린다. 어떤 상황에서도 외모에 신경 쓰고 STOP ERA 운동에 대해 말할 때보다 빵 레시피에 관한 대화를 할 때 더 활력을 보이던 그가 극의 마지막에서는 일, 노동이란 걸 시작한다. 필리스부터 벨라, 베티까지, 강하디강한 운동가들이 포진해 있었지만 이런 변화를 보여준 앨리스야말로 가장 역동적인 인물이 아니었을까.
여성 인권, 인종, 정치적 대립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모두에게 적용되는 진리란 것은 존재하는가. 어느 한 쪽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으면서, 그 누구도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모두가 제 권리를 지킬 수 있는가. 아름다운 장미의 목을 꺾는 퍼포먼스를 보이며 낙태는 이런 것이라고, 그저 생명을 죽이는 짓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기독교 신자 로티 베티 홉스(신디 드러몬드)가 1m 남짓 거리에서 동물의 생명을 무자비하게 앗는 역설적인 장면을 잊을 수 없다. 베티 프리던이 야시시한 옷이라며 노출이 있는 복장을 한 딸을 단속하다가도, 본인 스스로 그런 부류의 옷과 큼지막한 주얼리로 치장하고 TV 토론에 출연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잊을 수 없다.
<미세스 아메리카>는 여성 인권 역사를 그리고 있지만, 오직 여성 인권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내 편에서 내 식대로 생각하면 항상 내 입장이 옳다. 소수를 마주할 때 배척할 것인가. 그들의 의견을 잔인하게 묵살시킬 것인가. 2016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흑인의 인권을 말하던 크리스 록이 다음 시상자인 동양인 소년들을 소개할 때 미래의 회계사라며 공공연한 차별을 무지하게도 서슴지 않고 했던 것처럼, 또 다른 소수가 있음을 지각하지 않을 것인가. <미세스 아메리카>는 이런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씨네플레이 인턴기자 이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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