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포대학 재학 중 아사드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시위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와드는 시리아 내전을 영상으로 기록하기 시작한다. 친구인 의대생 함자는 임시 병원을 마련해 밀려드는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와드는 그 모든 과정을 쉼없이 기록으로 남긴다. 혁명의 성공을 의심하지 않았던 두 사람은 정부군이 도시를 고립시키는 동안에도 지지 않고 알레포를 지키는 것으로 투쟁을 이어가려 한다. 자연스레 사랑에 빠진 와드와 함자는 전쟁 속에서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진다. 세상에 태어난 딸에게 두 사람은 아랍어로 ‘하늘’이란 의미의 ‘사마’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공습이 없는 평화롭고 푸르른 하늘을 보고 싶은 마음으로. 그러나 내전은 점점 더 극심해지고, 한때 아름다웠던 도시는 갈수록 폐허가 되어간다.
아주 오랫동안 〈사마에게〉(2019)를 보는 일을 망설였다. 나는 〈사마에게〉가 국내 영화제에서 소개되었을 때 놓쳤고, 극장 개봉 당시에도 도망치듯 영화를 피했으며, VOD 서비스가 시작되고 OTT에 공개된 이후에도 클릭을 꺼렸다. 영화를 보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다. 오히려 반대였다. 내 주변의 신뢰할 만한 이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내게 영화를 추천했다. ‘여성의 시선으로 바라본 전쟁을 증언한다’는 특징이나, ‘자신이 사랑하는 도시와 가족, 혁명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카메라를 들었던 한 비디오 저널리스트의 기록’이라는 줄거리 모두 내가 각별히 좋아할 법한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영화를 볼 엄두를 내는 건 쉽지 않았다. 왜, 그런 영화들이 있지 않은가.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작품들. 나는 매일같이 공습이 이어지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희망을 놓지 않은 채 사랑을 하고 가족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젊은 부부의 이야기를 볼 자신이 없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내전의 한복판에서 그토록 위태로운 희망을 키워내려면 대체 얼마나 강인해야 하는 걸까. 픽션이 아닌 다큐멘터리이니 작품과의 거리를 두는 일도 쉽지 않을 터였다. 어느 순간 〈사마에게〉를 보는 일은 내겐 오래 묵은 숙제가 되어버렸다. 언젠가는 해야 하는 일, 하지만 마음을 내는 게 쉽지 않은 일. 마침내 영화를 볼 마음이 들었던 건 영화 개봉 후 3년, 시리아 내전 발발 이후 12년이 지난 2023년 1월이었다.
왜 잘 피해오던 작품을 홀린 듯이 보게 된 걸까. 정확한 계기가 무엇이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작년에 시리아 내전을 다룬 연극 〈더 헬멧〉을 봤던 게 계기였던 것 같기도 하고, 연일 싸우고 있는 미얀마 민주화 운동가들의 소식을 듣다가 〈사마에게〉를 떠올린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연초부터 우크라이나로 들어가 현지 상황을 전해준 한 지상파 방송사의 뉴스를 보다가 밀렸던 숙제를 떠올린 건지도 모른다. 아마 그 모든 것들이 조금씩 쌓이다가 〈사마에게〉로 이어진 것이겠지.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했고, 크고 작은 전쟁과 분쟁으로 죽고 다치는 이들은 매일같이 나왔다. 어디를 가도 절망을 피할 수 없다면, 더 도망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고심 끝에 접한 〈사마에게〉는 역시나 고통스러웠다. 손에서 좀처럼 카메라를 내려놓지 않는 성실하고 집요한 기록자인 와드는 전쟁을 관객의 코 앞까지 들이민다. 귀를 찢을 듯한 굉음과 흔들리는 화면 속에서, 와드는 미처 살리지 못한 시신들을 기록하고 울부짖는 시민들을 찍는다. 담담한 내레이션으로 동료들이 세상을 떠난 사실을 알리고, 조금씩 지쳐가는 이들의 절망을 기록한다. “집에 잘 있던 동생을 내가 괜히 나오라고 해서 죽게 만들었다”며 하염없이 자책하는 어린아이와, 아들의 시신을 품에 안고 비명을 지르며 집으로 돌아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건 끔찍한 경험이다.
화면 위에 직접적으로 죽음이 등장하지 않는 장면이라고 해서 평화로운 건 아니다. 정부군의 공습에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던 와드는, 사마가 포격에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매일 공습이 이어지는 알레포에서 태어난 사마에게 굉음은 날 때부터 겪어온 익숙한 일상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공습경보로 모두가 지하실로 피한 와중에도 사마는 태연하게 젖병을 물고 웃는다. 엄마는 딸이 이런 세상에서 태어나 자라야 한다는 사실이, 아이가 평화가 아니라 전쟁을 일상으로 여기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그저 미안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삶은 이어진다. 정부군에게 포위된 도시, 변변한 놀이터도 없는 아이들은 다 타버린 버스 뼈대에 색칠을 하고 논다. 어린 아이들도 어디선가 놀기는 해야 하니까. 색칠이 끝난 버스에 올라탄 아이들은 어디론가 떠나는 상상을 한다. 핸들을 잡은 아이도, 뒷자리에 타고 있는 아이들도 어디론가 가고 싶다. 그런가 하면 와드의 친구들은 병원 건물로 날아든 미사일의 파편 곁에 옹기종기 모여 앉는다. 정부군에게 포위되어 변변히 난방을 돌릴 수 없는 알레포의 겨울, 폭발의 잔열로 아직까지 후끈후끈한 쇳덩어리는 난로로서의 가치가 있다. 포격은 포격이고 추위는 추위이므로. 와드의 친구는 포격을 두고 “대통령이 캐스팅한 미사일, 포탄, 총알이 출연하는 일일 폭격 드라마”라고 말하며 너스레를 떨고, 첫째 사마를 이런 세상에 태어나게 한 걸 가슴 아파하던 와드는 둘째를 임신한다. 일상을 망가뜨리려고 작정을 한 정부군 앞에서, 알레포의 시민들은 일상을 지켜내는 것으로 투쟁을 이어간다.
어떤 사람들은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도 저항을 멈추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 어딘가에선, 남들이 다 가망 없다고 외면한 싸움을 끝까지 붙잡고 있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인간은 왜 꺾이지 않는가? 인간은 왜 전사가 되는가? 그 이유를 〈사마에게〉는 ‘사랑’으로 설명한다. “너 같은 아이들이 더는 고통받지 않도록, 우리 싸움은 전부 널 위해서였다. 바로 너, 사마.” 그러니까 〈사마에게〉는 절망과 고통의 기록인 만큼이나, 의지와 희망의 기록이기도 한 것이다. 사마와 같은 아이들이 다시는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지 않아도 되도록 어떤 식으로든 끝까지 싸우겠다는 투지, 자신이 찍은 영상들로 세상을 떠난 동지들을 영원히 기록하겠다는 의지, 언젠가는 반드시 그런 세상을 쟁취하고 알레포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
알레포의 집을 떠나면서 와드는 뒷뜰에 심었던 화분을 챙겨간다. 새로운 곳에 가서도 고향의 식물을 키워내려고. 영화를 보기 전엔 세상의 폭력에 절망했던 나는, 영화를 보고 난 뒤 와드가 그 화분을 고스란히 들고 알레포로 돌아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언젠가 외롭게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 올 것이라고, 그때까지 지치지 않는 것도 싸움이라고 믿으며.
이승한 TV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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