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번쯤은 ‘과거, 혹은 미래로 갈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어렸을 때 과학잡지에서 읽은 타임머신도 그랬었고 어른이 되고 나서는 로또번호(?!)를 생각해보기도 했다. 최근 비트코인에 대한 기사들을 읽다 보면 소위 가상화폐라는 개념이 처음 도입되었을 당시 속는 셈 치고 조금만 사 놨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도 잠깐 했었다.
실행할 수 없으니 결국 다 부질없는 이야기겠지만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불가능한 것을 동경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속성일지도 모르겠다. 아마 시간여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여행도 어디까지나 내가 자유롭게 시간을 여행할 수 있을 때 가치가 있는 일이지, 그 시간 속에 갇히고 만다면 글쎄? 농담으로라도 즐겁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영화 <사랑의 블랙홀>은 꽤나 재미있게 풀어낸다.
<사랑의 블랙홀: Groundhog Day>는 1993년에 헤럴드 레미스 감독이 만든 영화다. 빌 머레이와 앤디 맥도웰이 주연으로 나오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인데 원제인 Groundhog Day는 성촉절이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가 예수님이 태어난 지 40일 만에 정결 예식을 치르고 하느님께 봉헌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간 것을 기념하는 축일이라고 한다. 서력으로는 2월 2일이다. 영화 속에서 필 카너즈(빌 머레이)가 끊임없이 2월 2일만 반복하며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필 카너즈는 기상캐스터 일을 하고 있지만 매사에 불만이 많다 보니 주위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결국 본인이 원하지 않는 필드 취재를 펑츄토니란 작은 도시로 떠나게 되는데, 그곳에서도 제대로 일하지 않고 대충대충 무성의한 태도를 보인다.
마을 주민들은 취재진을 뜨겁게 환영했고 함께 취재에 나선 리타(앤디 맥도웰)도 마을에 좀 더 머물기를 원했지만, 작은 시골마을에 진저리를 치는 필이 고집을 부려 취재진은 서둘러 마을을 떠나려 한다. 하지만 갑자기 내린 눈 때문에 펑츄토니에서 하룻밤을 묵은 필은 그 다음날, 어제였던 2월 2일 성촉절이 다시 돌아온걸 알게 된다.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당황한 필은 이윽고 그날 하루에 생길 일들을 이미 모두 알고 있다는 걸 이용해 악의적인 장난도 치고 여자를 유혹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모든 것에 싫증을 내고 자살 시도까지 하는데, 심지어 자살을 해도 2월 2일 아침을 다시 호텔방에서 맞게 된다.
그렇게 모든 것에 지쳐가던 필은 재미삼아 취재진 일행인 리타를 유혹해보기로 하지만, 계속 실패하게 된다. 그녀를 유혹하기 위해 이것 저것 노력하게 된 필은 점점 그 과정에서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것들을 깨닫게 되고, 결국 그녀와 맺어지면서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꽤 오래 전 영화지만 지금 봐도 어색하지 않고 재미있는,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가장 유명한 영화 관련 사이트 중 하나인 IMDB의 TOP 250에도 올랐고, 내용은 좀 달라졌지만 우리나라에서 비슷한 컨셉의 연극으로도 제작되었다.
연애 시작 전 서로의 감정을 잘 모를 때 내가 좋아하는 걸 상대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면 묘한 호감이 생기게 된다. 극중 리타가 좋아하는 술이 무엇이라는 걸 필이 알게 된 후 그 다음 2월 2일 다시 만난 자리에서 필이 먼저 "난 이 술을 좋아해요"라며 밝히는 술이 있다. 버무스(Vermouth)다.
버무스는 와인에 여러 약초 등을 섞어 향을 더한 가향 와인의 일종이다. 브랜디나 시럽을 섞기도 하고 토닉워터의 원료로도 쓰이는 키니네나 쑥, 용담 같은 한약재 종류를 넣기도 한다. 그냥 마시기보다는 칵테일의 재료로 훨씬 많이 쓰이는데 특히 버무스를 만드는 브랜드 중 가장 유명한 마티니(Martini)는 그 자체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칵테일의 이름이 되었다.
빨간색에 단맛이 나는 스위트 버무스와 투명한 색에 쌉쌀한 맛이 나는 드라이 버무스 두 종류가 있고 영화에 나온 것처럼 칵테일로 만들지 않고 얼음을 넣어서 그냥 마시는 건 대개 스위트 버무스에 한한다.
다양한 브랜드에서 버무스를 생산하는데 예로 든 마티니 이외에도 친자노, 돌린, 안티카포뮬라 등 많은 브랜드의 버무스가 수입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마티니를 만들 때는 마티니 엑스트라드라이, 맨하탄을 만들 때는 안티카 포뮬라가 제일 맛있다고 생각하는데 내 주위의 프로 바텐더 분들은 드라이 버무스의 경우 돌린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훨씬 많은 편이다.
개인적으론 버무스를 꽤 오래 전에 접했다. 출장으로 스페인 마드리드에 갔을 때 일이다. 보통 유럽은 호텔 근처에 저렴하면서도 푸짐하게 아침을 먹을 수 있는 가게들이 항상 있는 편이라 그날도 호텔에서 나와 아침을 먹기 위해 가게로 들어갔다.
대부분의 남유럽 가게들은 혼자 오는 손님들을 위해서 바 형태의 자리를 마련해놓고 있는데 거기 앉아서 아침을 먹고 있다 보니 옆자리 손님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은퇴를 했을지 안했을지 살짝 헷갈리는 연배의 풍채 좋은 남자 손님이 식사를 하면서 올드패션드 잔(바닥이 두껍고 높이가 높지 않은 잔)에 얼음을 넣어 어떤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얼핏 보면 와인 색인데 왠지 와인은 아닌 것 같았고, 샹그리아인가 했는데 샹그리아도 아닌 것 같아 바텐더에게 물어보니 바로 마티니 로소(스위트 버무스)였다. 스위트 버무스를 칵테일에 섞지 않고 그냥도 마실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우리나라에선 버무스란 술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마시는 사람들도 대개 칵테일에 들어간 형태로 마시지 단독으로 마시는 경우는 흔치 않다. 칵테일에 쓰이는 술을 따로 마시면 안된다는 선입견이 널리 펴져있지만, 꼭 그러면 안된다는 법도 없다. 예컨대 술을 잘 못 드시는 분들에게 사이드카 칵테일에 들어가는 꼬앵뜨루라는 리큐르에 얼음을 넣어서 그냥 드리면 맛있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다.
버무스는 기본적으로 아페테리프, 즉 식전주이지만, 식후에 마셔도 나쁘지 않다. 바에 어느 정도 다니신 분들이라도 버무스를 칵테일 형태가 아니라 그냥 마셔보신 분들이 많지는 않을 것 같은데, 기회가 닿는다면 온더록 형태로 스위트 버무스를 드셔보셔도 좋을 듯 싶다. 풋풋하진 않지만 사랑스러운 필과 리타 커플처럼 매력있는 또 하나의 술을 만나실 수 있을 것이다.
데렉 / 술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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