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1968년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이후 좀비 영화라는 새 장르가 개척됐다. 당시 소수 관객들의 입소문이 아니었더라면 좀비 영화는 사라졌을 지도 모른다. 개봉 초기엔 폭력적이고 불건전하다는 이유로 주류 언론의 혹평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 좀비물의 인기는 꾸준하며 퀄리티도 폭풍 성장했다. 현실에 있을 법한 설득력 있는 이야기와 CG로 뛰어난 몰입감을 자랑하는 좀비 영화가 즐비한 요즘. 그 틈에서도 꿀리지 않는 기세로 조금 다른 취향을 유혹하는 좀비 영화가 있다. B급 감성으로 즐기는 좀비 영화 5편을 준비했다.


좀비랜드

Zombieland , 2009

<좀비랜드>

유쾌한 톤의 좀비물이라 비교적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잔인하게 물어 뜯긴 신체 훼손 장면도 크게 없는 편. 그러나 그건 좀비랜드에서 살아남기 위해 콜럼버스(제시 아이젠버그)가 터득한 일련의 규칙 덕분이다. 1번, 심폐 강화 운동. 달리기가 생명인 좀비들과의 사투에서 뚱보들은 먼저 죽는다는 것이 그 이유다. 2번, 확인 사살. 지금 이 좀비가 죽었나 안 죽었나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전에 총알 아깝단 생각 말고 머리에 정확하게 한 번 더 쏴야 한다. 이런 식의 33가지쯤 되는 노하우를 가지고 콜럼버스는 아슬아슬하게 좀비를 피한다. 돌진하는 좀비가 주는 긴장감, 콜럼버스의 침착하고 정확한 대처는 <좀비랜드>가 B급 유머를 무기로 하고 있다는 걸 일러준다.

<좀비랜드>

난장판이 돼 버린 도시에서 함께할 동지들을 만나게 되는 콜럼버스. 그러나 하나같이 괴짜들이다. 먼저 만난 탤러해시(우디 해럴슨)는 소심한 히키코모리 콜럼버스와는 영 딴판이다. 전형적인 마초에 괴팍하고 거침없는 성격이지만, 미국의 불량 과자 '트윙키'에 이상한 집착을 가지고 있다. 서로 외에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철칙을 가진 자매(엠마 스톤, 아비게일 브레슬린)까지 만나 기묘한 조합을 이루고, 이들은 할리우드에서 유일하게 좀비가 되지 않고 살아남은 배우 빌 머레이의 집에 방문한다. 한국에 개봉은 못했지만 전 세계 1억 달러를 벌어들인 성공한 좀비 코미디 <좀비랜드>. 어디로 튈지 모를 황당한 전개에 빠져있는 동안, 괴짜 4인방의 성장담까지 덤으로 선물 받을 수 있다. 속편 <좀비랜드 2>도 올 9월경, 한국 관객을 찾을 예정이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

Shaun Of The Dead , 2004

<새벽의 황당한 저주>

무료한 일상을 살아가는 29세 청년 숀(사이먼 페그). 전자제품 판매사원인 그는 직장에서도 별 볼 일 없는 취급을 받고, 여자친구 리즈(케이트 애쉬필드)는 우리의 연애가 지루하다고 말한다. 하필이면 정신 없던 통에 여자친구와의 중요한 약속까지 잊어버리게 되면서 결국 그는 차이고 말았다. 진탕 술을 마시고 깬 아침, 뉴스에서는 공격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들려오는데, 집 앞마당에서 서성이는 좀비를 발견한다. 위험을 감지한 숀은 결심한다. 사랑하는 여자친구와 가족들을 구하러 가겠다고.

<새벽의 황당한 저주>

<새벽의 황당한 저주>가 기발한 좀비 영화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장르의 혼합에 있다.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적인 플롯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여기에 좀비 영화의 공식을 결합했다. 거기에다 빠른 편집, 극단적인 클로즈업을 전매특허로 한 에드가 라이트의 연출기법까지 더해지며 경쾌함과 긴장 사이의 끈을 리드미컬하게 조절한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는 제목에서 보다시피 '황당한' B급 정서를 곁들인 조지 로메로 <새벽의 저주>의 패러디다. 잭 스나이더가 리메이크한 <새벽의 저주>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조지 로메로도 <새벽의 황당한 저주>를 호평했으며, 그의 영화 <랜드 오브 데드>에 에드가 라이트와 사이먼 페그를 카메오로 출연시켰다.


데드 얼라이브

Braindead , 1992

<데드 얼라이브>

<반지의 제왕> 시리즈로 팬을 거느린 피터 잭슨. 시간을 과거로 돌려 그의 데뷔 초를 보면 굉장히 매니악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고무인간의 최후>, <미트 더 피블스>, <데드 얼라이브> 3편이 그에 해당하는데, 특히 <데드 얼라이브>는 그를 저예산 B급 스플래터물의 제왕으로 만들어준 좀비물이다. 스토리는 복잡하지 않다. 주인공 라이오넬의 어머니(엘리자베스 무디)가 동물원에서 악마의 원숭이에게 물린 것이 발단이 됐다.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의 몰골이 흉측하게 변하다 결국 죽음을 맞이했는데, 재산을 노리고 찾아온 삼촌이 파티를 열고 파티는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데드 얼라이브>

이 영화에서는 얼마나 참신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육신이 뜯겨져 나갈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잔인함의 수위는 그야말로 뭘 상상했든 그 이상. 저예산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많은 양의 인공혈액을 사용한 영화로도 알려져 있다. 교회 신부가 화려한 쿵후 기술로 좀비들을 제압하는 장면이나, 잔디 깎이로 좀비들을 한 번에 갈아버리는 장면이 유명하다. 그밖에 잘린 신체 일부(심지어 장기까지도..)가 끝까지 살아남아 주인공을 공격하는 등 도대체 적당함을 모르는 황당무계한 신들이 <데드 얼라이브>의 B급 코미디를 책임진다. 물론 취향을 타겠지만 피터 잭슨과 B 무비의 팬이라면 아마도 이 영화에 물개 박수를 치게 될 것이다.


좀비 2 : 시체들의 섬

Zombi 2 , 1979

<좀비 2 : 시체들의 섬>

사실 이 영화는 1편이 없다. <좀비 2 : 시체들의 섬>(이하 <좀비 2>)이라는 제목을 단 건 일종의 페이크. 이탈리아 호러의 거장 루치오 풀치의 악명 높은 좀비 영화 <좀비 2>는 조지 로메로의 좀비 영화가 크게 흥행하면서 그 속편인 것인 양 보이기 위해 일부러 지은 제목이었다. 뉴욕 앞바다에 버려진 보트에서 발견된 좀비. 이를 조사하기 위해, 행방불명된 아버지를 찾는 딸과 신문기자가 외딴섬으로 떠난다. 알고 보니 좀비들의 섬이었다는 간결한 내용인데, 허접한 스토리에 시각적으로 강렬한 신들을 결합한 점이 바로 70년대 이탈리아 호러 장르(지알로, Giallo)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좀비 2 : 시체들의 섬>

영화감독이 되기 전 루치오 풀치의 직업은 의사였다. 그래서인지 좀비 영화에 흔히 나오는 장기(?)라던가 신체 훼손 부위에 공을 들인 티가 난다. 전직 의사에서 고어 영화를 찍는 감독이 됐다는 사실도 왠지 괴랄하다. <좀비 2>에는 독특한 장면이 몇 있다. 수중에서 좀비와 상어가 격투를 벌이는 희한한 신이 대표적인데, 물어뜯고 뜯기는 꽤나 격한 몸싸움을 벌이는 장소가 하필 물속인지라 느릿하고 묘한 느낌을 주는 격투신이 탄생했다. 살바도르 달리의 유명 단편 <안달루시아의 개>를 오마주한 장면도 인상적인 신 중 하나다.


플래닛 테러

Planet Terror , 2007

<플래닛 테러>

쌈마이 영화의 장인.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플래닛 테러>도 빼놓을 수 없다. B급 절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데쓰 프루프>와 함께 묶여 <그라인드하우스>라는 제목으로 발표됐다. 텍사스의 평화로운 시골 마을이 정체불명의 DC-2 바이러스의 무차별 살포로 좀비들의 세상이 된다. 고고 댄서(디스코텍에서 관중을 즐겁게 하기 위해 고용된 여성 댄서) 체리 달링(로즈 맥고완)은 좀비의 습격으로 한쪽 다리를 잃는데. 포스터에 보이는 로즈 맥고완의 기관총 다리는 단지 포스터 디자인이 아니었다. 다리를 잃고 슬퍼하는 그녀에게 남자친구 엘 레이는 "넌 과분하리 만큼 훌륭한 여자야. 이제 너의 진정한 능력을 보여줄 때야"라며 기관총 의족을 떡하니 달아준다. 이제부터 호쾌한 액션은 한층 화려해진다.

<플래닛 테러>

<플래닛 테러>와 <데쓰 프루프>는 세계관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동일한 캐릭터가 나오기도 한다. 두 편의 영화를 묶어 상영한다는 것이 낯설 수도 있지만, 과거 영화관에서 흔히 보던 문구 '동시상영'을 떠올리면 된다. 당시의 풍습을 재현한 두 감독은 과거 미국의 싸구려 영화관을 일컫는 단어 '그라인드하우스(Grindhouse)'를 제목에 썼다. 200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지만 일부러 노이즈가 많은 필름 상태를 구현했고, 중간중간 의도된 실수로 다른 예고편을 끼워 넣기도 했다. B급 감성 충만한 두 명의 감독이 싸구려 영화에 바친 헌정이나 마찬가지다.


씨네플레이 심미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