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시상식서 4관왕을 기록한 봉준호 감독(사진 출처= ©A.M.P.A.S.®)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이하, 아카데미)은 '로컬'이긴 하지만,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 시상식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올해 아카데미에서 <기생충>의 선 넘는 수상 행진을 보며 전 국민이 기뻐했던 이유도 바로 그 유명세에 있을 거다. 한국 영화가 전 세계로부터 인정을 받은 셈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의 권위와 상징성을 쉽사리 무시할 수 없기에 잘 만들어진 작품을 꺼내어 보고 싶은 날엔 과거 아카데미 수상 기록을 찾아보게 된다. 적어도 아카데미 딱지가 붙은 작품들이 '망작'일 확률은 거의(?)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준비했다. 이번 주말 시시한 영화 말고, 킬링타임용 영화 말고 탄탄한 연기력과 서사, 재미를 고루 갖춘 작품들을 보고 싶은 이들에게 아래 다섯 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작품성은 물론이거니와, 아카데미 시상식서 오래도록 회자될 기록을 세운 명작이니 적어도 선택에 후회는 없을 것.


<양들의 침묵>

감독 조나단 드미│출연 조디 포스터, 안소니 홉킨스, 스콧 글렌│118분

아카데미 역사상 단 3편뿐인 'BIG 5' 기록

영화는 안 봤어도 제목은 한 번쯤은 모두가 들어봤을 만큼 <양들의 침묵>은 스릴러 영화 장르를 넘어 영화 역사상 유의미한 흔적을 남긴 작품이다. 안소니 홉킨스의 섬뜩한 표정, 러닝 타임 내내 관객들의 심장을 조이는 교차 편집 방식까지. 왜 <양들의 침묵>이 걸작인지를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너무나도 많겠지만, 편리한 예를 들어 말하자면 <양들의 침묵>은 아카데미 시상식서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작품이다.

테니스계에서 사용하는 용어인 그랜드슬램은 영화계에선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을 모두 수상한 작품'으로 통용된다. 지금까지 아카데미 역사상 그랜드슬램과 함께 각본상(각색상)까지, 일명 BIG 5부문을 모두 달성한 영화는 단 세 편뿐이다.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그리고 <양들의 침묵>. '제64회 아카데미 시상식'서 <양들의 침묵>은 안소니 홉킨스와 조디 포스터가 각각 남녀 주연상을, 조나단 드미가 감독상을, 그리고 작품상과 각색상까지 거머쥐었다. 작품상과 감독상을 동시에 받은 작품으론 최근 수상작인 <기생충> 외에도 여러 작품들이 있지만 남녀 주연상을 동시에 석권한 작품은 많지 않다. 더 이상의 설명은 사치가 아닐까. 연기는 물론 연출력, 작품성까지 고루 인정받은 역대급 수상 기록만으로도 <양들의 침묵>을 '봐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왼쪽부터) 안소니 홉킨스, 조디 포스터, 조나단 드미 감독

작품상을 수상하는 <양들의 침묵> 프로듀서와 제작진


<브로크백 마운틴>

감독 이안│출연 제이크 질렌할, 히스 레저│134분

동양인 최초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기록적인 작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두 명의 천재 배우 제이크 질렌할과 히스 레저. 두 사람의 연기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작품 <브로크백 마운틴>. 카우보이인 두 남성의 동성애를 소재로 한 <브로크백 마운틴>은 당시엔 호불호 논란을 양산하기도 했으나, 그때나 지금이나 <브로크백 마운틴>이 선사한 먹먹한 여운을 부정하는 이는 없을 거다. 로맨스와 비극적인 얼굴을 동시에 보여준 배우들의 호연 뒤에는 이안 감독이 있었다.

이안 감독은 <브로크백 마운틴>을 통해 그가 얼마나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연출할 수 있는 만능 재주꾼인지 제 능력을 입증했다. 무엇보다도 세차게 휘몰아치는 주인공들의 감정을 담백하게 담아낸 이안 감독은 '제78회 아카데미 시상식'서 동양인 최초로 감독상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인종의 다양성에 있어 폐쇄적인 선택을 이어오던 아카데미였기에 그의 수상이 더욱더 뜻깊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이안 감독의 천재적인 예술성을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후 이안 감독은 <라이프 오브 파이>로 다시 한번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는 이안 감독

7년 뒤, <라이프 오브 파이>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는 이안 감독


<몬스터 볼>

감독 마크 포스터│출연 히스 레저, 할리 베리, 빌리 밥 숀튼│111분

역사상 유일무이한 흑인 여우주연상 수상자, 할리 베리

사형수들의 마지막 식사 혹은 연회를 지칭하는 단어에서 영화 제목을 차용한 <몬스터 볼>은 흑인 여성과 백인 남성의 사랑을 그린다. 사형수인 남편을 떠나보내고 아들마저 잃게 되며 삶의 희망을 잃은 러티샤(할리 베리)가 우연히 남편의 사형 집행관 행크(빌리 밥 숀튼)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벌어지는 여러 갈등과 변화에 대한 이야기. 인종 차별이라는 거대한 담론을 다루면서도 러티샤와 행크의 감정선을 미묘하고 섬세하게 표현해내며 많은 이들의 호평을 얻었다.

무엇보다도 <몬스터 볼>은 할리 베리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안겨준 작품이다. 할리 베리는 어디가 끝인 지도 모르게 꼬여버린 좌절에 빠진 마음은 물론, 외면할 수 없는 사랑에 스며든 한 여성의 얼굴을 완벽하게 그려냈다. 할리 베리가 '제74회 아카데미'에서 들어올린 트로피는 흑인 배우에게 돌아간 최초의 여우주연상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기록을 가진다. 씁쓸한 점은 아직까지 할리 베리 이후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흑인 배우가 없다는 것. 역으로 생각해 봤을 땐 2020년이 된 지금까지도 흑인 여성에게 문을 굳게 닫은 아카데미가 무려 18년 전 할리 베리에게 트로피를 안겨줬다는 건, 얼마나 할리 베리의 연기가 훌륭했는지 느낄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할리 베리의 수상 소감 장면


<라라랜드>

감독 데이미언 셔젤│출연 라이언 고슬링, 엠마 스톤│127분

아카데미 시상식 역대 최다 노미네이트 기록을 세우다

개봉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뜨거운 N차 관람 열풍을 이끌었던 <라라랜드>. 재즈 뮤지션을 꿈꾸는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과 배우를 꿈꾸는 미아(엠마 스톤)의 사랑 이야기라는 평범한 소재 위에 탄탄한 서사 구조, 아름다운 색채를 얹은 데미미언 셔젤 감독은 화려한 뮤지컬 영화를 완성시켰다. 때때마다 변해가는 사랑의 감정을 완벽하게 표현해낸 엠마 스톤과 라이언 고슬링의 호연 역시 돋보이는 작품. 결국, 뭐 하나 부족한 점 없이 관객들의 오감을 사로잡은 <라라랜드>는 그해의 아카데미 시상식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라라랜드>는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감독상, 남녀주연상, 촬영상, 미술상 등 총 13개 부문에서 14개 후보를 배출하며 아카데미 시상식 역대 최다 노미네이트 타이 기록을 세웠다. (동일 기록으로는 <타이타닉>과 <이브의 모든 것>이 있다.) 실제 아카데미의 결과 봉투가 열렸을 때도 <라라랜드>는 총 6관왕을 기록하며 그해의 주인공으로 등극했다.


(왼쪽부터) <라라랜드>로 감독상, 여우주연상, 미술상을 수상하고 있는 모습

(왼쪽부터) <라라랜드>로 음악상, 촬영상, 주제가상을 수상하고 있는 모습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감독 데이비드 O. 러셀│출연 제니퍼 로렌스, 브래들리 쿠퍼│122분

최연소 여우주연상 수상자 (X) 최초의 꽈당 수상 (O)

각각의 상처로 인해 두터운 마음의 벽을 세운 티파니(제니퍼 로렌스)와 팻(브래들리 쿠퍼)이 서로의 고장 난 마음을 고쳐가는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사랑스러운 장면들과 귀여운 사랑싸움으로 120분을 채우는 여타의 로맨스 영화와는 달리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분명 '사랑'을 그리고 있음에도 살벌하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선 상처를 꺼내야 하니까, 서로의 트라우마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티파니와 팻은 입에 담기도 힘든 말들로 서로를 긁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영화는 두 사람의 변화를 더욱 극적으로 그린다.

검은 비닐봉지를 뒤집어쓴 브래들리 쿠퍼의 호연도 좋았지만,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의 영웅은 단연 제니퍼 로렌스다. 팻과의 첫 데이트 식사 장면에서 모든 분노를 폭발시키는 티파니의 모습은 제니퍼 로렌스만이 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으로 제니퍼 로렌스는 아카데미 역사상 2번째로 어린 여우주연상 수상자가 됐다. 제니퍼 로렌스를 최연소 수상자로 기억하고 있는 이들도 많지만, 역대 최연소 여우주연상 수상자는 <작은 신의 아이들>에 출연한 생 마리 매트린이다. 어찌 됐든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으로 필모그래피의 정점을 찍은 제니퍼 로렌스는 아카데미 수상대의 계단을 오르다 넘어지며 더욱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최연소 여우주연상 수상자가 아닌 최초로(?) '꽈당'한 여우주연상 수상자라는 기록을 남겼다.


수상대에 올라가다 넘어진 제니퍼 로렌스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수상 소감을 이어간 제니퍼 로렌스


씨네플레이 인턴기자 유정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