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플러스의 출범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모바일 플랫폼이 성장하면서 TV가 집에 없다는 사람도 많아진 상황이고, 대부분의 인기 프로그램이 다양한 OTT 서비스를 통해 제공되고 있는 시점에서 디즈니 역시 넷플릭스를 위시한 OTT 플랫폼과 계약을 통해 콘텐츠를 제공하기보다는, 거대 기업에 걸맞은 자체 서비스를 하는 게 더 수지 타산이 맞았을 테니까.

덕분에 넷플릭스와 함께하고 있던 '디펜더스'들은 갈 곳을 잃은 채 향방을 알 수 없게 되었지만(여기에, <퍼니셔>까지) 대신 디즈니 플러스는 기존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배우들이 그대로 등장하는 스핀오프 시리즈들을 공개했다. 개중 가장 먼저 제시되었던 것은 지난 6월 9일 대망의 첫 에피소드를 공개한 <로키>였다.

톰 히들스턴의 토르 역 테스트 영상 중에서. 왜 떨어졌는지 불만 품고 있다가 미팅 자리에서

웬 북유럽 신(크리스 헴스워스)이 앉아 있는 걸 보고 납득했다는 얘기는 이제 유명..

로키는 MCU의 수많은 캐릭터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원래 토르 역 오디션을 봤던 톰 히들스턴이 그대로 토르로 캐스팅되었다면 어쩔 뻔했나 싶을 정도로, 그의 개인적인 커리어에서나 <토르> 시리즈와 <어벤져스>에서나(이쪽은 좀 골칫덩이였겠지만) 흥미로운 지점들을 다수 남겨 주었기 때문이다.


그 장면이 유독 허탈했던 이유는…

"약속해, 형. 태양이 다시 우릴 비출 거야"(I assure you brother, The sun will shine on us again)

이런 대사를 치고 가시면 어떡해요…

MCU의 로키는 서리거인의 왕 라우페이의 아들이었으나 오딘에게 입양돼 토르와 함께 아스가르드의 왕자로 성장했다. 호전적이고 불같은 성격의 형 토르와의 찐득찐득한 관계성은 시리즈 3편을 거치는 동안 죽음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며 폭발적으로 분출되기도 했고, 일견 평화롭게 이어지는 것 같았다.

아스가르드의 비극이자 종말이었던 라그나로크를 거치며 로키는 토르와 함께하는 것 같았고, 그 수많은 죽음과 거짓말 속에서 혼란스럽게 얽히다가 결국 드디어 모든 걸 받아들이고 해피엔딩을 맞는가 했다. 하지만 '인피니티 워'가 본격적으로 개전하기도 전에 로키는 죽음을 맞이했다. 기대감과 설렘을 안고 들어간 영화관에서 자리에 앉자마자 그의 죽음을 목도해야 했던 수많은 팬과 관객들이 얼마나 허탈감에 휩싸여야 했던가.

<어벤져스: 엔드게임>에 등장한 로키

하지만 1년 후 로키는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복귀했는데, 그야말로 '거짓말과 장난의 신' 로키에게 어울리는 장면이었다. 본의 아니게 태서랙트를 놓쳐 버린 토니 스타크의 실수로 연행되고 있던 로키의 손에 태서랙트가 다시 들어가고 말았고, 기회를 놓치지 않은 로키가 태서랙트를 이용해 도망가 버렸다(참으로 그답다).

이미 로키의 죽음을 1년 전에 목격했던 팬들은 환호했다. 로키가 돌아올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로키가 기존의 MCU 타임라인에서 벗어남으로써 새로운 타임라인이 생성되었고, 우리가 아는 그 로키는 아닐 수도 있으나 그 '로키'는 생존하여 다시금 스크린에 등장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디즈니는, 얼마 후 디즈니 플러스의 출범과 <로키>의 제작을 확정 지었다.


그 로키, 또 무슨 사고를 칠 것인가

톰 히들스턴이 디즈니와 계약한 영화 편수가 다 끝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로키>에 톰 히들스턴이 그대로 출연하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톰 히들스턴의 로키가 그대로 시리즈에 등장한다는 소식이 확정되면서, 시리즈 공개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많은 가능성을 점쳐 볼 수 있었다.

<토르: 다크 월드>의 그 장면.

로키는 등장한 MCU 작품에서 늘 죽거나(혹은 죽음을 가장하거나) 태서랙트를 향한 야욕을 불태우거나 했는데(실제로 손에 넣어 어벤져스와 지구인들을 위험에 빠뜨리기도 했고),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그 장면은 로키가 정말로 죽고 말았다는 그 맥없는 현실 때문에 한층 더 비극적이었을 정도다.

어쨌든 <어벤져스>에서 태서랙트를 손에 넣은 로키는 늘 기가 막혔다. 그 유명한 장면, "Kneel!"부터 시작해서 가장 충실한 동료이자 요원이었던 호크아이를 조종하기도 했으며 형인 토르를 놀려먹고 속이는 건 거의 기본기에 가까웠으니까. 때문에 태서랙트를 손에 넣은, 토르와 화해 비슷한 것조차 하지 못한 상태였던 그 2012년의 로키라면 도대체 어떤 사고를 치고 다닐지 흥미진진(히어로들에겐 아니겠지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티저, 그리고 1화: 타임라인의 혼돈

로키(톰 히들스턴)와 드라마에서 첫 등장한 모비우스 M. 모비우스(오웬 윌슨)

물론 디즈니는 로키가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게 내버려 두지 않았는데... 티저 영상에서 알 수 있듯 TVA(Time Variance Authority, 시간관리국)에서 로키를 붙잡아 그쪽 요원으로 섭외하려고 한다. TVA는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어벤져스 멤버들의 시간 여행과 스톤 회수 등으로 인해 바뀌어 버린 역사, 혼란스러워진 타임라인을 관리하는 기관이며 <로키>를 통해 처음 소개된다.

사실 그렇다. 로키의 진짜 매력은 여기에서 온다. 엄청나게 강한 존재인데도 익살스럽고, 본인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동료처럼 보였던 존재를 속여넘기는 것도 서슴지 않지만, 늘 어딘가에선 '당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서리거인에게서 태어나 아스가르드의 왕자로 길러진 마법사인 데다, 거짓말과 장난의 신으로 알고 보면 슈퍼솔져 혈청을 맞은 캡틴 아메리카보다 피지컬이 좋다. 로키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늘 로키보다 인정받는 형 토르가 있었으며 누구도 로키를 무릎 꿇리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지구에서조차 헐크에게 두들겨 맞은 바 있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로키를 무려 30분간 낙하시킨(심지어 그러는 동안 토르는 맥주를 마셨고...) 적도 있지 않나.

뭐든 제멋대로인 캐릭터도 재미있는 부분이 있지만, 로키는 어지간해서는 지지 않는 신인데도 불구하고 늘 매 편! 형을 비롯한 많은 존재들에게 맥없이 당해 왔다. 얼핏 어처구니없긴 하지만, 자기 목표를 위해서라면 배신 정도는 가볍게 할 수 있는 이분 '로키'에게는 억제제가 필요하다. 그게 더 재미있으니까. 그 억제제가 지금까지 형인 토르 혹은 어벤져스였다면 <로키>에서는 TVA다. 말하자면 이제 혈육이나 동료가 아니라 상사한테 괴롭혀진다는... 뜻이다.

뭔가 당하면 당할수록 흥미로워지는 남자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9일 공개된 에피소드 1의 내용을 디테일하게 언급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그간의 물음표들과 의문들 그리고 2012년의 '로키'로의 화려한 복귀가 성사되었다는 점이다. 시작부터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모았던 디즈니 플러스의 기대작다운 1화였다는 점, 더불어 MCU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멀티버스와 타임라인을 TVA라는 단체를 통해 어떻게 풀어갈지도 흥미진진한 볼거리 중 하나다.

티저영상에선 미 대통령 선거 뱃지까지 달고 있으니

여기에 여전히 쫄깃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 '로키'가 과연 '로키'였다는 점까지, 기다린 만큼 흥미로운 지점들을 보여준 첫 에피소드에 이어 시즌 내내 어떤 이야기를 펼쳐갈 것인가를 지켜봐야 할 때다.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대의가 있기는 했으나 TVA에게는 야근 각이었을 그 시간여행의 여파가 어디까지 갔을지, 더불어 향후에도 로키의 재등장을 점쳐볼 만한 여지가 있을지도 관전 포인트가 될 수 있을 듯.

더불어 <로키>도 공개된 마당에, 하루빨리 디즈니 플러스의 국내 서비스 계약이 타결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로키> 공개될 무렵엔 시작할 거라는 꿈을 꾸었는데….


프리랜서 에디터 희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