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대해 잘 모르고 관심도 없던 시절에 가끔 접했던 양주들이 있다. 출장 가면 면세로 싸게 살 수 있는 터라 뭣도 모르고 사왔던 발렌타인이나 로열살루트 같은 스카치 블렌디드 위스키가 있었고, 술집에서 오늘은 돈 좀 쓰고서라도 소위 양주를 마시고 싶었던 때 시키던 J&B나 잭 다니엘 같은 술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J&B는 그다지 맘에 드는 술이 아니었지만, 잭 다니엘은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은데다 맛도 달달해서 가끔 시켜서 마시곤 했는데, 특히 술을 잘 못하는 친구가 섞여 있더라도 술을 좀 덜 넣고 콜라를 많이 넣어서 마시면 서로 즐겁게 마실 수 있어서 애용하곤 했다.

그러다 접하게 된 영화 <여인의 향기>. 워낙 오래전에 본 영화라 거기 잭 다니엘(Jack Daniels)이 나왔다는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영화를 보다 보니 도입부부터 잭 다니엘이 나오길래 오래간만에 마시고 싶어 영화를 멈추고 마트로 달려가 한 병 사 왔다.
 
잭 다니엘엔 보통 콜라를 섞어서 소위 잭콕을 만들어 마시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단 걸 좋아하지도 않고 딱히 뭔가를 섞어 마시고 싶지도 않아서 그냥 얼음을 하나 넣고 플레이 버튼을 다시 눌렀다. 그 뒤로 나는 알 파치노가 만든 세계에 깊숙이 잠겨 들어갔다.

영화 <여인의 향기>는 명문학교에 다니는 가난한 고학생이 아르바이트로 눈이 먼 퇴역 장교를 보살피는 일을 맡았다가 이 둘이 함께 여행하면서 겪는 이런저런 일들을 때론 격정적으로, 때론 담담하게 그려낸다. 한때는 세상 무서울 것이 없는 군인이었던 프랭크(알 파치노 분)는 장님이 되어 친척의 집에 얹혀살고 있다.

상처 입은 짐승이 더 사나운 법이라, 그를 보살피러 온 찰리(크리스 오도넬 분)에게도 온갖 심한 말을 하며 상처를 주는데 영화를 보면서 이 영화 첫 장면에서 그를 더 불쌍하게 느낀 건 나만은 아닐 것 같다. 프랭크는 죽기로 결심하고 마지막 여행을 찰리와 함께 떠나는데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겪고 결국 찰리뿐만 아니라 프랭크도 변화하며 영화가 마무리된다.
 
영화 속에서 그가 즐긴 잭 다니엘은 미국 테네시주에서 생산되는 위스키이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위스키는 보통 버번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되지만 생산자 측은 일반적인 버번위스키의 생산 방법과 다르게 잭 다니엘을 생산하기 때문에 버번이 아닌 테네시 위스키라고 불러주기를 원한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증류한 원주를 오크통에 숙성시키기 전 단풍나무 숯으로 만든 필터로 필터링을 해 잔여물을 제거하고 풍미를 더하는 기법을 쓴다.

스탠다드 타입인 No.7 이외에 젠틀맨잭 같은 고급품도 있지만 No.7이 가장 많이 소비되며, 위에 언급했다시피 보통은 콜라와 섞어 잭콕이라는 형태로 많이 소비된다. 하지만 뒷맛이 둥글둥글한 특성이 있어 온더락으로 부드럽게 마시기도 편하며 개인적으로는 콜라 대신 탄산수를 넉넉하게 섞어 하이볼로 마시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혹시 잭 다니엘을 하이볼로 마셔보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꼭 한번 드셔 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다.
 
마음을 다친 이를 위로하는 것은 종종 술이나 담배다. 몸에 해로운 것이 정작 마음엔 이로울 수 있다는 것인데 살다 보면 이런 역설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영화에서도 삶에 지쳐 자살을 결심하고 여행을 떠난 스티브가 이 영화의 명장면인 탱고를 추기 전 하는 대사에선 "스텝이 엉키면 그게 탱고예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그게 삶, 살아감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누구나 순간을 살아간다. 영화 속에서 스티브는 "어떤 사람에겐 몇 분이 인생 전부죠"라는 명대사를 남긴다. 그 순간 나는 잭 다니엘을 마시고 있었다. 개봉한 지 20년이 넘은 영화 속 알 파치노의 푸르스름한 칼날 같은 연기에 전율을 느끼며 나는 잔에 남은 마지막 잭 다니엘을 목으로 넘긴 후 그의 대사를 작게 따라 해 보았다.
 
“Any minute? Some people live a lifetime in a minute.”
 
내 인생 전부 같은 몇 분은 나에게 아직일까, 아니면 이미 지나갔을까? 궁금해진다.

<여인의 향기> 탱고 장면

데렉 / 술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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