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니셰린의 밴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삐딱해서 그런 걸까. 자신에게 다가오는 파우릭(콜린 파렐)을 밀어내기 위해 양털 가위로 제 손가락을 잘라내는 콜름(브렌단 글리슨)을 보며, 난 그런 생각을 했다. 오른손가락을 잘랐어도 됐잖아? 콜름은 왼손가락을 잘라낸 탓에 음악의 가능성을 크게 잃었다. 현을 누를 왼손가락이 없으면 피들을 연주하는 건 불가능하다. 오른손가락이 없어도 연주가 어려운 건 마찬가지겠지만, 하다못해 붕대 따위로 활을 오른손에 고정시키고 피들을 연주하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않은가? 실제로 그렇게 바이올린이나 피들을 연주하는 이들도 있으니, 콜름도 오른손가락을 잘라냈으면 이야기가 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콜름은 파우릭을 밀쳐내겠다며 끝끝내 왼손가락을 잘랐다. 처음엔 검지를, 그 다음엔 엄지부터 새끼까지 나머지 네 개를. 제 성질을 못 이겨 왼손가락 다섯 개를 다 잘라 던진 끝에, 콜름은 이제 피들을 연주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남은 생애는 작곡하는 데 투자하고 싶다던 양반이, 자기가 작곡한 곡을 연주할 수 없는 상태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기껏 완성한 곡을 음대생들과 합주하던 날, 콜름은 오른손으로 피들을 쥔 채 허공에 흔드는 것으로 연주를 대신한다. 아무리 ‘너랑 시간을 보내느니 차라리 손가락을 자르는 게 낫겠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일이 중요했다고 해도 그렇지,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란 말인가.

마틴 맥도나의 신작 〈이니셰린의 밴시〉는 어느 순간 왜 싸우게 된 건지 잊어버린 채 끝없이 상처 입고 상처 입히는 두 남자의 이별을 그린 작품이다. 콜름이 애초에 파우릭과 결별하려던 건 ‘의미 없는 대화’ 대신 사색과 음악으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손가락을 다 잘라버렸으니 이제 음악의 가능성은 대폭 줄어들었다. 신부(데이빗 피어스)에게 고해성사하는 걸 엿듣자니, 사색하며 행복한 것 같지도 않다. 여전히 콜름은 정체 모를 좌절감에 휩싸여 있다. 다른 게 있다면, 예전엔 왼손가락과 함께 좌절했는데 이젠 왼손가락 없이 좌절한다는 점이겠지. 이게 다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나 상처받았다’는 걸 보여주고야 말겠다는 콜름의 고집이 부른 일이다. 그래, 손가락을 잘라서 던지면 파우릭이 납득을 할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게 콜름의 음악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 파우릭과 헤어지려던 이유는 어느새 중요치 않아졌다. 지긋지긋한 파우릭을 떼어 놓는 일에 대한 집착이 콜름을 집어삼켰다.

파우릭이라고 다르진 않다. 파우릭이 콜름에게 기를 쓰고 다가간 건 콜름과의 사이를 복원하기 위해서였다. 무엇 때문에 내가 싫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한 발 더 다가가면 콜름도 못 이기는 척 나를 다시 받아주겠지. 하지만 애지중지 키우던 당나귀 제니가 콜름이 던진 손가락을 잘못 주어먹다가 목이 막혀 죽은 이후, 파우릭에게 화해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아니, 화해를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애초에 왜 싸우기 시작했는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영원히 망가졌으니, 자신도 콜름을 망가뜨려야 직성이 풀릴 판이다. 파우릭은 콜름이 집 안에 있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콜름의 집에 불을 지른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서로만 잃은 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잃고 만다. 콜름은 손가락을 잃었고, 집을 잃었고, 마을에서의 평판을 잃었다. 사람들은 들쑥날쑥 멋대로 손가락을 잘라낸 흔적이 역력한 콜름의 손을 보고 흠칫흠칫 놀란다. 파우릭은 싸움통에 동생 시오반(캐리 콘돈)을 본토로 떠나 보냈고, 자신을 섬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라 여기며 따르던 동네 바보 도미닉(배리 케오간)의 신뢰를 잃었다. 무엇보다,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잃었다. 파우릭은 이제 콜름을 상처 입히기 위해 콜름과 어울리는 사람들에게 잔혹한 거짓말을 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콜름은 어제의 콜름이 아니고 파우릭도 어제의 파우릭이 아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사라지자 관계 속의 두 사람도 함께 사라졌다.

어쩌면 세상의 많은 싸움들이 이와 같은지도 모른다. 분명 싸우기 시작한 목적이 있었을 텐데, 합리적이고, 납득이 가고, 심지어 생산적이기까지 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싸움을 계속 하다보면 싸움 자체만 남는다. 싸울 때 상대방의 '말뽄새'가 못마땅하고, 싸울 때조차 눈 앞의 나에게 집중하는 게 아니라 자꾸만 다른 곳을 힐끔힐끔 바라보는 상대의 무심함이 짜증이 나고, 싸우는 과정에서 상대가 사용한 단어가 거슬리고, 아무리 내가 싫어도 그렇지 뭘 저렇게까지 유난을 떨 일인가 싶어 빈정이 상하고… 처음 싸우기 시작한 이유야 아무래도 상관 없어진 이후, 우리는 싸우고 있기에 싸우고 앞으로 계속 싸우기 위해 싸운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된 아일랜드 내전이 그랬다. 급진파와 온건파가 아일랜드 독립의 방식을 두고 서로에게 총구를 겨눴던 아일랜드 내전은, 뒤로 갈수록 이유야 아무러면 어떤가 싶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형집행을 돕기 위해 본섬으로 들어가야 한다던 키어니 경관(개리 라이던)은, 누가 누구를 사형하는 거냐고 묻는 콜름의 질문에 대꾸한다. “자유국군이든 IRA든 무슨 상관이에요. 사형 구경하고 공짜 점심도 먹는다는데.” 조국의 미래를 두고 동지들끼리 치열하게 논쟁하다 시작된 내전은, 어느새 시골 경찰관에 의해 ‘누가 누구를 죽이는가 따위가 뭐가 중요하냐’는 조롱을 당하는 싸움이 되었다. 대의도 동지애도 모두 사라지고, 그저 싸우는 자들만 남은 싸움.

영화의 말미, 잿더미가 된 제 집 앞 해변에 나와있던 콜름은 파우릭을 보고 말한다. “집을 불태웠으니 이제 된 거지?” 파우릭은 냉랭하게 대꾸한다. “당신이 집에서 나오지 말고 안에 있었어야 된 거죠.” 상대가 죽어야 끝나는 일인데, 죽지 않았으니 언젠가 다시 시작할 것이라는 극언. 이는 본토에서 벌어지는 아일랜드 내전의 상황과 정확한 대구를 이룬다. 콜름이 “본토에서 총성이 들리지 않은 지 이틀쯤 됐네. 전쟁이 끝나가는 모양이야.”라고 언급하자, 파우릭은 이렇게 말한다. “머지 않아 다시 시작할 걸요. 어떤 일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법이니까요.”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게 좋은 것 같아요.” 그게 왜 좋은 걸까? 오래 싸운 끝에 이제 싸움이 그의 본질이 되어버린 탓이 아닐까? 그 날, 폐허가 된 건 콜름의 집만은 아니었으리라. 누군가를 계속해서 미워할 거리가 있다는 걸 ‘좋은 것 같다’고 여길 만큼 망가진 사람 또한, 어떤 의미에선 폐허가 아닐까?


이승한 TV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