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사라져가는 왕년의 대스타를 포착한 클로즈업

최근 개봉한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바빌론>(2022)은 1927년 토키(유성영화)의 등장으로 무성영화가 급속도로 사라지던 시절의 할리우드를 뒤돌아보는 회고담이다. 무성영화 시절 대스타 잭(브래드 피트)과 잭의 도움으로 영화계에 입문한 매니(디에고 칼바), 그리고 스타를 꿈꾸는 넬리(마고 로비)는 새로운 유성영화 시대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부유하는 캐릭터들이다. 유성영화의 도래로 인해 이들의 꿈은 산산조각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잭과 넬리의 운명은 때 이른 죽음으로 귀결되고, 영화계를 떠난 매니만 살아남아 1952년 LA의 한 극장에서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보며 화려했던 과거의 무성영화 시절을 반추한다. 격변기 영화 역사와 아웃사이더 영화인들에 관한 영화인 <바빌론>은 수많은 고전의 오마주로 가득 차 있다. 영화 곳곳에 여러 영화의 인장과 더불어, 영화의 엔딩에는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의 활동사진부터 <아바타>까지 영화 역사를 바꾼 영화들의 몽타주가 삽입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시네마 천국>, <사랑은 비를 타고>, <선셋 대로> 등은 <바빌론>에 많은 영향을 준 영화로 손꼽을 수 있는 작품들이다. 특히 <선셋 대로>는 무성영화 시절을 회한에 찬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바빌론>과 여러모로 닮아있다.

<선셋 대로>(왼쪽), <바빌론>

1950년작 <선셋 대로>는 일종의 무성영화 시대 후일담이다. 가난한 시나리오 작가 조(윌리엄 홀든)가 빚 독촉에 쫓겨 우연히 선셋 대로에 위치한 대저택에 도착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이 거대하고 흉물스러운 저택의 주인은 무성영화 시대의 스타 노마(글로리아 스완슨)이고, 그의 충실한 집사 맥스(에리히 폰 슈트로하임)는 무성영화 시절 잘나가던 감독이다. 조의 불시착을 계기로 조와 노마의 이상한 동거가 시작되고, 조는 노마가 기획한 <살로메>의 시나리오를 제안받게 된다.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각각 조와 노마 캐릭터로 표상되는 유성영화 시대와 무성영화 시대의 갈등과 균열이다. <선셋 대로>의 영화의 순간은 이러한 갈등과 균열을 전경화한 장면들이다.


사진 1

사진 2

<선셋 대로>의 첫 번째 영화적 순간은 1분 40초에 이르는 압도적인 롱테이크 크레인 쇼트이다. 카메라가 크레인 다운하면서 도로의 블록에 새겨진 영화 타이틀이자 도로명 ‘SUNSET BLVD’를 잡아주다 천천히 수평 이동한다. 한동안 도로를 비추다 크레인 업해서 급박하게 노마의 저택으로 내달리는 경찰차와 보도 차량의 행렬을 보여준다. 영화의 타이틀 시퀀스(사진 1, 사진 2)를 전경화한 이 크레인 쇼트는 긴장감을 자극하는 사운드와 주인공 조의 “이곳은 캘리포니아 LA의 선셋 대로입니다. 지금은 새벽 5시쯤 됩니다”하는 1인칭 내레이션이 결합하여 영화가 할리우드 선셋 대로, 즉, 영화의 메카에서 펼쳐지는 스토리라는 공간적 함의를 띄고 있다. 선셋 대로 이후 이어지는 공간은 경찰차와 기자들이 도착한 노마의 대저택이다. “왕년 대배우의 살인사건”이라는 내레이션이 흐르고, 기자들이 수영장에서 조의 주검을 발견한다(사진 3). 이어지는 쇼트(사진 4)는 조의 표정이 강조된 극단적인 로우앵글이다. 물에 뜬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죽어 있는 조의 모습은 한 사내의 비극적인 인생유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쇼트이다. 그로테스크한 조의 표정 쇼트 이후 화면은 마치 수영장에 햇빛이 스며드는 것처럼 화이트인 된다(사진 5). 이후 영화는 긴 플래시백을 통해 조가 죽음에 이르게 된 사연을 소개한 다음, “바로 여기서 영화가 시작한 거죠” 조의 내레이션과 더불어 수영장 씬으로 되돌아간다. 다시 도입부의 화이트 인과 조의 주검을 보여주는 사진 5, 4가 역순으로 반복되면서 수미상관의 내러티브를 완성한다.

사진 3

사진 4

사진 5


이 구조적인 영화의 두 번째 영화적 순간은 공간의 대비를 통해 찾아온다. 젊음과 자유를 표상하는 조와 조의 친구들 공간과 과거의 구속을 표상하는 노마의 공간은 양립하기 힘든 공간이기에 파멸의 내러티브로 조와 노마를 인도한다. 사진 6, 7, 8의 공간은 조가 자유를 느끼는 공간이자 그에게 창작의 원천을 제공하는 장소이다. 영화인들로 가득 찬 조감독 아티의 집, 파라마운트 시나리오 검토부 직원 베티의 사무실 등은 소박하지만, 에너지가 넘치는 개방적인 공간이다. 아티의 집에서 열리는 송년 파티 장면에서 조의 영화인 친구들이 피아노를 치며 부르는 “우리에게 할리우드는 멀고, 풀장도 없고, 옷도 없고, 남은 건 꿈밖에 없답니다”라는 가사는 공간의 특징을 잘 설명해 준다.

사진 6

사진 7

사진 8

이에 반해 노마의 공간은 화려하지만 폐쇄적이며 나르시시즘의 공간이다. 노마가 조와 같이 영화를 보고 있는 거실 공간(사진 9)의 미장센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자신의 왕년의 모습이 투사된 스크린과 아래에 놓여있는 수많은 노마의 사진이다. 사진 10은 조를 위해 채플린으로 분장한 노마의 모습이다. 노마가 무성영화 시절의 대스타이자 동료인 채플린을 흉내 냄으로써 행복했던 그 시절을 소환하는 것이다. 또한, 노마의 공간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거울이다. 수많은 거울이 노마의 공간을 장식하고 있고, 노마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확인한다. 사진 11도 이러한 거울 장면 중 하나이다. 우측에 현실의 노마와 좌측에 거울 속 노마를 이등분한 미장센은 노마의 나르시시즘과 자아분열로 파국으로 치닫는 노마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사진 9

사진 10

사진 11


<선셋 대로>의 마지막 영화적 순간은 많은 평자들이 영화사에서 손꼽는 엔딩 씬이다(사진12, 13, 14). 질투에 가득 차 조를 권총으로 쏘아 죽인 노마가 경찰과 기자들이 들이닥친 대저택 2층에서 끝없이 아래로 이어진 계단을 통해 유유히 걸어 내려오는 장면은 마치 정지 화면처럼 양식화되어 있다. 조를 죽이고 반쯤 미쳐 버린 노마를 집사 맥스는 아래층으로 유인한다. 그는 노마에게 갑자기 들이닥친 기자들이 <살로메> 촬영 때문이라고 둘러댄다. 노마는 감독이었던 맥스가 “카메라! 액션!”을 외치자 진짜 촬영 현장으로 착각하고 옷을 추리며 2층 침실에서 천천히 계단을 내려간다. 기자들은 연신 플래시를 터트리며 노마의 허세 가득한 표정을 담아낸다. 오랜만에 촬영에 신이 난 노마는 점점 더 연기에 몰입해 손을 흔들며 마치 춤을 추듯 우아하게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려선다. 노마는 잠시 멈춰 서더니 “살로메가 끝난 후에도 다른 작품들을 찍을 테니까요. 이게 내 삶이랍니다. 다른 삶이란 있을 수 없죠”라고 말하며 영화에 무한한 애정을 표한다. 그다음 노마는 모든 걸 다 이루었다는 표정으로 “됐어요, 감독님! 클로즈업 찍어요”라며 카메라 앞으로 다가선다. 노마의 얼굴이 점점 희뿌옇게 클로즈업되다 갑작스럽게 페이드아웃 되면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 아이러니로 점철된 계단 씬 그리고 노마의 클로즈업이 주는 감정의 진폭은 넓고 깊다. 이 장면에서 관객들은 노마를 미치광이 살인자가 아니라, 끝까지 배우로 남고 싶었던 노마의 진심을 비로소 받아들고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사진 12

사진 13

사진 14


<고백할 수 없는>·<리퀘스트>(제작중) 영화감독 최인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