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재스민>으로 2014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케이트 블란쳇

5월 14일은 배우 케이트 블란쳇이 태어난 날이다. 수년간 호주의 연극 신에서 이름을 날리던 블란쳇은 1996년 단편 <파크랜즈>로 영화배우로 데뷔한 후 작가주의 영화부터 오는 가을 개봉하는 마블 히어로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까지 영화의 온갖 갈래를 섭렵하며 당대 최고의 배우에 올라섰다. 필모그래피를 구성하는 영화들의 다양한 면면은 따라갈 자가 없을 정도다. 블란쳇이 지난 20여 년을 지나며 선보였던 캐릭터 가운데 정수들을 뽑아봤다.

(덧. 블란쳇은 여러 자리에서 성 Blanchett의 발음이 '블랜칫'이라고 밝힌 바 있다. 다만 한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블란쳇'으로 표기했다.)

21년 사이의 케이트 블란쳇. 1996년 <파크랜즈>와 2017년 <토르: 라그나로크>.

엘리자베스 여왕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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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골든 에이지>
(Elizabeth, 1998
Elizabeth: The Golden Age, 2007)

<엘리자베스>

케이트 블란쳇은 1998년작 <엘리자베스>로 단숨에 할리우드 최고의 여성배우로 떠올랐다. 그는 절대적인 아름다움만으로 '고전미'의 정석을 보여줬음은 물론, 푸른 풀잎과 눈부신 햇살 닮았던 소녀가 핏기 없는 근엄한 얼굴로 영국을 통치하는 여왕이 되는 인생 여정을 완벽히 소화했다. 블란쳇은 <엘리자베스>의 명연으로 데뷔 3년차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기네스 펠트로가 그 영예를 안았지만, 현재까지도 그해의 오스카는 블란쳇의 몫이었다고 회자되고 있다. 9년 후 속편 <골든 에이지>에서도 엘리자베스의 위엄은 여전했다.

<골든 에이지>

메레디스 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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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리>
(The Talented Mr. Ripley, 1999)

<리플리>는 거짓말에 능한 남자 톰(맷 데이먼)이 신분상승을 위해 악다구니를 벌이는 과정을 낭만적이고 서늘하게 그렸다. 고아로 자란 그가 상류층의 유흥에 빠져 자꾸만 무리수를 둘수록 주변의 사람들은 점점 그를 멀리한다. 다만 메레디스는 다르다. 석유재벌의 딸인 그녀는 자신을 재벌2세 디키라고 소개하는 톰을 사랑하고, 퇴장하는 순간까지 그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다. 매순간 냉철하게 바른 판단만 내릴 것만 같은 블란쳇은 <리플리>에서 거의 백치미에 가깝도록 순진한 얼굴을 보여준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원작에도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인 메레디스는, 처량한 태생으로 결국 괴물이 되어버린 톰의 운명에 최소한의 환기를 더한다.


갈라드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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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 '호빗' 시리즈
(The Lord of Rings, 2001~2003/
The Hobbit, 2012~2014)

요정도 모자라 요정여왕이라니. 블란쳇의 낯선 아름다움은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갈라드리엘에게 더할 나위 없는 외모였다. 도무지 대안이 떠오르지 않는 완벽한 모습. 다른 캐릭터들에 비하면 비중이 적지만, 갈라드리엘의 빛과 같은 존재는 '반지의 제왕'이 결국 판타지라는 걸 증명하는 또 하나의 길이었다. 블란쳇은 이전에 맡았던 역들보다는 연기력이 덜 요구됐을 법한 갈라드리엘로 분하면서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까지 자신의 영향을 떨쳤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주로 꿈결같은 이미지나 말만 보여준 데 반해, 10여 년 만에 다시 출연한 '호빗'에서는 액션을 선보이기도 했다.


베로니카 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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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 게린>
(Veronica Guerin, 2003)

블란쳇의 얼굴은 종종 실존인물의 삶을 담아내는 무대이기도 했다. 세상에 둘은 없을 듯한 독보적인 외모에도 불구하고 블란쳇은 그 인물이 되어 마땅히 그가 살아온 삶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아일랜드의 언론인 베로니카 게린으로 분했을 때도 마찬가지. 아일랜드의 마약 거래를 쫓아가며 단순히 취재를 방해받을 뿐만 아니라 싸이코에 가까운 범인에게 폭력과 협박에 시달리면서도 언론의 역할을 놓지 않았던 게린의 의지가 건조한 얼굴을 통해 전달된다. 아일랜드어의 억양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블란쳇이 원톱으로 영화를 누비는 걸 지켜보는 쾌감이 쏠쏠하다.


케이트 블란쳇 / 셸리 블란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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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와 담배>
(Coffee and Cigarettes, 2003)

세상의 멋진 사람들을 자기 영화에 초대하는 남다른 재능이 있는 짐 자무시가 블란쳇을 놓쳤을 리 없다. 자무시는 커피와 담배를 소재로 한 단편영화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이어붙인 <커피와 담배>에서 온전히 블란쳇만을 위한 시간을 마련했다. 로베르토 베니니, 스티브 부세미, 이기 팝, 탐 웨이츠, 잭 화이트, 빌 머레이 등이 서로 앙상블을 맞춘 다른 파트완 달리, '사촌들'이라는 11분짜리 소품은 오로지 블란쳇 홀로 극을 이끈다. 배우 케이트 블란쳇으로서의 자신과 사촌 셸리, 전혀 다른 두 인물을 표현하는 진풍경이 자무시 특유의 느슨한 대화에 집중할 수 있게끔 이끈다. 


캐서린 햅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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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에이터>
(The Aviator, 2004)

스무 살에 억만장자가 돼 영화 제작과 비행기 조종에 몰두했던 하워드 휴즈의 일대기를 그린 <에비에이터>.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블란쳇은 영화계 마이다스의 손과 섹스심벌로 명성을 떨치던 휴즈의 연인 실존 배우 캐서린 햅번으로 분했다. 햅번은 외형을 두각시키는 화려한 드레스로 치장한 여성배우들 가운데서도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태도로 당대 최고의 배우로 군림했고, 누구도 컨트롤할 수 없었던 하워드 휴즈가 유일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속시원히 설명할 수 없는 블란쳇의 이미지에 걸맞을 뿐만 아니라, 당시 캐서린 햅번의 제스처와 말투까지 완벽하게 모사해 찬사를 받았다. '캐서린'은 블란쳇의 태명이기도 하다.


쉬바 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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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온 스캔들>
(Notes on a Scandal, 2006)

<노트 온 스캔들>의 주인공은 외롭게 홀로 늙어가는 노선생 바바라(주디 덴치)다. 새로 부임한 아름다운 쉬바에게 이끌린 바바라는, 쉬바가 학생과 불륜을 저지르는 걸 보고 그녀를 옭아매기 위해 협박하기에 이른다. 덴치의 서늘한 집착이 돋보이는 연기가 일품이지만, 쉬바 역의 블란쳇 역시 그에 못지않은 에너지로 영화의 텐션을 한껏 높인다. 사회의 금기를 무너뜨리는 매혹적인 자태와 가정과 학교에서의 모범적인 생활을 한데 품은 쉬바의 속을 알 수 없는 매력은, 바바라가 내뿜는 광기와 함께 복잡다단한 치정극에 집중하게 하는 절대적인 요소였다.


주드 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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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낫 데어>
(I'm Not There, 2007)

<아임 낫 데어>는 아무도 밥 딜런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틀 자체를 영화적으로 구현한 작품이다. 토드 헤인즈 감독은 나이, 인종, 성별에 얽매이지 않고 여섯 배우를 기용해 밥 딜런의 일생을 구성했다. 유일한 여성 배우인 블란쳇은 대중문화사에서 꾸준히 언급되는 최고 전성기의 밥 딜런 '주드 퀸'으로 분했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딜런의 내면을 보여주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는 <아임 낫 데어>에서 블란쳇은 수많은 것들에 넌더리 난 당시 딜런의 외적인 이미지를 구현하는 데에만 몰두한다. 연기보다 성대모사에 가까운 접근 방식. 감독이 원했을 바로 그 지점을 정확히 간파한 결과였다.


재스민 프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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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재스민>
(Blue Jasmine, 2013)

<아임 낫 데어>로 베니스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이후, 블란쳇은 인디아나 존스, 벤자민 버튼 등에서 조연으로 활약하고, 고향인 연극 무대로 돌아가 나름대로의 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2013년 우디 앨런의 <블루 재스민>으로 다시금 화려하게 돌아와 세계를 완전히 압도했다. 지구의 도시들을 훑으며 여유로운 코미디를 찍던 앨런은 블란쳇이 분한 재스민이라는 여성을 내세워 부유층의 여성이 점차 쪼그라드는 과정을 웃음기 없이 묘사했다. 재스민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에는 희망과 절망이 뒤엉켜 있는데, 블란쳇은 평온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면서도 결국 불안에 질식해버리는 순간들을 능수능란한 완급조절로 상세히 새겨놓았다. 아무도 2014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이 블란쳇에게 돌아가리라는 걸 의심치 않았다.


캐롤 에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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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
(Carol, 2015)

드디어 <캐롤>이다. 테레즈(루니 마라)와 캐롤(케이트 블란쳇) 두 여자의 사랑을 그린 <캐롤>은 2015년 발표되자마자 전 세계 영화 팬들의 심금을 울리며 단숨에 블란쳇의 최고작으로 등극했다. 샌디 파웰이 구현한 1950년대 뉴욕 중산층의 아름다운 의상이 꼭 맞는 우아한 성품과 사랑을 느끼지 않는 남편과의 불화로 인해 커져만 가는 불안은 캐롤을 설명하는 양면이다.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완전한 호흡으로 두 여자의 사랑이 만나고 부서진 후 다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준 영화처럼, 블란쳇은 테레즈를 바라보며 "하늘에서 떨어진, 나의 천사" 하고 낮게 읊조리면서도 아이를 지키기 위해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 캐롤의 심장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였다. 영화사상 가장 황홀한 엔딩에는 바로 블란쳇의 얼굴이 있었다. 블란쳇을 떠올릴 때 무심코 '캐롤 블란쳇'이라는 이름을 생각하는 이가 비단 에디터뿐일까.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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