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지난 5월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의 악당 살라자르 역으로 오랜만에 한국 극장가에서 만난 하비에르 바르뎀을 대런 아로노스프키의 신작 <마더!>에서 다시 보게 됐다. 한적한 마을에 아내(제니퍼 로렌스)와 함께 사는 시인인 '그'는 평화로워 보이는 이 집안의 거대한 비밀을 감추고 있는 듯하다. 은밀한 속내보다는 즉각적인 위협이 더 어울리던 바르뎀의 모습과는 좀 다른 양상이다. 데뷔 시절부터 근작 <스카이폴>까지의 그의 명연을 정리했다.


라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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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몽 하몽>
(Jamón, jamón, 1992)

바르뎀의 첫 주연작. <룰루>(1990), <하이 힐>(1991)에서 섹시함을 어필하던 그의 매력이 십분 발휘됐다. 영화는 관능적인 여인 실비아(페넬로페 크루즈)와 그녀의 연인 호세 그리고 둘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남자의 어머니에게 고용된 라울(하비에르 바르뎀)의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막장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나이를 뛰어넘는 너저분한 관계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바르뎀은 에로티시즘의 거장 비가스 루나의 연출을 입고 '젊은 남자'가 뿜을 수 있는 육체적인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해냈다.


빅토르 벤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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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카보카>
(Boca a boca, 1995)

배우 지망생인 빅토르는 3주 후 오디션이 있기까지 돈을 벌기 위해 폰섹스 회사에 취직하고, 동성애자인 남편과 이혼하려 하는 아만다와 눈맞고 그녀의 작전에 가담해 엄청난 사건에 휘말린다. '입에서 입으로'라는 뜻처럼 <보카보카>는 끊임없는 수다로 채워져 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휘말려 벙쪄 하는 모습이, 그의 재능이 코미디물에서도 유효하다는 걸 증명한다. 남자까지 유혹할 수 있는 섹시함은 여전하다.


라이브 플래쉬, 1997

레이날도 아레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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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나잇 폴스>
(Before Night Falls, 2000)

레이날도 아레나스는 실존인물이다. 쿠바의 정치혁명이 끝난 1960년대, 예술가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오랜 세월 탄압받았던 시인이다. 젊은 시절 창창한 앞날을 꿈꾸며 예술에 대한 의지를 키우던 청년이 경직된 세상의 폭압에 고독과 절망을 경험하는 바르뎀의 퍼포먼스는, 그의 커리어에 전환점이 되기에 충분한 명연이었다. 베니스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고, 미국 아카데미/골든 글로브에도 후보로 오르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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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찬란한 월요일>
(Los lunes al sol, 2002)

조선소 폐업으로 직장을 잃은 다섯 중년남자들의 일상을 쳐다보는 <햇빛 찬란한 월요일>. 마음이 따뜻해지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다섯 주인공의 비참한 삶을 끈질기게 보여준다. 바르뎀이 연기하는 산타는 무일푼에 법원까지 불려다녀야 하지만 웃음과 배짱을 놓지 않는다. 감정이나 이미지를 '눈에 띄게' 전달하던 바르뎀 특유의 연기 스타일과 전혀 다른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처참한 삶에도 불구하고 다른 삶의 가능성을 잃지 않으려는 산타의 의지는 찬란한 햇빛을 향해 있었다.


댄서 업스테어즈, 2002

라몬 삼페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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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인사이드>
(Mar adentro, 2004)

<씨 인사이드> 역시 실존인물의 인생을 토대로 한다. 스페인 최초로 합법적 안락사를 요청한 전신마비환자 라몬 삼페드로가 그 주인공이다. 젊은 시절 다이빙 사고로 몸을 쓸 수 없게 된 라몬은 20년이 넘는 투병생활에 완전히 지쳤지만, 자살조차 뜻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지지 않고 안락사를 요구한다. 하비에르 바르뎀 하면 떠오르는 육체적인 에너지가 배제될 수밖에 없는 캐릭터지만, 매일 다섯 시간의 분장을 받고 열 시간 이상을 침대 신세를 져야 하는 악전고투를 이겨내고, 라몬이 놓지 않으려 했던 삶의 품위를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고야의 유령, 2006

안톤 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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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 2007)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쉬거는 하비에르 바르뎀의 가장 유명한 캐릭터이자 영화사상 가장 위협적인 악역이라 칭해도 하등 손색이 없다. 바르뎀의 우물처럼 낮은 목소리를 만난 안톤 쉬거는 대번에 관객을 기괴하고 음산한 서부극의 세계로 초대한다. 삼각김밥이 떠오르는 헤어스타일이 우습기는커녕 공포를 극대화한다는 것만으로도 이 전대미문의 캐릭터가 퍼트리는 파멸의 에너지는 설명 가능하다. 다시 봐도 10년 전처럼 똑같이 아주아주 무섭다.


후안 안토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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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Vicky Cristina Barcelona, 2008)

2000년대 들어 '덜' 육감적인 캐릭터를 맡아 '연기 레전드'를 선보이던 바르뎀은 우디 앨런의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비키크리스티나바르셀로나!!!!)에서 세 여자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화가 후안을 연기했다. 초면에 바로 "셋이 같이" 사랑을 나누자고 하는 이 대담한 남자에게 바르셀로나에 놀러온 두 친구 모두 빠져들지만, 영화는 내내 말끔한 기운만 남긴다. "바르뎀이 이렇게 섹시한 남자였다니" 새삼스럽게 돌이킬 수밖에 없다. 우디 앨런 특유의 여성편력은 밥맛이지만.


욱스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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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티풀>
(Biutiful, 2010)

영원한 젊음일 것 같던 바르뎀도 마흔에 촬영한 <비우티풀>에서 '아버지'가 되었다. 평범한 아버지는 아니다. 마약을 거래하고 밀입국자들을 공장에 알선하는 브로커인 욱스발은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은 남자다. 죽은 자와 대화할 수 있는 그는 그동안 저지른 죄들을 되뇌이면서, 힘들게 자랄 두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기억을 남겨두기 위해 애써야 한다. 복잡하고 흔치 않은 처지에 놓인 인물의 지극히 보편적인 감정을 그리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바르뎀에게서 무결점의 삶에 대한 의지를 끄집어냈다.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작.


라울 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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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스카이폴>
(Skyfall, 2012)

<카지노 로얄>의 매즈 미켈슨, <퀀텀 오브 솔러스>의 마티유 아말릭, 최근작 <스펙터>의 크리스토프 왈츠까지... 다니엘 크레이그의 '007' 시리즈의 빌런으론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국민배우들이 캐스팅됐다. 마찬가지로 그 맥락 안에 있는 <스카이폴>의 바르뎀은 그들 가운데 가장 위협적인 존재감을 뿜었다. 눈썹까지 노랗게 염색한 범상찮은 행색은 바르뎀의 낮은 목소리를 만나 빌런의 위용을 제대로 과시한다. 얼굴이 무너져내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시선을 장악한다.


카운슬러, 2013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2017
러빙 파블로, 2017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스카이폴>의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일까, 할리우드 영화의 바르뎀은 주로 위압적인 악역을 주로 맡았다. 리들리 스콧의 난해한 스릴러 <카운슬러>와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모두 괴상한 모습으로 캐릭터의 부정적인 기운을 한껏 키웠다. 다만 2000년대 초중반 보여줬던 생생한 에너지에는 부족해 보인 게 사실이다. 차기작은 쿠바의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를 연기한 <러빙 파블로>와 이란의 새로운 거장 아스가르 파하디의 신작 <에브리바디 노즈>. 두 작품 모두 아내 페넬로페 크루즈와 호흡을 맞췄다. 그의 새로운 전성기를 기대해봐도 좋을까.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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