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스펙터>의 악역 프란츠 오버하우저(크리스토프 왈츠)가 말한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제임스 본드." 마치 그 말이 예언이라도 된 듯 속편 <007 노 타임 투 다이>가 나오기까지 6년이나 걸렸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007 제임스 본드를 14년 동안 맡아서 '역대 최장기 제임스 본드'에 이름을 올렸지만, 막상 출연한 영화는 5편에 그쳤다. 블록버스터 속편들이 길어도 3년 안에 나오는 것을 보면 007의 제작 속도는 그저 '심사숙고'의 결과만은 아니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재임 기간에 유독 사건이 많았던 것도 제작 속도를 부진하게 만들었다. '다니엘 크레이그 사가'를 마무리한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개봉을 기념해 그간 다니엘 크레이그 제임스 본드가 겪은 다사다난한 과정을 정리한다. 


<007 카지노 로얄>

이제는 익숙한 다니엘 크레이그 제임스 본드
하지만 왼쪽 다섯 배우(숀 코너리, 조지 라젠비, 로저 무어, 티모시 달튼, 피어스 브로스넌)를 보고 자란 팬들에겐 말도 안되는 캐스팅이었다

전임자 피어스 브로스넌의 <다이 어나더 데이>에서 신임 다니엘 크레이그의 <007 카지노 로얄>까진, 4년이 걸렸다. 4년이면 긴 시간이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4년밖에' 안 걸린 것 같기도 하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첫 작품부터 꽤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그간 007 제임스 본드를 맡은 배우들과 너무 다르다는 이유로 팬들이 반발했기 때문이다. 다른 배우들이 흑발이었던 것과 달리 크레이그는 금발에 푸른 눈이었고, 몸매 또한 호리호리하지 않고 우락부락했으니까. 그러나 크레이그는 보다 원초적인 신입 요원 제임스 본드를 탁월하게 연기했고, 심지어 스턴트를 직접 수행하면서 이가 부러지는 부상까지 입었다. 그의 열연과 <007 카지노 로얄>의 완성도는 수많은 팬들이 다니엘 크레이그를 새로운 제임스 본드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007 카지노 로얄

감독 마틴 캠벨

출연 다니엘 크레이그, 에바 그린

개봉 2006.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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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퀀텀 오브 솔라스>

<007 카지노 로얄>(왼쪽)의 결말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듯한 포스터

<007 퀀텀 오브 솔라스>는 독특한 속편이다. 007 시리즈가 '시리즈'라고는 하나 각 영화마다 연관성이 크지 않은 반면, <007 퀀텀 오브 솔라스>는 전작 <007 카지노 로얄>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전개를 선택했다. 전편이 호평도 받고 흥행도 했으니 이런 기획은 썩 괜찮아 보였다. 각본만 제대로 됐다면. 문제는 이 영화가 제작되던 2007~2008년은 할리우드 작가 조합이 파업을 하면서 시나리오를 제대로 운용하기 어려웠단 것이다. 다니엘 크레이그와 이번 영화를 연출할 마크 포스터 감독은 시나리오를 끊임없이 수정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전편과 이어지는 지점을 만들게 된 것이다. 파업 때문에 전작과 이어지게 만들었는데, 파업 때문에 스토리가 빈약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었던 것. 

액션의 분량도, 난도도 높았던 <007 퀀텀 오브 솔라스>

거기에 이번 영화는 액션의 난이도나 빈도가 무지막지했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전작처럼 웬만한 스턴트는 직접 연기했는데, 그 과정에서 큰 부상만 서너 번 입었다. 얼굴이 찢어져 수술을 받기도 하고, 손가락 끝이 잘리는 일도 있었으며, 오른쪽 어깨 부상으로 철심을 박아야 했다. 다니엘 크레이그로선 힘든 형편에 고군분투했는데, 이 영화가 유독 박한 평가를 받았으니 씁쓸했을 듯하다. 

007 퀀텀 오브 솔러스

감독 마크 포스터

출연 다니엘 크레이그, 올가 쿠릴렌코, 마티유 아말릭, 주디 덴치

개봉 2008.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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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스카이폴>

영화 <터미널>를 기억하는가. 미국에 가는 사이에 고국이 망해서 공항에 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007 스카이폴>이 그런 상황이었다. <007 퀀텀 오브 솔라스>에서 뿌린 떡밥을 빨리 회수해도 모자랄 판에, 007의 공동제작사이자 배급사 MGM/UA의 모회사 MGM 홀딩스가 파산하면서 007 영화 제작이 전면 중단됐다. MGM 홀딩스가 파산에서 면한 2011년, 007 제작진은 2012년 신작 개봉을 목표로 박차를 가했다. 크랭크인(촬영 시작) 후에는 별다른 이슈 없이 무난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 다니엘 크레이그가 리허설 때 부상을 입어 촬영이 2주 연기되긴 했으나, 액땜이 됐는지 본 촬영에선 큰 부상을 입지 않았다고.

007 스카이폴

감독 샘 멘데스

출연 랄프 파인즈, 다니엘 크레이그, 하비에르 바르뎀, 주디 덴치

개봉 2012.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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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스펙터>

007 시리즈 50주년 기념작으로 잠시 이야기의 방향을 틀었던 <007 스카이폴> 이후 <007 스펙터>는 다시 전작들과 긴밀하게 연결된 스토리를 선택했다. <007 스카이폴>이 원작과 영화 팬 사이에서 호불호를 빚긴 했으나 역대급 흥행과 특유의 분위기 형성에 성공했기에 <007 스펙터>에 쏟아진 기대감 또한 상당했다. 그러나 그 기대감은 극장에서 뚜껑을 열기 전 깨졌다. 바로 2014년 소니 픽쳐스 본사가 해킹을 당하면서 그들이 배급하는 <007 스펙터>의 시나리오 초고가 유출됐기 때문이다. 개봉 예정일보다 1년 전에 초고가 유출되는, 그것도 007 시리즈의 신작이 결말까지 유출된 사건은 인터넷에 일파만파 퍼졌다. 하필 <007 스펙터>에서 가장 비판받은 시나리오가 유출로 제일 먼저 공개됐으니… 물론, 그럼에도 <007 스펙터>는 007 시리즈기 때문에 전 세계 8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남기긴 했다. 그러나 이 유출은 007 시리즈와는 마지막 작품일 수도 있는 소니 픽처스, 그리고 장기간 영화를 준비한 제작팀 모두를 실의에 빠뜨리기 충분했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이번 작품에서도 코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고, 제작이 끝난 시점에서 “다음 편에 출연하느니 차라리 손목을 긋겠다”라는 과격한 발언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007 스펙터

감독 샘 멘데스

출연 다니엘 크레이그, 랄프 파인즈, 레아 세이두, 모니카 벨루치, 크리스토프 왈츠, 데이브 바티스타

개봉 2015.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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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노 타임 투 다이>

같은 듯 다른 포스터들의 차이는 개봉일.
결국 1년 6개월 만에 극장에 걸렸다.

'차기작은 2년 주기로 내자'는 기획이 무색하게도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개봉까지 가장 오래 걸린 007 영화가 됐다. 처음엔 대니 보일이 연출자로 합류했다가 제작진과의 견해 차이로 하차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캐리 조지 후쿠나가 감독이 앉았다. 연출 발탁에 시간이 걸린 것, (연례행사처럼) 다니엘 크레이그가 부상을 입어 촬영이 다소 지연된 것을 빼면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별다른 사건 없이 개봉할 줄 알았다. 그런데 2020년 초부터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퍼져가 신작 개봉이 어려워졌고,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2020년 4월 개봉에서 1년 6개월이나 지난 2021년 10월에 관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단순한 개봉 연기 같은데, 수많은 브랜드의 협찬으로 제작하는 007 시리즈는 개봉이 미뤄지는 것부터 크나큰 손해였다. 거기에 개봉 연기만 4차례 거듭하면서 예고편, 포스터 등 홍보 자료와 활동도 반복해야 했으니 마케팅 비용 또한 천정부지로 높아졌다. 보통 총 제작비의 두 배를 벌어야 '손익분기점'을 넘는 할리우드 영화가 9억 달러가 손익분기점으로 추정된다고 하니 전작만큼 벌어도 간신히 본전치기인 셈이다. 현재 한국과 영국에 선개봉하고 미국 개봉을 앞두고 있는 <007 노 타임 투 다이>가 이 난관을 뚫고 어떤 성과를 거둘지, 기대하면서도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보게 된다. 

007 노 타임 투 다이

감독 캐리 후쿠나가

출연 다니엘 크레이그, 라미 말렉, 라샤나 린치, 레아 세이두

개봉 2021.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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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