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언제나 우리를 부른다. 한번 오라고. 이상한 건 산의 부름은 나이가 어느 정도 차면 들리기 시작한다는 거다. 서른 중반이 넘어가면 저 멀리 보이는 산을 보며 한번쯤 생각한다. 산에나 한번 가볼까. 수백, 수천년 동안 산은 그 자리에서 우리를 불렀다. 다만 듣지 못했을 뿐. 중년의 아재 에디터는 산의 목소리가 들렸다. 늦은 휴가로 산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지리산에 다녀왔다. 평소에 산에 다니지는 않았다. 1년에 한번 동네 뒷산 정도 가긴 했다. 갑자기 지리산 바람이 분 에디터에게 동료들은 우려의 눈빛을 보냈다. 왜 지리산이냐, 조난당하면 어쩌냐, 혼자서 진짜 괜찮겠냐. 에디터처럼 산보다는 영화관이 익숙한 동료들의 걱정을 뒤로 하고 구례행 버스를 탔다.
첫날, 3.15km. 타협을 하고 말았다.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걷기로 했던 계획을 뒤집었다. 구례 터미널에서 성삼재까지 가는 버스를 탔다. 지리산 예행 연습을 한답시고 산행 이틀 전 북한산 백운대에 갔던 게 화근이었다. 오랜만에 많이 움직인 허벅지가 화를 내고 있었다. 생전 처음 경험한 배낭의 무게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성삼재 주차장에 도착한 버스에서 내렸다. 이미 산 중턱이다. 완만한 산책로가 노고단까지 이어졌다. 북한산 둘레길보다 쉬운 길이지만 땀이 났다. 오후 4시쯤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해서 멍하니 앉아 식사시간만 기다렸다. 고기를 굽고 소주 한잔을 마시며 해질녘 노고단 아래로 몰려드는 구름을 구경했다.
둘째날, 13.8km. 오전 8시에 배낭을 챙기고 길을 나섰다. 첫날 고작 3km를 걸었지만 북한산 후유증으로 여전히 근육통이 심했다. 최대한 천천히 발을 욺겼다. 희끗희끗한 머리를 길게 길러서 묶은 자연인 같은 풍모의 깡마른 아저씨가 스쳐 지나며 한마디 했다. 그렇게 해서 언제 가냐고. 그러게. 오후 1시쯤에는 도착하겠지 했던 연하천 대피소에 2시가 다 돼서 도착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했다. 벽소령 대피소까지는 3.6km. 부지런히 가고 싶었지만 다리는 무겁기만 하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래도 발을 디딜 힘은 있었다. 신기했다. 이 봉우리 넘으면 나올까. 다음 봉우리 넘으면 나오겠지 하면서 몇 개의 봉우리를 더 넘었다. 움푹 들어간 능선에 위치한 벽소령 대피소에 도착했다. 5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터덜터덜 취사장으로 내려갔다. 어제 노고단에서 만났던 대구에서 온 아저씨는 이미 식사를 마친 상태였다. 지리산 10경 가운데 하나라는 벽소명월(碧宵明月)을 보고 싶었다. 캄캄한 밤. 11시가 되어도 달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깊은 산중에는 달이 늦게 뜬다고 했다. 대신 촘촘히 박힌 별을 잠시 올려봤다. 차가운 밤공기가 상쾌했다.
셋째날, 9.3km. 벽소령 대피소에서 장터목 대피소까지 가는 이날의 여정은 어제보다 짧다. 심리적 여유가 생겼다. 배낭의 무게도 근육통도 익숙해졌다. 세석 대피소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르락 내리락. 어제처럼 몇 개의 봉우리를 지나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 정도였다. 천왕봉을 코앞에 둔 장터목 대피소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체험학습을 온 초등학생들, 단체로 온 대학생들, 역시 단체로 온 군청직원들까지. 백무동에서 올라온 서울에서 온 아저씨를 만났다. 에디터와는 반대 방향의 종주 첫날인 그는 한껏 들떠 보였다. 대학 시절 지리산 추억을 한참 들었다.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서산에서 온 아저씨들과 어울렸다. 산행 3일째가 되니 먼저 술 한잔 달라는 말이 자연스레 나왔다. 그들은 아낌없이 고기와 술을 내주었다. ‘린’이라는 이름의 충청도 지역 소주가 달았다.
마지막날, 6.9km. 잠이 오지 않는다. 술기운도 소용이 없다. 밤새 뒤척이다 새벽 4시가 되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천왕봉 일출을 보기 위해서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본다는 일출이다. 캄캄한 어둠을 둟고 천왕봉에 올랐다. 태풍보다 강한 바람이 천왕봉에 몰아치고 있었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을까 진심으로 걱정됐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안개인지 구름인지에 가려 태양은 온전한 모습을 감췄다. 아버지, 할아버지의 덕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중산리로 하산길을 잡았다. 에디터가 2박3일 동안 왔던 길인 화엄사에서 장터목 대피소까지 13시간 만에 돌파했다는 산악인 아저씨가 추천해준 길이었다. 끝도 없는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로타리 대피소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칼바위 능선을 타고 또 걸었다. 내리막길의 돌계단을 내디딜 때마다 지친 허벅지와 무릎에 통증이 느껴졌다. 차라리 오르막길이 낫겠다 싶다. 그럴 리가. 헉헉거리며 천왕봉을 향하는 등산객을 보며 그래도 하산길이 낫지 싶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해서 그런지 하산길은 더디기만 하다. 새벽 5시에 출발해 오전 11시가 넘어 중산리 탐방센터에 도착했다. 천왕봉을 올려본다. 첫 지리산이 끝났다. 진주로 가는 버스에 타자마자 졸음이 쏟아졌다.
다시 출근했다. 지리산에 갔던 기억이 벌써 가물가물하다. 일주일을 비웠던 책상에 앉으니 언제 그랬냐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제도 출근한 기분이 들었다.
영화를 보지 않는 시간은 끝났다. 이번주에는 또 어떤 영화가 개봉하는지, 어떤 영화가 재밌을지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부지런히 영화를 보고 또 볼 예정이다. <베이비 드라이버>와 <몬스터 콜>을 아직 보지 못했다. 개봉 예정작인 <아이 캔 스피크>와 <잃어버린 도시 Z>도 챙겨보려 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르인 일본 학원물 영화 <치어 댄스>도 보고 싶다. 히로세 스즈가 출연한다. 무엇보다 다음주 개봉하는 <킹스맨: 골든 서클>을 놓칠 수 없다. 언젠가 산이 다시 한번 부를 때가 올 것 같다. 그때 다시 한번 영화와 잠깐 이별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직은 산보다 영화가 좋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신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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