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유영길 촬영감독을 기억하며, '란 12.3'을 다시 봐야 하는 이유

지난 5월 4일, 개봉한 지 2주 정도 만에 누적 관객수 20만 명을 돌파하고 손익분기점을 달성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이명세 감독의 다큐멘터리 〈란 12.3〉이 지난 5월 4일, 개봉한 지 2주 정도 만에 누적 관객수 20만 명을 돌파하고 손익분기점을 달성했다. 이로써 〈란 12.3〉은 올해 개봉한 한국영화 중 〈왕과 사는 남자〉와 〈살목지〉에 이어 세 번째로 손익분기점을 돌파한 작품이 됐다. 2024년 12월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의 기습적인 비상계엄 선포로 평화로웠던 일상이 깨지고, 민주주의가 멈췄던 그 시간을 기록한 작품이 거둔 성과라 남다른 의미가 있다. 〈란 12.3〉에 등장하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영상처럼, 무장한 군 병력은 헌법 기관을 무력화하려 했고, 계엄에 반대하여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시민과 국회의원들은 국회로 몰려갔다. 〈란 12.3〉은 분초를 다투는 상황 속, 이들의 숨 막히는 싸움을 다채로운 방식으로 담아낸다.

〈란 12.3〉 광주극장 상영 사진
〈란 12.3〉 광주극장 상영 사진

이명세 감독은 〈란 12.3〉에 대해, 우리가 지켜낸 그날 밤의 기록을 담은 ‘시네마틱 다큐멘터리’로 규정한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도 형사들의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다채로운 기법을 시도해 영화적 효과를 극대화했다면, 〈란 12.3〉도 ‘알고 있는 이야기’와 ‘새로운 사실’ 사이에서 애니메이션 등을 활용해 탁월한 ‘범죄의 재구성’을 보여준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그 범죄가 아닌, 그 범죄를 막으러 여의도로 향한 누군가의 ‘일과의 재구성’이다. 오전에는 ‘뉴스공장’을 보고, 오후에는 ‘매불쇼’를 보고, 자기 전에는 ‘사장남천동’을 보는 일과다. 게다가 국회의사당으로 향하는 수많은 버스 중, 작품에는 260번 버스가 애니메이션으로 등장하는데, 그 또한 실제 이명세 감독의 생활 반경을 반영한 것이라 한다. ‘연필로 명상하기’에서 〈소중한 날의 꿈〉(2011) 등에 참여한 바 있는, 현 아이데아 소속 한혜진 감독의 애니메이션은 실사 화면과 충돌하는 지점 없이 일상의 소중함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란 12.3〉
〈란 12.3〉

〈란 12.3〉에는 의도적인 유머 포인트들이 꽤 많다는 것도 흥미롭다. 가령, 당시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던 것처럼 ‘대통령 김건희’라고 타이핑하다가 황급히 ‘대통령 윤석열’로 바꾸는 장면이라던가, 역시 실제 정치인의 별명을 활용해 역시 ‘박뿜계’라고 타이핑하다가 ‘박범계’라고 정정하는 장면이라던가(민주당 박범계 의원은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청문회에서 뜬금없이 웃음을 터뜨려 화제가 되면서 ‘박뿜계’라는 애칭을 얻은 바 있다), 한덕수 전 총리를 별명 그대로 ‘엄지’ 모양으로 처리한 장면, 그리고 12월 3일 당일 비상계엄 해제요구 결의안 관련 서류를 가지고 열심히 계단을 뛰어오르는 국회 직원 옆으로 “계단 오르기는 건강에 좋습니다”라는 문구를 보여주는 장면도 그렇다. 여러 요소들의 수위 조절을 깊게 고민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에서 〈란 12.3〉은 상당히 타율 높은 유머를 보여준다. 물론 그것은 작품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광경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부정선거에 미쳐있던 윤석열은 ‘여론조사 꽃’이 있는 서울 충정로 ‘벙커’에도 계엄군을 보냈다. 벙커에 도착한 계엄군이 건물을 올려다보는 시선, 이명세 감독이 〈란 12.3〉에서 꼽는 가장 공포스러운 장면이라 한다.

〈란 12.3〉
〈란 12.3〉

더불어 〈란 12.3〉은 12월 3일 당일, TV나 유튜브 생중계를 통해 그 모든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도 모를 법한 이면의 이야기를 충실히 담아낸다. 어쩌면 여기에 가장 중요한 의미가 담겼는지도 모른다. 12·3계엄 당시 수도방위사령부 작전처장으로서 계엄군이 헬기 출동 사유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항공구역 진입을 요청하자 거절한 김문상 대령이 여러 번 등장하고, 국회의사당 뒤에서 취재하던 도중 계엄군의 케이블타이로 포박당할 뻔했던 뉴스토마토 유지웅 기자의 모습이 등장한다. 이명세 감독은 작품을 제작하며 엄청나게 방대한 자료를 모으고 분석했을 텐데, 결코 그를 잊지 않았다. 앞서 얘기한 유머 뒤의 공포처럼, 애니메이션 뒤의 실제상황이 역시 〈란 12.3〉의 본질이다.

〈란 12.3〉
〈란 12.3〉

거의 실시간으로 12월 3일 하룻밤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란 12.3〉의 상영시간 대부분을 차지하는 메인이긴 한데, 그날 이후 대통령실에서 윤석열 체포영장이 집행되고 뒤이어 탄핵 소추가 의결되던 역사적 순간, 그리고 서부지방법원에서 일어난 폭동을 지나 이재명 대통령의 당선 등이 후일담처럼 후반부에 이어진다. 그 웅장한 마지막은 바로, 추운 겨울 은박 담요를 뒤집어 썼던 ‘키세스 전사대’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해 2025 세계정치학회 서울총회 개막식 기조연설을 하며 “모진 추위를 서로의 온기로 이겨낸 키세스 시위대, 함께하지 못한 시민들의 핫팩·난방버스 연대, 금남로의 주먹밥을 계승한 여의도와 한남동의 ‘선결제’까지, 대한민국 국민은 내란 극복 과정에서, 참여와 연대의 가치를 확인하며 민주주의 역사의 새로운 장을 써 내려갔다”고 할 때, 가장 먼저 언급했던 바로 그 키세스 전사대 말이다. 그야말로 가슴 뭉클한 순간이다.

〈란 12.3〉
〈란 12.3〉

〈란 12.3〉은 개봉 이후 여러 번의 관객과의 대화를 가졌는데, 그중에는 이명세 감독과 여러 편을 함께 한 박중훈 배우도 있었다. 그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 거의 넋이 나간 채로 국회로 들어와 자기 자리를 찾던 당시 이재명 대표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만약 그 상황이 영화라고 한다면, 아마도 시나리오에 ‘이재명 대표 진이 빠지고 앞이 캄캄하다’라는 지문이 쓰여있지 않았을까요” 당시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는지, 결코 픽션이 따라갈 수 없는 현실의 무게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것.

작품에 삽입된 광주민주화운동 영상
작품에 삽입된 광주민주화운동 영상
유영길 촬영감독(왼)과 이명세 감독(출처: 한국영상자료원)
유영길 촬영감독(왼)과 이명세 감독(출처: 한국영상자료원)

〈란 12.3〉에는 ‘유영길 촬영감독을 기억하며’라는 자막이 있다. 이명세 감독과는 데뷔작 〈개그맨〉(1989)부터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 〈첫사랑〉(1993), 〈남자는 괴로워〉(1995) 등을 쭉 작업했고 그 외에도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1988),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장선우 감독의 〈우묵배미의 사랑〉(1990), 〈꽃잎〉(1996),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1990), 〈하얀 전쟁〉(1992), 이창동 감독의 〈초록 물고기〉(1997),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1998) 등 198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리얼리즘 미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거인’이었다. 그런데 그에 대해 덜 알려진 이야기 중 하나는, 과거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현장에 가장 먼저 뛰어들어 계엄군의 과격 진압이 시작되는 그 순간을 최초로 촬영해 세상에 알린 저널리스트라는 것. 지난 2021년 ‘힌츠페터 국제보도상 조직위원회’는 이를 뒤늦게 파악하고 그 공로를 인정해 ‘힌츠페터 국제보도상 오월의 광주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영상은 〈란 12.3〉에도 쓰였다. 개인적으로는 그 자막이 가장 강렬하고 뭉클했다. 더 이상 ‘이명세 감독, 유영길 촬영’이라는,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크레딧의 영화를 더 이상 볼 수 없는데, 〈란 12.3〉을 통해 마치 두 사람의 신작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바로 그 ‘기억’이 〈란 12.3〉을 만든 힘이다.

영화인

김나희 평론가의 '비발디와 나' ① 봄, 혹은 들리기만 했던 존재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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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5. 7.

김나희 평론가의 '비발디와 나' ① 봄, 혹은 들리기만 했던 존재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영화 〈비발디와 나〉의 원제는 《Primavera》, 이탈리아어로 봄이다. 비발디의 《사계》 중 첫 번째 협주곡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의 봄은 해방의 다른 말이다. 1968년 프라하의 봄, 1980년 서울의 봄, 2011년 아랍의 봄처럼, 억압의 시기 이후에 다가왔던 시간들. 오래 억눌린 것들이 다시 본래의 색을 되찾고 피어나는 순간들이다. 우리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봄'이 해방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영화 엔딩 크레딧과 함께 듣는 〈봄〉과 이 단어가 갖는 의미는 오랜 여운을 남긴다. ​18세기 초 베네치아,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는 버려진 소녀들을 거두고 교육시켜 탁월한 음악가로 길러냈다. 그녀들은 촘촘한 나무 격자 뒤에서, 존재를 감춘 상태로만 연주할 수 있다.

김나희 평론가의 '비발디와 나' ② 봄, 혹은 들리기만 했던 존재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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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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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주 잠시나마 상대를 다 이해하거나 알았다고 느끼고, 그렇게 믿기도 한다. 음악 안에서, 음악으로 소통하는 것이 그러하다.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 가장 깊은 층위는 비발디가 밤중에 먼저 체칠리아의 은신처를 찾아와 쏟아내는 고백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사랑의 고백이 아닌, 음악을 향해 쏟아내는 절절한 진심이다. 음악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그는 말한다. 천식으로 자주 몸이 무너지는 그가 오직 음악 안에서만 격렬해질 수 있다고. 자신의 전부를 음악에 걸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진정성 때문에 이 장면은 가장 사무친다. 비발디에게 음악은 사회적 지위로, 이름으로, 이동의 자유로 환원된다. 체칠리아에게는, 아무리 탁월해도, 그 어느 것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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