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철의 사물함] '호프' 성기대교를 질주하는 성기의 트러커캡을 통해 '황해' '곡성' 다시 보기

나는 영화 속 물건에 꽂힌다. 감독, 촬영감독, 미술감독, 아니면 배우 등 대체 왜 저 물건을 카메라 앞에 두었을까 깊은 고민에 빠진다. ‘주성철의 사물함’은 내 눈에 사뿐히 지르밟힌 영화 속 물건에 대한 기록이다.

〈호프〉
〈호프〉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와 나홍진 감독의 〈곡성〉은 각각 6월 1일과 5월 12일, 같은 해인 2016년 개봉했다. 공교롭게도 그해 각각 칸영화제 경쟁부문과 비경쟁부문에 초청됐을 뿐만 아니라, 흥행 역시 각각 429만 명과 687만 명을 동원했다. 그래서 당시 전 직장에서 두 감독을 모시고 대담을 진행한 적 있다. 나홍진 감독이 〈곡성〉을 준비하며 박찬욱 감독에게 완성된 시나리오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대담 당일 나홍진 감독은 심지어 꼼꼼하게 조언해준 박찬욱 감독의 메모를 액자로 만들어 가져오기도 했다. 그 종이에 메모만 있고 사인이 없어서 “박찬욱 감독님이 썼다는 걸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굳이 사인을 받기 위해 가져온 것이다.

〈호프〉 메이킹 영상의 성기(조인성)

프로덕션 디자인이라는 관점에서, 확실히 영화 속 사물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두 감독인 만큼 대화는 ‘소품’으로부터 시작됐다. 박찬욱 감독은 외지인(쿠니무라 준)의 집에 붙어있는, 누구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본 사람 사진’에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심지어 “〈곡성〉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이미지로 남았다”며 영화를 위해 실제로 촬영한 사진인지, 따로 작업한 사진인지 물어봤다. 그 영화 속 사물에 대한 질문이 첫 질문이었다. 그러자 나홍진 감독은 “실제 일본의 유명 사진작가가 찍어놓은 걸 구입한 것”이라며 “저도 그 사진을 보고 감독님처럼 그런 특별한 느낌을 받아서 그대로 가져와서 사용한 것 같다”고 했다. 〈곡성〉이라는 영화에서 일본인으로 여겨지는, 알려진 이름 없이 ‘외지인’이라 불리는 캐릭터가 끌고 가는 서사적 맥락에 놓여있는 소품이라 더 묘한 느낌을 줬다.

〈호프〉 메이킹 영상의 합천 성기대교 촬영장면
〈호프〉 메이킹 영상의 합천 성기대교 촬영장면

나홍진 감독의 신작 〈호프〉의 사물들도 예외는 아니다. 일단 조인성 배우가 연기하는 ‘성기’가 ‘성기대교’ 위를 질주한다. 경남 합천군 가야면 성기리에 있는 성기대교는 옛 88올림픽고속도로에 있던 다리로 1984년 완공 당시, 아파트 높이로는 20층 높이 정도 되는 58미터 높이로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최고 높이 교량이었다. 한자로는 ‘성기’(城基)인데 아마도 길고 긴 액션신 촬영이 가능한 폐교를 섭외하다가 발견했을 테니, 성기대교를 발견하고 성기라는 이름을 지은 것 아닐까 싶다. 아무튼 〈곡성〉의 사진처럼 서사적 맥락을 고려하자면, 가장 우주와 가까운 다리 위를 사람과 말이 질주하는 상황이라고 하면 지나친 해석이려나.

옥수수 종묘 ‘Prosevenca’와 성기(조인성)의 트러커캡 문구

최근 가장 화제가 된 건, 성기(조인성)가 착용한 초록색 트러커캡의 로고다. 모자에 적힌 ‘pro se ven a’, ‘LO M JOR EN SEM LAS’라는 알파벳들이 실제 베네수엘라에 있는 옥수수 및 수수 종묘 회사 이름 ‘Prosevenca’를 표현했다는 것. 빠져있는 알파벳을 조합하면 ‘lo mejor en semillas’라는 문구가 되는데, 그게 스페인어로 ‘최고의 종자’ 혹은 ‘최고의 씨앗’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쉴 새 없이 맞고 나가떨어지고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긴 성기를 두고 관객 사이에서 ‘조인성 외계인설’이 퍼져나가는 가운데, 나홍진 감독 역시 불사의 존재 성기에 대해 “인류의 강력한 생존 의지를 보여주는 캐릭터”라 했으니, 성기에게 ‘최고의 종자’라는 부제를 만들어준 건 절묘하다. 외계인 마베이요를 앞에 두고 단검 하나로 대결하려 들고 “지구인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줄게!”라고 외치는 그는 인류 최고의 종자인 것.

〈곡성〉
〈곡성〉

다시 두 감독의 대담 이야기로 돌아와, 박찬욱 감독이 〈곡성〉에서 가장 매료된 지점은 사물의 ‘존재’가 아니라 ‘부재’라고 했다. “〈곡성〉을 보면서 가장 많이 웃은 관객 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며, 심지어 “아내와 함께 보면서 너무 많이 웃어서 주변에서 눈치까지 줬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장면으로 꼽은 건 바로 경찰 종구(곽도원)의 동네 친구 덕기(전배수)를 만나는 장면이다. 외지인에 대한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건강원을 운영하는 덕기를 찾아가는데, 그는 깊숙한 산기슭에서 고라니 시체를 물어뜯는 훈도시 차림의 외지인을 목격한 인물이다. 그가 증거를 보여주겠다면서 냉장고를 열어보는데, “우리 집에 있대니께유!”라고 주장하는 〈호프〉의 양배(음문석)와 달리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비탈 아래로 떨어져 외지인과 맞닥뜨리고 아무런 작업도 못해서 그 날 수확물이 전혀 없다는 것이 목격의 증거라는 것. ‘증거가 없는 게 증거’라는 라는 그 장면에 대해 “〈곡성〉이라는 영화 전체를 요약하고 있다. 증거 없음이 증거이고, 부재함으로써 설명해준다는 것이 흘러가는 유머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담긴 장면이었다”는 게 박찬욱 감독의 평가였다.

〈황해〉
〈황해〉
〈황해〉의 구남이 묵던 ‘희망 여인숙’
〈황해〉의 구남이 묵던 ‘희망 여인숙’

나홍진 감독 영화의 ‘사물’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결국 그 덕기의 비어있는 냉장고가 떠오른다. 덕분에 최근 〈곡성〉과 〈황해〉를 다시 봤다. 공교롭게도 그 모자는 〈황해〉(2010)에서 살기 위해 전국방방 곡곡 버스와 도보로만 다니는 역시 ‘최고의 종자’ 구남(하정우)이 쓰고 다니던 존 디어(JOHN DEERE) 트러커캡과도 닮았다. 모자에 수염에, 구남과 성기는 여러모로 닮기도 했다. 곱씹어보면 〈곡성〉의 덕기 역시 벼락을 맞고도 버젓이 살아남은 인물이 아니던가. 성기의 강인한 생명력에 가려지긴 했지만, 외계인 바미기르에게 크게 한 방 맞고 날아간 〈호프〉의 범석(황정민)도 살아있는 게 신기한 인물이다. 이처럼 나홍진 감독 영화에는 쉴 새 없이 ‘초인’들이 등장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쯤, 〈황해〉에서 아내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낙담한 구남이 절망 가득한 표정으로 싸구려 여인숙에 묵는 장면이 나왔는데, 그 여인숙 이름이 ‘희망 여인숙’이었다. 그렇게 〈황해〉에서도 ‘호프’(HOPE)를 만났다.

영화 속 물건들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 ‘주성철의 사물함’을 시작으로 떡상을 기대하는 배우 사용 설명서 ‘김지연의 보석함’, 내 마음을 움직인 영화음악 감상실 ‘추아영의 오르골’, 서브컬처 잡상인의 구매일지 ‘성찬얼의 만화책’까지 씨네플레이 기자들이 저마다의 취향과 시선으로 격주 연재를 시작합니다.

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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