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철의 사물함] 나무가 나무를 위로할 때, '종이 울리는 순간'과 '어쩔수가없다'의 첼로

나는 영화 속 물건에 꽂힌다. 감독, 촬영감독, 미술감독, 아니면 배우 등 대체 왜 저 물건을 카메라 앞에 두었을까 깊은 고민에 빠진다. ‘주성철의 사물함’은 내 눈에 사뿐히 지르밟힌 영화 속 물건에 대한 기록이다.

〈종이 울리는 순간〉 첼리스트 마리오 브루넬로
〈종이 울리는 순간〉 첼리스트 마리오 브루넬로

나무가 나무를 위로한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파괴된 강원도 정선의 천년의 숲 가리왕산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종이 울리는 순간〉에서는 이탈리아 첼리스트 마리오 브루넬로가 열었던 ‘올림픽에 희생되는 나무들을 위한 독주회’를 볼 수 있다. 2018년 올림픽의 문제가 2026년 올림픽으로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최근 남부 알프스의 대표적인 휴양 도시이자, 담페초 협곡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돌로미티의 코르티나 지역에서는 2026년 코르티나-밀라노 동계올림픽 준비로 무수히 많은 나무들이 베어졌다. 이탈리아 정부는 IOC에 올림픽 유치 신청서를 제출하며 “사회적, 환경적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며 지속 가능한 올림픽을 열겠다”고 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새로운 스키장을 만들기 위해 파괴된 활엽수림 나무들의 수령은 상당수가 200년 이상의 고목이었다. 공사가 예정된 장소의 바깥에서도 많은 나무들이 베어졌다. 마리오 브루넬로가 그 희생된 나무들을 위로하기 위해 스키장의 쓰러진 나무 앞에 앉아 첼로를 연주한 것이다.

〈종이 울리는 순간〉

마리오 브루넬로는 이탈리아인으로서는 최초로 1986년 제8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2017년에는 작곡가 윤이상을 기리는 통영국제음악제에도 참여해 멋진 연주를 들려줬다. 2023년에도 이탈리아 바로크 악단 ‘아카데미아 델라눈치아타’와 함께 방한해 바로크 시대의 고(古)악기로 바흐의 원전 음색을 되살려내는 공연을 펼친 바 있다. 평소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해온 돌로미티 산악지대나 사하라 사막 등 음향시설이 없는 자연으로 찾아가 연주해온 것으로 유명한, 자연에서 연주하는 것이 악기의 진짜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준다는 믿음을 가진, (이런 표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표적인 자연친화적 첼리스트다. 그는 무려 1600년대에 만들어진 마지니 첼로를 쓰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산이나 사막 같은 거친 환경에서 첼로를 연주하면 그 500살 가까운 악기가 상하지 않냐는 질문에 “원래 나무로 만들어진 악기라 오히려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즐긴다. 더 좋은 소리를 낸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게 세상 모든 악기는 원래 자연에서 왔다.

〈어쩔수가없다〉 예고편 캡처

굴착기에 의해 나무가 희생되는 순간, 그리고 그를 위로하는 첼로의 선율은 역시 올해 개봉한 박찬욱 감독 〈어쩔수가없다〉에서도 볼 수 있었다. 〈종이 울리는 순간〉과 〈어쩔수가없다〉 두 작품의 삼림 파괴 장면은 놀랍도록 닮았다. 올림픽을 위해 나무가 베어지는 것처럼 노동자들의 ‘모가지’가 베어지는 〈어쩔수가없다〉에서, 나무는 아버지 만수(이병헌)의 종이가 되고 딸 리원(최소율)의 첼로도 된다. 그때 장난 혹은 가벼운 농담이라는 뜻을 가진 마렝 마레의 ‘르 바디나주’(Le Badinage)가 프랑스 첼리스트 쟝 기엔 케라스의 연주로 울려 퍼지며 쓰러지는 나무들을 위로한다. 동시에 공장 기계 소음에 파묻혀 어느덧 AI의 업무에 걸리적거리는 존재가 되어버린 인간 만수도 위로한다. 흥미롭게도 마리오 브루넬로와 쟝 기엔 케라스는 지난해 제73회 그라나나 페스티벌 무대에 함께 선 적도 있다. 두 첼리스트는 1년 뒤 각자의 연주가 한국 극장에서 비슷한 정서로 거의 동시에 들려질 것을 알았을까. 올림픽 경기장에서 개막을 알리는 종이 울리는 순간 어쩔 수가 없다, 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나무로 만들어진 첼로가 나무를 위로할 때,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경고의 종소리가 울리는 것도 어쩔 수가 없다.

***** 영화 속 물건들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 ‘주성철의 사물함’을 시작으로 떡상을 기대하는 배우 사용 설명서 ‘김지연의 보석함’, 내 마음을 움직인 영화음악 감상실 ‘추아영의 오르골’, 서브컬처 잡상인의 구매일지 ‘성찬얼의 만화책’까지 씨네플레이 기자들이 저마다의 취향과 시선으로 격주 연재를 시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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